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8 | 그러나 그것은 도둑고양이 꼬리 그림자
1
로버트는 자신의 지갑을 이슬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그 대신 그동안 이슬을 바라보았던 눈빛과는 다른 다소 슬픈 듯한 느낌.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이슬은 그 눈을 쳐다보기만 하고 지갑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는 손을 내민 채 그대로 있었다. 이슬은 무엇인지 모를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영어교사. 원어민 교사. 잘생기고 인기 많은 교사. 쾌활한 청년. 멋진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듯한 젊은이. 문현희 선생님이 폭 빠진 남자.
그런데 갑자기 그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려는 것이다. 변신. 월요일 아침 새벽안개 낀 산길에서.
이슬은 갑자기 무대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1막에서 2막으로.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내가 왜 그 현장에 있어야 하는 거지?
무엇 때문에?
역사적 증인?
그럼 이제 눈앞에 나타날 생경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이슬은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에서 이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혀 다른 신세계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그러나 가슴 설레며 기대하고 새로운 꿈을 꾸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공습경보가 울리는 도시 한복판으로 내몰리는 듯한 찜찜한 감각.
그렇다고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호기심이 나지도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경험하고 익숙했던 세계에서 갑자기 낯설고 한 번도 의식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미지의 공간으로 떨어지는 듯한, 어딘지 위험까지 동반된 듯한 그러한 생경한 환경.
하지만 로버트는 이슬의 이러한 마음과는 달리 거의 무표정, 무감각, 무의식, 무개념, 무상념, 무지와 같은 그런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2
이슬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강변공원이 넓게 펼쳐진 곳에 잠시 서서 그곳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해가 떠오르자 안개는 거의 걷히고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강변공원은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자전거, 킥보드, 조깅, 반려견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을 달리고 걷고 한다.
이슬도 그들 중 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어쩐지 이제는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이 세상에 대한 신선감, 그런 것이 갑자기 사라지는 듯했다. 강산도, 하늘도, 도로도, 그리고 햇빛마저도. 이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할 수많은 사람들, 일터나 학교나 일상의 어느 곳에서든 서로 부딪고 살아가게 될 모든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삶에 대한 애정의 다른 표현일 텐데, 그리고 그로 인해 세상은 늘 새로운 에너지로 재충전되는 것일 텐데, 그중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이슬 자신만이 그들에게서 이탈되어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신선감으로 다가오던 세상이 갑자기 변신하여 먹구름과 그림자만 가득한 음울한 세상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이슬은 자전거에 다시 올라탔다. 무엇인가 운명적인 것이 저 앞 어딘가에서 기다리는 느낌. 그러면서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문득 핸드폰을 찾았다. 그러나 주머니에 없었다. 여기저기 뒤져봐도 없었다. 아차, 집에 두고 왔구나.
아이 참, 왜 지금껏 핸드폰 생각을 못 하고 있었을까?
그러다가 다른 생각도 들었다. 핸드폰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더 편하지 뭐. 그런 거 없을 때도 사람들은 잘만 살았잖아. 그래, 그래…….
이슬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3
석 경위는 이슬의 아파트 근처에 차를 세운 뒤 단지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마치 범인의 단서라도 찾듯이. 그렇지만 범인은 석 경위 자신이지 않은가. 어처구니없는 이 현실.
아무튼 이슬과는 어떻게 해서든지 연결이 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 놓지 않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왜 이슬은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 카톡도 보지 않고, 이메일도 열지 않고.
그것이야 어떻든 그 선물상자 또는 사파이어만은 돌려받아야 한다. 잘 안 되면 협박이라고 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변명과 해명은 나중 일이다.
석 경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현희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이슬의 집이 몇 호인지 알아내고 직접 찾아가서 경찰 신분증을 제시한 다음 강제로라도 이슬의 방으로 쳐들어가려고.
핸드폰을 꺼내어 발신기록을 찾아 현희의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현희.
