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9 | 눈 오는 날 따박따박 발자국
1
민지는 또다시 경찰에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익명으로. 그리고 내용은 로봇 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보석도둑과 관련된 것으로. 채이슬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무슨 일이든 해줄 줄 알았는데 전혀 반응이 없자 직접 편지를 한 것이다. 민지는 채 선생님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민지는 지난번에 자신이 보낸 편지 때문에 보석강도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즉, 그 현장에 로봇과 교장이 나타난 사실. 그것도 숨듯이. 그런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봇의 새빨간색 오토바이도. 그러고 나서 잠시 뒤 보석경매 때 정전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뉴스에서 보석강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러나 민지는 늘 무엇인가가 찜찜했다. 로봇과 교장이 한 대화, 교장이 쉿 한 것, 게다가 보석경매장 밖에서 숨듯이 몸을 감추고 있었던 두 사람. 세상 모든 사람은 이 세 가지 사실을 모른다. 혹 한두 가지는 알지도 모르지만 그 셋을 다 아는 사람은 민지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모두 적어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답답한 것은 있었다. 답장을 받을 수 없으니 그 일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혹 민지의 편지로 인해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면 그때는 민지가 자신이 그 편지를 보낸 사실을 공개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민지는 이러한 생각을 하며 혼자만의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2
석 경위는 신상품 안내 50% 할인 이메일에 답신을 했다. 반품이 가능하느냐고. 그런 다음 경찰청으로 다시 향했다.
“어? 왜 다시 왔어? 몸이 아픈 거 아니었어?”
“아는 사람이 날치기를 당했다고 해서 조사 좀 해보려고.”
석 경위는 이렇게 말하고 이슬의 여동생 사건을 정식으로 등록시켰다. 그리고 CCTV 통합관제센터로 가서 당산역 부근을 샅샅이 살폈다.
3
이슬은 혼란스러웠다. 새벽에 운동하러 나갔다가 로버트를 만나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지를 않나, 집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석 경위를 만나지를 않나……. 게다가 동생까지 날치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련의 뜻밖의 일들, 어떤 뜻일까?
로버트 강, 석진우, 동생…….
이슬의 동생 이름은 보석이다. 채보석. 어려서부터 똑 떨어진 아이. 그런 아이가 오늘 날치기를 당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 그런데 그것이 독일까, 약일까……?
하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슬은 혼란스러웠다. 석 경위가 잘못 준 선물. 왜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까? 그 안에 무엇이 든 것이지? 석 경위는 싸구려 스카프라고 했는데, 포장지는 유명한 백화점 것이다. 상자 크기로 보아 그 선물도 스카프일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이슬 말고 또 누구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한 것일까? 혹 이중플레이? 누구지, 그 대상이? 이슬은 살짝 궁금증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정체 모를 배신감도.
이것은 질투……?
어젯밤에 그 선물을 풀어볼걸. 야릇한 감정을 오래 누려 보려다가 오히려 일이 꼬이고 말았다. 이슬은 집이 작아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동생이 혹 그 선물을 보고 뭐냐고 할까 봐 자기 가방 깊숙이에 쑥 밀어넣었던 것이다. 괜히 동생에게 말거리를 만들어 주지 않게 하려고. 그러나 사실 지금 그 선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생이 이슬의 소지품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해할까. 아무리 소소한 물건이라도 다 이유도 있고 목적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동생이 자기 지갑은 주머니에 넣어서 카드라든지 하는 것들은 온전하다고 하지만, 날치기 자체가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냐 말이다. 동생에게 몇 번 전화해서 위로해 주었지만 동생의 충격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자기가 하필 언니 가방을 잘못 메고 나간 날 날치기당한 데다가 그 안에 잘못 전달된 선물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까지 겹쳐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 어떻게 하지? 우선 석 경위에게 사과부터 해야겠지? 선물을 잃어버렸으니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사라졌다. 날치기범이 잡힌다 해도 이미 그 선물은 없어져 버렸을 테니. 어차피 이슬이 받을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일이 꽤 미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선물이라는 것이 평범한 게 아닌 듯한 느낌이다. 아파트 앞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그 뒤에 있었던 일에서 석 경위의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 등이 꽤 절박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냥 단순한 스카프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잃어버렸으면 다시 사면 될 일인데, 새벽같이 핸드폰으로 전화도 하고 메시지도 남기고 급기야는 이슬의 아파트로 달려와서 기다렸다. 음성 메시지에도 어딘지 급박한 억양이 묻어나 있었다. 평소에는 거의 서두르거나 초조해하지 않던 사람이다. 항상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성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떻게 나올까? 동생이 날치기당한 가방을 끝까지 찾아나설까? 물론 그것을 찾는다 해도 그 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하긴 그래도 경찰의 임무는 날치기범을 끝까지 찾아서 잡아야 하는 것일 테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서? 이슬? 아니면 그 선물? 또는 그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
아, 정말 그 사람이 누굴까? 지금까지는 석 경위가 이슬 자신에게 열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새벽같이 이슬에게 찾아와서 그 선물을 돌려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면? 웬만한 경우라면 선물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새로 사서 주면 그만이다. 아무리 비싼 것이라 해도 기껏 스카프 아닌가? 그런데 만일 그 상자에 스카프가 아니라 다른 것, 아주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었다면? 마치 그 어떤 보석처럼…….
