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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벌새 Jan 23. 2024

진정한 아름다움의 버거움

영화 <시>, 이창동


   언어의 논리가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영화 <시>가 그렇다. <시>의 각본집에 수록된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를 보며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말과 글, 그리고 논리라는 틀 안에서는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영역에 영화 <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언어를 통해서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영화인 것이다. 하물며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의 언어로도 잡히지 않는 영환데, 경험과 깊이가 한없이 부족한 내가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미자(윤정희)가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큰 도전일 지도 모르겠다.

   <시>의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들,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겉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시>의 김용탁 시인은 말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한다고. 그리고 진짜 보는 것은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라고.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뒤집어도 보고, 한입 베어 물어도 보고, 스민 햇볕도 상상해 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것이라고.


   우리는 <시>에서 미자가 세상을 진짜로 바라보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까지의 여정을 엿본다. 이창동 감독은 말한다. "제가 인생이 실제로는 더럽고 추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아름답지만은 않고 종종 누추하다는 거죠.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해도 참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잠시 말했듯, 아름다움이라는 건 상황이 아름답지 않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삶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아름다움을 묻는 것이고 찾는 것이니까요. 시라는 게 꽃이나 달을 보고 술을 마시면서 읊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1]

   세상을 직시한다는 것, 그 속의 누추함과 아픔들을 진짜로 본다는 것. 감히 예상컨대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다수는 세상을 직시한 적이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어머니가 울부짖고 있는 뉴스 화면을 보며 그저 안타까워하지만 사실 그뿐이다. 극적인 사건들을 보도하는 뉴스는 흐르고 넘쳐 어느샌가 타인의 아픔을 전시하는 진열장이 되고, 뉴스를 보는 나는 진열장에 있는 제품을 보듯 그 아픔을 아무 감정 없이 쓱 훑고 지나가 버린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짜로 본다는 것. 그들을 이해하고 싶고,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뒤집어도 보고, 한입 베어 물어도 보고, 스민 햇볕도 상상해 본다는 것. 나는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 '과연 미자의 마음은 어떨까', '희진이의 마음은 어떨까', '희진이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그 마음에 가닿기 위해 아무리 애를 써봐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지금도 모른다. 나는 "이제 위자료 삼천만 원만 넘어가면 모든 게 다 깨끗하게 마무리됩니다. 욱이 할머니 돈까지 됐으니까, 노 프라블럼! 이제 아무 문제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기범이 아버지(안내상)와 더 닮았다.

 

   미자도 영화 초반에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팔레스타인 뉴스를 보고, 사람들과 같이 우두커니 서서 안타까운 마음 한 줌, 호기심 어린 마음 한 줌으로 희진이 어머니의 절망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저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잘하는, 그런 이유로 시를 한 번 써보고 싶은 멋쟁이 할머니일 뿐이었다.


  그러나 미자는 성폭행 가해자의 보호자로서 더 이상 방관자적 위치에 놓일 수 없게 된다. 안타깝게도 요즘같이 시가 죽어가는,  더 이상 시를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시대에서는 성폭행 가해자의 보호자는 여전히 방관자적 위치를 고수하지만 말이다. 식당에 모두 모여 자기 아이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손을 드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던 순창, 기범, 병진, 태열의 아버지들처럼 말이다.


  더 이상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는 이들과 달리 미자는 시를 한 편을 쓰고 싶다. 그럼에도 '일상적 도덕성'을 시험받기 전까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던 미자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욱이(이다윗)를, 강노인(김희라)을, 박상태(김종구)를, 희진이 어머니(박명신)를, 희진이(한수영)를 '진짜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어떤 자리든 항상 늦게 들어가서 도중에 먼저 나오는 미자는 종반부에 이르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회피하려 든다. 미자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병까지도 자신에게 엄습해 오는 삶의 고통을 잊고 싶어 하는 소망이 발현된 것으로 느껴진다. [2]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여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고개를 꺾어 하늘 위로 쭉 뻗은 나무에서,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사과에서 시상을 찾기 시작하던 미자는 어느샌가 고개를 숙이고 땅에 떨어진 살구에서,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검은 강물에서 시상을 찾는다. 습관처럼 회피하면서도 조금씩, 천천히,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 결국에는 온전히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욱이의 평범성에서 가학적인 면모와 몰염치를, 완고하고 인색한 강노인에게서 가련함을, 와이담이나 하던 상태에게서 순수함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마침내 미자는 희진이 되어 <아녜스의 노래>를 써냈다. 미자의 목소리가 어느새 희진이의 목소리로 바뀌어, 희진이 <아녜스의 노래>를 낭송하며 이 영화는 끝난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감정에 북받쳐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울음은 갓난아이의 울음과도 같은 것. 진정한 아름다움의 버거움을 처음으로 느껴본 자의 울음이었다. 신비한 영화적 체험을 하게 해 준 영화 <시>에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1],[2] 시 각본집 발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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