석 경위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오빠, 내가 채 선생님에게 전화해 봤는데 안 받아. 카톡을 보냈어도 답이 없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오빠는 왜 채 선생님을 찾는 건데?”
“응, 그게 말야…….” 석 경위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뭣 좀 물어보려고. 별거 아냐. 확인할 게 있어서.”
“나한테 말해 봐. 채 선생님에 대해서는 내가 대부분은 다 알아. 뭔데 그래?”
“응, 그게……, 좋아하는 색깔이 뭔지 몰라서…….”
“오빠…….”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 “…… 아주 푹 빠졌구나. 채 선생님 복 터졌네. 음……, 아마 파란색을 좋아할걸. 겉보기에는 핑크나 빨간색 좋아할 것 같은데, 보석 같은 거 고를 때 보면 사파이어 종류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왜? 보석 사주려고? 그럼 사파이어야, 알았지? 코끼리 사파이어라면 더 좋을 텐데. 오빠, 그날 그거 좀 슬쩍 바꿔치기하지 그랬어? 가장 가까이에 있었잖아. 오빠도 참 바보야.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음, 혹시 정말 그날 그렇게 한 건 아니지? 그랬으면 멋졌을 텐데. 아까워라…….”
“그런 얘기는 됐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석 경위는 희미하게나마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것까지 무너지자 한숨만 나왔다. 억지인 것을 알면서도 이슬에게 푸른색 사파이어 대신 예를 들어 루비라든가 에메랄드라든가 하는 것으로 바꿔주겠다고 하고서 돌려받을 수는 없을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조잡하긴 하지만 상황이 급하니 별 생각이 다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더욱 꼬여가는 듯하게 보이자 석 경위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최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와 있다. 더 나빠진들 이보다 더 나쁘랴.
심장은 여전히 차갑게 식는 느낌이지만 머릿속으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사가 은근히 파고든다.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든 결과로서. 제 무덤 저 스스로 팠다는 속담처럼. 이제 최악의 경우 눈 딱 감고 한 생명 끝나면 그뿐이다. 사회적 비난이나 조롱이야 사후에 아무리 많이 받은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랴. 다만 자신으로 인해 주변인물들이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만이 죄스럽지만 그것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차피 운명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석 경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체념하듯이.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그리고 숨을 크게 천천히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자전거 한 대가 보였다. 정면에서. 천천히 석 경위 쪽으로 다가오는 자전거. 그리고 이슬.
석 경위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책 제목 하나가 뜬금없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철학의 뒤안길(Die Philosophische Hintertreppe)》. 빌헬름 바이셰델(Wilhelm Weischedel, 1905~75)의 저서. 베를린 자유대학(Freie Universität Berlin) 철학 교수. 에마누엘 칸트의 역사비평으로도 유명하고 개신교 신학과 철학과 역사학이 전공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칸트 철학을 재해석해서 철학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다가가기 쉽게 해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고로, 베를린 자유대학은 냉전이 시작될 때 소련에 의한 통제가 심해지자 베를린의 훔볼트(Humboldt) 대학에서 1948년에 서베를린 지역에 세운 학교를 말한다. 이 대학은 미국의 지원으로 세워졌는데, 훗날 반미운동이 가장 거센 대학이 되는 아이러니가 되기도 했다.
지금 석 경위의 머릿속에 그 책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샌더스가 형이상학에 대해 물었던 것에서부터 이번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인 듯했다. 샌더스의 암호를 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뒤지던 도중에 우연히 바이셰델에 알게 되어 그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평소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칸트 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약간 눈이 떠지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성(理性)과 오성(悟性) 그리고 감성(感性). 이 셋은 석 경위 생각에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이 육신과 마음과 정신이 하나이듯이 그 셋 모두 동일체이고,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그 셋 중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둘도 무너진다. 지금의 석 경위처럼. (어느 학자는 이성과 오성은 번역상의 오류일 뿐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 엄중한 시점에 무슨 칸트냐고? 지금 이 상황에서 철학할 시간이 있는 거냐고? 아직도 현실을 망각한 채 사색의 사치를 누리고 싶다는 건가? 미련한 놈.