보석?
이슬은 번쩍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 구름 한 점 없다. 새벽안개가 짙으면 날이 맑아진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은 파랗다. 너무너무.
《속삭이는 사람들(The Soft Talkers)》. 마거릿 밀러(Margaret Ellis Millar, 1915~94)의 장편 추리소설. 마거릿 밀러는 캐나다 태생이면서도 미국추리소설협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녀의 대표작에 속하는 이 소설에서는 하늘이 너무 파란 것을 보고 부부가 함께 차를 몰고 절벽으로 달려나간다. 물론 이 부부가 동반자살을 할 이유는 따로 있다. 더 이상 출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절벽으로 차를 모는 그 순간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늘이 너무 파랗기 때문이었다. 파란 하늘을 보고 죽기에 알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이 그 하늘일까? 하지만 이슬은 현재 자살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찜찜한 것들은 있었지만. 그런데도 하늘이 파란 것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의미심장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캐나다 추리소설가 마거릿 밀러. 이슬은 캐나다에 몇 번 갔었다. 그곳에서 마거릿 밀러라는 소설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왜 하필 이 순간 마거릿 밀러가 생각난 것일까? 그리고 캐나다…….
의미심장……?
로버트 강. 그 사람이 캐다나에서 왔기 때문일까?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지? 오늘 새벽 짙은 안개 낀 길에서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의미심장(意味深長). 그 뜻이 깊고 길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는 생각지 못한 것. 오늘 새벽에 자전거 길에서 로버트를 만났지만, 사실은 그전에도 두어 번인가 이슬의 주변에서 로버트를 본 듯한 느낌이 얼핏 들었었다. 그리고 그 오토바이도. 착각이었나? 게다가 로버트가 최근에 이슬의 아파트 근처로 이사 왔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우리 집이 어디인지 어떻게 알았지? 혹 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 아닌 것 같은데……. 문현희 선생님이 얘기해 주었나……? 문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확인해 볼까?
이슬은 갑자기 등에서 한기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상해. 모든 것이 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인위적……? 누가? 왜? 무엇을 위해?
4
석 경위는 경찰본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경무관실에서 온 전화였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지금 다시 출근했습니다.”
“어, 그래? 실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자네 지난번 코끼리 보석경매 때 현장에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자네한테 반한 사람이 있어.”
“…….”
“내 말 듣고 있나?”
“네, 듣고 있습니다.”
“자네가 한 번 더 경비를 서줘야 할 데가 생겼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한 사업가가 개인적으로 파티를 여는데 그곳에 각종 보석이 등장하는 모양이야. 개인 소장품이긴 한데, 그 규모가 상당한 것 같아. 국보급도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엄청난 알부자들이 자기들 보석을 가지고 와서 공개하고 품평회도 갖는 모양일세. 자기들이 고용한 사람들도 있지만, 특별히 자네가 와서 경비를 맡아달라고 하는 거야. 자넨 지난번 코끼리 보석 때문에 유명해졌어. 그 사람들은 저택 외부에서 경비만 선다고 하는데, 어때, 가보겠나? 하지만 이것은 공적인 일은 아니야. 오늘 저녁 퇴근 후에 가는 것이니까 전적으로 사적일 일일세. 공식적으로는 사례비도 없는 거고. 그저 자네 개인적인 일일 뿐이란 말이야. 알겠나? 금전거래는 없는 거야. 그거 어기면 자네 앞길 다 망치는 거야. 내 말 알겠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령에 가깝다.
