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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
출근길 버스를 타고 있었다.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수업 들어가는 반 아이 두 명이 올라탔다.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었다. 왠지 아는 척하기가 부끄러워, 이어폰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 영어쌤이다 영어쌤 하면서 아이가 인사해줬다. 고요한 출근길 버스에서 나는 양손을 흔들고 활짝 웃으며 속삭이듯 인사하고는 왠지 또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내리면 같이 걸어가게 되려나, 무슨 말을 하지, 아니면 두 명이니까 둘이 알아서 슝 가버리려나, 편의점에 들러서 커피 사야 되는데' 혼자 생각하다가 내렸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도보 6분 정도를 같이 걷게 됐다. "우와 둘이 버스 타고 다니는 거야? 날씨도 추운데 고생 많다, 둘이 가까이 사는구나 같이 오니까 든든하겠다, 아아 원래는 이 버스 안 탔었구나, 아 옛날 마을버스가 차고지에 있구나" 라며 말문이 트였다. 다행히 아이가 훨씬 더 수다쟁이였다. 버스 배차 간격부터 시작해서 등굣길 에피소드와 자신의 분 단위 아침 루틴 등등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아침부터 마스크에 침 튀기며 호탕하게 웃다가 처음과 반대 마음이 되었다. 평소에는 사람들 눈을 피해 교문 뒷길 주차장으로 눈에 안 띄게 출근했었는데, 오늘은 아이 둘과 정문으로 사방에 온통 아는 아이들이 오고가는 틈바구니에서 함께 걸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밝은 아침이었다.
2. 나사 빠짐
2교시였다. 미친 반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 텐션인가 하면, 노래를 들을 땐 콘서트장인 듯 떼창하고, 게임할 땐 목숨 걸고 소리 지르고, 수업하다가도 갑자기 교실 앞으로 나오거나 합심해서 책상을 두드리거나 느닷없이 사마귀 선글라스를 쓰거나 쉬는시간에는 서로 목마를 태워주거나 부둥켜안고 또 광란의 춤사위를 보여주는 등, 반쯤 나사가 풀린 듯한 분위기에 기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반이다. 학기 초에는 통 적응이 안 돼서 분위기도 잡아보고 잔소리도 해보고 릴랙스를 수없이 요청했지만, 요즘 들어 포기했다. 이제는 나도 미쳐서, 같이 웃고 에너지를 끌어올려 주파수를 맞춰가고 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수업자료와 귀에 꽂히는 멘트 위주로, 한 마디를 해도 더 오바해서 말하고, 웬만하면 아이들보다 더 크게 웃고, 할 수 있는 모든 리액션과 칭찬과 열정을 쏟아부어서, 그러다 보면 같이 하이 텐션으로 러너스 하이(learners high)에 이른다. 이렇게까지 수업이 재밌다니, 하는 지경에 이를 때가 종종 있다.
3. 자빠짐
교과서 표현 연습과 메모리 퀴즈와 추측 게임에 이어, 마지막 4corner게임(흡혈귀를 피해 교실 네 개의 모서리를 골라 끝까지 살아남는 게임)을 다하고 5분 정도 남았을까, 아이들은 타이머의 압박과 살아남는 짜릿함에 열광했고 그걸 진행하는 나는 더 신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이제 Who!! is the winner??!!! 이렇게 외치면서 교실 가운데로 가는데 그 순간 옆으로 고꾸라졌다. 발에 커다란 박스를 못 보고 그 위를 깔아뭉갰다.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순식간에 박스를 원상 복귀시켜 주고는 괜찮아요?? 쌤 괜찮아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나는 온몸으로 웃다가 어처구니없는 쌩쇼에 기가 차고 그 와중에 달려와서 수습해준 아이들에게 고마워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이 아이들과, 부끄러움보다 웃김이 더 큰 사이가 되어서 기뻤다. 교과실에 돌아와서야 아픔이 밀려왔지만 여전히 웃김이 더 커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