어떻든 석 경위는 이슬을 바라보는 순간 이성과 오성은 사라지고 감성만 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석 경위가 칸트를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철학적 사색으로 현재 시점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울컥하는 감상이 온몸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슬을 보는 순간 석 경위는 다소 맥이 빠지고 만 것이다. 갑자기 지금까지 허둥대고 마음 졸이고 하던 모든 게 헛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
이슬이 석 경위 앞으로 다가와서 자전거를 멈춘다. 무척 놀란 얼굴.
“경위님!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이 새벽에?”
“아, 저…….”
“무슨 일 있으세요?”
석 경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부터 하지……?
“새벽 운동 다녀오는 모양입니다.”
“네. 그런데 언제 오셨어요, 여기에? 전화를 하시지요.”
“저……, 전화했는데…….”
“아, 참. 제가 깜빡하고 핸드폰 안 가지고 나갔어요. 죄송해요.”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석 경위.
“아, 저……. 사실은 어제 제가 드린 선…….”
“어머, 그거 아직 안 풀어봤는데. 죄송해요.”
오잉? 석 경위의 눈이 커졌다.
“실은 그게 뒤바뀌어서요. 다른 분 갖다드릴 것하고. 지금 가지고 올 수 있나요? 시간이 급해서.”
“그럼요. 잘됐네요. 풀어보지 않기를. 어제 너무 피곤해서 가방에 넣어두고는 곧바로 침대에 가서 곯아떨어졌어요. 죄송해요.”
이슬의 얼굴이 밝아진다. 조금 전에는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당황해하던 표정이었는데.
“제가 지금 좀 급해서요…….”
“아, 네……. 얼른 올라갔다 올게요. 여기에서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이슬은 얼른 몸을 돌리며 말한다.
“여기에 있겠습니다.”
이슬은 대답도 채 다 듣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아파트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석 경위는 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상품 안내 이메일에 답신을 할 문구를 생각해 보았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반품이 가능한지’에 대한 문의 이메일을 보내면 된다. 그러면 반품 방법에 알려줄 것이다. 그런 뒤 반품을 받고 확인할 때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테지. 그리고 샌더스는 물건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을 알았으니 아직 출국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 경위가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려고.
어떻든 이제 이슬이 내려오기만 하면 된다. 그 대신 이슬에게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해주어야겠다. 석 경위뿐 아니라 여러 생명을 구한 보답으로.
그런데 왜 이렇게 더디지……? 빨리 내려오지 않고.
함께 올라갈 걸 그랬나……?
시간이 너무 더디 간다. 자꾸만 초조해진다. 혹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집 안에 둔 것일 테니 뭔 잘못이 있을까, 그냥 가지고 내려오면 되지.
석 경위의 심장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러나 핸드폰이 눈에 보이자 저절로 이슬의 번호를 찾게 된다.
누를까……?
조금 더 참아 볼까?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석 경위에게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 드디어 이슬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빈손이었다.
또다시 석 경위의 가슴은 철렁.
“어떡해요? 동생이 가지고 나갔대요. 그 애 가방이 제 것하고 색깔이나 모양이 똑같아서 착각하고 가지고 갔대요, 글쎄. 그 애도 제가 전화해서 알았대요. 지금 전철 안이라는데, 너무 복잡해서 움직일 수도 없대요. 그래서 다음 역에서 내려 전화하겠대요. 어떡하죠? 동생한테 갈까요? 출근시간대라서 길이 많이 막힐 텐데.”
“동생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죠. 회사가 어딥니까? ”
“인사동 쪽이에요.”
“알았습니다. 그냥 인사동으로 가라고 하고, 제가 간다고 전화해 주세요. 동생 전화번호하고 회사 이름 카톡으로 보내주십시오.”