“알겠습니다.”
“주소하고 시간,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카톡으로 보낼 테니 실수 없이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겠는데, 이건 순전히 자네 개인적인 일이니까 괜히 남들에게 발설해서 조직에 누를 끼치지 마.”
석 경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대답은 해두었다.
그 뒤 CCTV를 통해 날치기범을 추적하는 일에 매달렸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낀 채 서둘러 역을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 뒤 상가 건물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져 더 이상은 추적할 수가 없었다. 놈은 CCTV를 피해 도주하는 방법을 아주 잘 익힌 녀석 같았다. 별로 서두르지도 않고 CCTV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교묘하게 사라진 것이다. CCTV에 잡힌 모습을 용의자 검색 엔진을 통해 대조해 보았지만 일치하는 인물이 없었다. 또한 놈은 역을 나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화장실로 달려가 가방을 찾긴 했지만, 스카프 상자만 빼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애당초 중요한 물건은 없었다고 하니 날치기범으로서는 헛수고만 한 셈이다. 값 나가는 것이라곤 기껏 스카프 선물상자 하나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그 선물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줄 알게 된다면…….
아무튼 석 경위는 날치기범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슬에게 알려주었다.
“가방을 찾아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그 선물상자가 없어져서.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고생만 하셔서.”
“괜찮습니다. 가방은 오늘 중으로 제가 아파트로 갖다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뒤에 이슬의 동생 보석이 전화를 걸어와서 죄송하다, 감사하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일은 더욱 꼬이고 말았다. 코끼리 보석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알고 있을 내용인데, 이제는 날치기범 손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가늠도 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 와서는 날치기범이 잡혀도 문제가 된다. 사파이어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사파이어가 지하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 것이 석 경위에게는 유리하다. 샌더스에게 보복당하는 것은 다른 문제로 치고.
석 경위는 오후 내내 침울한 상태로 보냈다. 처음에는 날치기범을 혼자서 비밀리에 추적하려 했으나,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경찰 전체에 CCTV 캡처 사진을 돌리면서 신원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일단 날치기범은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범죄자를 소탕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이니까.
그러나 저녁때가 다 되도록 날치기범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 궁금한 것, 즉 반품 문의에 대한 답신도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 무엇으로 표현하랴. 물론 마음 한 편에서는 인과응보라는 말이 계속 떠오르기는 했지만 어딘지 너무 빨리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 같아서 억울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5
석 경위는 카톡으로 보내준 주소를 보고 차를 몰았다. 경기도 용인을 지나 야트막한 산 아래를 돌아서 제법 숲이 무성한 언덕을 올라갔다. 그러자 조그만 계곡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조금 달리자 갑자기 탁 트인 개활지가 보였다. 그리고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는 도로. 그 길은 넓지 않았지만 길 양쪽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어쩐지 마치 외국영화에서 나오는 듯한 고풍스러운 저택으로 가는 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도로를 따라서 비스듬히 남쪽으로 돌아들자 바로 앞에 커다란 한옥 저택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바로 그곳이 목적지였다.
석 경위는 다소 뜻밖의 느낌이 들었다. 영국인이 산다고 해서 현대식 고급별장과 같은 저택으로만 생각했는데 예상에서 빗나갔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 저택 바로 전에 널따란 공터가 있었고, 그곳에 벌써 20여 대의 고급승용차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립 경비원인 듯한 사람 둘이 서 있다가 석 경위의 차를 보고 주차할 곳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는 서양인이었다.
석 경위가 차를 세우고 나오자 경비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묻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석진우입니다.”
“아, 경찰에서 오신 분이군요.”
경비원이 석 경위를 안내해서 한옥의 대문으로 이끈다. 대문 위에는 ‘東英齋(동영재)’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그 집 주인이 영국인이라고 한 것이 떠오르자 동쪽의 영국이라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 경위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한옥 기와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특히 치미(鴟尾) 아래쪽 추녀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잡상(雜像)들의 형상이 독특했다. 치미는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 높이 솟듯이 장식한 기와를 말한다. 취두(鷲頭), 취와(鷲瓦), 치문(鴟吻), 망와(望瓦), 망새, 바래기와 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취(鷲)는 (독)수리, 치(鴟)는 솔개나 올빼미를 나타내며 문(吻)은 입술, 곧 입구를 의미한다. 이는 길상(吉祥)과 벽사(辟邪), 즉 상서로운 것은 맞아들이고 악귀는 물리치기 위해 봉황을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 때는 누미(樓尾)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치미나 치문 외에도 반우(反羽)라 불리기도 한 모양이다. 중국 당나라 후반기 때부터는 화재를 막기 위해 물을 내뿜는 어룡(魚龍) 형태로도 만들어지면서 점차 용의 머리 등으로 발전하여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때까지는 새나 물고기 꼬리와 같은 모양의 기와를 사용했는데 바로 이것을 치미(鴟尾)라고 하며, 조선시대에 접어들고서는 치미 대신 용머리 형상인 취두(鷲頭)로 바뀌기 시작한 모양이다.
석 경위가 추녀마루의 잡상을 주목한 것은 그 모양이 아주 독특했기 때문이다. 동영재의 잡상은 한국의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었다. 잡상에는 네 동물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제일 앞에서부터 각각 백조, 곰, 사자, 불도그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영국인들이 무척 아끼는 동물이다. 백조의 수컷은 콥(cob), 암컷은 펜(pen), 새끼는 시그닛(sygnet)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영국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1세인 리처드(Richard, 1165~1212)를 사자왕이라고 하는 데서 사자는 영국의 상징 동물로 여기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살지도 않는 사자를. 그리고 또한 곰은 영국인들이 친근히 여기는 동물이며, 투견인 불도그 역시 호전적인 바이킹의 기질에 잘 어울리는 개여서 많은 영국인이 좋아한다. 특히 윈스턴 처칠 경의 별명을 불도그로 지어주며 애정을 표현할 정도였다. 즉 이렇게 영국적인 동물 네 마리의 형상을 치미로 만들어 용마루에 장식한 것이다. 어찌 보면 전통 한옥에 약간의 무례함을 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영국인이면 이해가 될 법도 하다. 하지만 어딘지 괘씸한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인이 영국에 가서 영국 전통가옥(?)을 지을 때 지붕에 한국적인 형상들을 장식했다면 그것이 무례함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약간은 양해가 되는 면도 있었다.
어떻든 국제화 시대에 개성대로 사는 멋을 부린 것 같은데,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는 게 상책인 것 같아 무심한 얼굴로 안내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자 잘 꾸며진 정원이 나오고 곧바로 중문이 나타났다. 대갓집 저택을 본뜬 모양이다. 그리고 중문을 지나니 행랑채와 비슷한 별채가 여럿 줄지어 있었고 그 옆을 돌아들자 정면에 우람한 본채가 나왔는데, 정통 한옥의 구조를 따른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지어진 듯한 인상을 받았다, 즉, 서양인에 취향에 맞추어 그 안에서 예를 들면 무도회나 파티 또는 연주회 등을 열 수 있도록 꾸몄으되 외형만 한옥의 형태를 갖춘 듯했던 것이다.
석 경위는 본채 안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거기까지 가는 도중에 드문드문이지만 경비원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옥 안은 겉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완전히 현대식 저택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모든 장식도 영국풍이어서 마치 규모가 작은 박물관과 같은 형태였다. 천장이 아주 높고 여러 개의 방에 여러 형태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회화, 조각, 판화, 설치미술 등등. 그러한 방 셋을 지나자 드디어 목적한 방인 듯 아주 널찍한 홀이 나왔다. 아래로 향하는 다섯 계단 밑에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마다 네 명이 식사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모두 강렬한 레드 계열로. 마치 붉은 장미가 화려하게 피어 있는 듯이.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 장식된 꽃 중에서 장미는 한 송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 홀에는 여러 사람이 군데군데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복장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 평상복이었다. 심지어 청바지를 입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석 경위는 다소 멋쩍은 느낌이었다.