석 경위는 얼른 돌아서서 차 세워놓은 곳으로 뛰어갔다. 그럼 그렇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한번 꼬이면 계속 그렇게 되는 거야. 원래 실수한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되어 있어. 특히 악당에게는. 하지만 그 동생에게 가기만 하면 모두 해결된다. 설마 동생이 지금 곧바로 외국으로 날아가진 않을 테니까.
허겁지겁 주차장으로 달려간 석 경위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비상등을 차 지붕에 올려놓고 엔진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출발했다.
이제야 별일 없겠지.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말자. 급할수록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호흡하면서.
길은 많이 막혔다. 다행히 차들이 조금씩 비켜주어서 예상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많이 단축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잠시 뒤면 도착할 테니. 아무리 늦는다 해도 출근시간 전에는 갈 수 있을 것이다.
석 경위가 곡예 부리듯 이리저리 차들 사이로 달려가는데 전화가 왔다. 이슬이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 차 안에 이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경위님, 큰일 났어요! 동생이 날치기 당했대요. 가방을 통째로.”
동생이 전철 문가에 서 있는데, 한 정거장에서 문이 닫히기 바로 직전에 어떤 인간이 가방을 낚아채고 내렸다는 것이다. 동생과 사람들이 소리치는 가운데 날치기는 승강장에 빽빽이 몰려 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핸드폰은 따로 주머니에 넣고 있어서 도둑맞지 않아 이슬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빗나감 삼총사. 첫 번째는 상자가 바뀐 것. 두 번째는 동생이 가방을 바뀌어 가지고 나간 것. 세 번째는 날치기. 이 셋이 하필 한 줄로 늘어서서 일어났다. 모두 우연의 일치인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일단 경찰에 신고하라고 해야 하나? 아차, 지금 경찰에 신고한 거다. 석 경위 자신이 경찰이니까.
그런 중에도 석 경위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구절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 여러 가지로 마음이 답답하여 한인교회에 한번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 설교의 성경구절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4:16)
4
석 경위는 지하철과 서울시 경찰청 CCTV 통합관제센터를 통해 날치기 범인의 동선과 얼굴을 파악하고 경찰 전체에 경보를 보냈다고 이슬과 여동생에게 알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아예 경찰청에는 연락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해당 역 상황실에 가서 CCTV만 확인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30~40대 남자인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나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확인했다 한들 석 경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혹 범인을 잡는다 해도 사파이어를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사파이어가 등장하는 순간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석 경위는 차라리 여기에서 끝내고 자기 자신의 문제나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그 사파이어는 지하세계로 들어가서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언젠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세상에서는 석 경위와 연결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소문은 무성하게 돌겠지. 그렇게 되면 적어도 석 경위는 무죄한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석 경위 자신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처참한 꼴을 당하긴 하겠지만.
“끝났어…….”
석 경위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체념한 상태로 석 경위는 이슬에게 전화했다.
“범인은 확인했지만,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서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수사는 계속하긴 하겠지만…….”
“저는 괜찮아요. 그 가방에는 중요한 것이 거의 없어요. 그 상자 외에는.”
이슬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지갑은 주머니에 넣었고 가방에는 책 한 권과 잡다한 것들밖에 없다고 한다.
“어떡해요? 그 선물 중요한 거예요? 혹 비싼…….”
“아니, 그렇진 않아요. 채 선생님만 괜찮다면 저도 별로…….”
이슬과의 문제는 여기서 접기로 했다. 더 이상 일을 벌여봐야 현재로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이제부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 신변을 최대한 감시해 주어야 할 일만 남았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어차피 석 경위는 살아남지 못한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해자가 자기 자신 하나로 국한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알 수 없다.
저들에게 사정해 볼까……?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다른 쪽으로 생각이 옮겨간다. 일단 샌더스에게 연락해 보자. 물건이 바뀌었다는 것을 솔직히 알리고, 그 대가는 자신이 치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 시간을 가지고 날치기 범인을 뒤쫓을 수도 있다.
좋아. 한번 시도해 보자. 마지막 수단으로.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