석 경위가 분위기를 살피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사람이 손에 붉은 포도주 잔을 든 채 다가온다. 이 저택 주인이며 석 경위를 초대한 인물 같았다.
그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한 손을 내밀면서.
“어서 오십시오, 경위님.”
유창한 한국어. 억양이나 발음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약간의 긴장과 기대감을 가지고 홀에 내려간 석 경위는 다소 맥이 빠졌다.
석 경위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내미는데 저쪽에서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평상복 차림에 역시 한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서양인.
너무도 눈에 익숙한 사람.
로웰 샌더스.
6
“반품하고 싶으시다고?”
샌더스는 석 경위를 홀 한쪽에 세워져 있는 비너스 조각상 앞으로 데리고 가면서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나?”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분실했습니다.”
샌더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자세히 말해 봐.”
“제가 선물을 두 개 샀는데, 바꿔서 전달해 드리고 말았습니다.”
석 경위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마치 경찰 조서 쓰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사실만 나열한 것이다.
샌더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석 경위를 쳐다보기만 했다.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석 경위도 샌더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사실 석 경위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찾을 순 있나?”
불가능하다.
어떻게 할 건가?
샌더스가 말은 없이 눈으로만 묻는다.
나 하나로 끝내 달라.
석 경위 역시 눈으로 답했다. 이미 포기한 상태니까.
샌더스는 눈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걸어서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다.
석 경위는 샌더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Inspector…….”
석 경위가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되는 듯한 우아한 모습의 키 큰 서양인 중년 여인이 어깨 끈달이 흰 드레스 차림으로 서 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Please, would you follow me……?”
영국식 악센트.
석 경위는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 반대편 계단으로 가서 성큼성큼 올라간다.
석 경위는 홀 내부를 한번 쓰윽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여자를 따라갔다. 머릿속은 마치 하얗게 변한 듯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고 또한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석 경위는 약간은 몽롱한 상태에서 발이 저절로 움직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앞에서 걸어가는 여자의 금발이 어딘지 어지럽게 눈에 들어온다. 한옥 나무 복도에는 여자와 석 경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에는 꼭꼭 닫혀 있는 한옥 창들.
여자가 드디어 한 방 앞으로 가서 서서는 뒤를 돌아다본다. 그리고 석 경위를 바라보며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석 경위가 들어간 방에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한가운데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자 조금 앞에 나무로 된 높은 받침대 위에 하얀색 물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흰색 코끼리. 보석경매에 나왔었던 바로 그 코끼리. 그러나 이마에는 움푹 팬 자국만 있을 뿐 보석은 없었다. 보석 없는 태국 왕실 코끼리. 물론 모조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마에 박혀 있어야 할 사파이어가 사라진 코끼리 그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파이어 코끼리에서 사라진 보석.
석 경위가 뒤를 돌아다보자 문은 닫힌 채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문만 열어주고 들어오지는 않은 것이다.
이제 드디어 식이 거행되는 모양이다. 피날레.
의자는 석 경위에게 앉으라는 것이겠지.
그래, 다음은 생각하지 말자. 순서에 따라가 보면 결말이 나타나겠지.
사방은 모두 한옥 창살문으로 되어 있다. 벽은 하나도 없다. 그중 어느 곳이라도 열면 복도로 연결되는 것 같다. 현판이나 액자나 그림은 하나도 없다. 무미건조한 방. 그러나 의자는 화려했다. 마치 전통 영국식 왕좌와 같은 문양의 커다란 나무 의자.
석 경위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의자의 방향이 동서남북 어느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석 경위가 처음 대문을 통해 들어와서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온 길을 대강 짐작해 보건대 남쪽 방향 같은 느낌이다. 그거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지만. 하긴 묏자리도 양지바른 쪽이 좋다고 했듯이 기왕이면 마지막 떠나는 길 따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고통도 없이. 희망사항이지만.
석 경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7
방 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81)의 ‘죽음의 노래와 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남쪽으로 400km 떨어진 카레보(Karevo)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 시대를 풍미한 무소르그스키는 이 곡에서 각기 다른 네 가지 죽음을 표현했다.
제1악장 자장가(Lullaby). 병으로 누워 있는 아들에게 다가오는 죽음과, 그를 물리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쓰는 어머니의 사투를 그린 노래. 한마디로 ‘죽음의 자장가’와 같은 곡이다.
제2악장 세레나데(Serenade). 아름다운 봄날의 밤, 가슴병으로 앓아누운 소녀에게 다가온 죽음의 신이 달콤하게 유혹하는 음산한 곡.
제3악장 트레팍(Trepak). 눈보라가 몰아치는 황야에서 술에 취한 늙은 농부와 죽음의 신이 함께 춤을 추는 곡. 트레팍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내려오는 춤곡의 일종을 말한다.
제4악장 야전사령관(The Field-Marshal). 4/4박자 군악대풍 음악으로서, 치열한 전투로 인해 죽은 병사들이 널려 있는 황량한 벌판, 오직 부상당한 병사들의 신음만 들려오는 가운데 죽음의 신이 배회하며 부르는 섬뜩한 노래.
석 경위는 미국 유학 때 한 부호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아들이 석 경위가 공부하는 대학에 다니다 자살을 했다는데, 그 부호는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하던 중 캠퍼스의 한 벤치에서 석 경위와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그 부호는 석 경위의 인상이 자신의 죽은 아들과 비슷하다며, 연주회 티켓을 주면서 자신과 함께 가보자고 했다. 석 경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면서도 그 티켓을 받고 말았다. 그런 뒤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들었던 곡 중에 바로 무소르그스키의 ‘죽음의 노래와 춤’이 들어 있었다. 그날 석 경위는 그 곡을 듣고 처음에는 음울하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인터넷으로 그 곡을 찾아서 여러 번 듣다가 묘한 마력에 빠져들었다.
그 뒤 그 부호에게서 또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집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가족이 없이 혼자 사는 넓은 저택에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차를 보내겠다고 한다. 석 경위는 약간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호기심에 이끌려 그 저택으로 갔다.
전형적인 미국 동네를 벗어나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한참 들어가자 영화에서처럼 고풍스러운 성, 즉 저택이 나타났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남북전쟁 직전에 지어진 집이었는데 몇 대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자손들이 많이 자살하는 바람에 그 주변에서는 소문이 좋지 않게 나 있었다고 한다.
음울하게 서 있는 저택, 벽면은 온통 담쟁이와 이끼로 뒤덮여 있어서 지어진 지 천 년도 넘게 느껴지는 고저택의 쇠창살 정문을 지나자 늙은 집사가 맞아주었다. 집사는 차 문을 열어주며 주인이 몹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평소에 앓던 천식이 갑자기 심해져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도 의사는 부르지 말라고 했단다.
석 경위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가정부로 보이는 늙은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여자는 석 경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집사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집사는 석 경위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널따란 이층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그 뒤로 가정부가 아주 느릿느릿 따라갔다.
넓은 홀에 혼자 남은 석 경위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리도 아프고 너무 지루해서 홀 안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마치 중세의 고성 내부와도 같이 칙칙한 색의 가구와 그림들. 그런 중에 두꺼운 유리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는 투구와 목걸이, 검 등이 눈에 띄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골동품에 대한 상식도 안목도 없었던 석 경위의 눈에는 단지 오래된 고물과 같은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가 흐른 뒤 이층에서 집사가 내려왔다. 석 경위는 홀 한쪽 구석에 가 있어서 집사가 내려온 것도 알지 못했다. 도둑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집사가 부르는 소리에 석 경위는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주인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연극 대사처럼 또박또박 내뱉는 말.
그러나 석 경위는 그 말뜻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고 멀거니 집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집사는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 이후 그날 저녁때까지 석 경위는 그 저택에 홀로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경찰과 의사가 오고, 뒤이어 변호사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도 아무도 석 경위에게는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석 경위는 그 홀의 낡은 가구나 골동품처럼 무생물과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이 되자 현관문이 열리며 한 노신사가 나타났는데, 그가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석 경위에게 다가왔다. 집사가 부고를 알리고 간 뒤 몇 시간 만에 처음으로 석 경위에게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가 명함을 꺼내어 석 경위에게 주었다.
석 경위는 몽롱한 느낌으로 명함을 받아서 보았다.
Lowell Sanders
그 이름 아래에는 전화번호만 적혀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직업도 주소도 직위도.
“나는 고인의 사촌 되는 사람입니다. 제 사촌형님이 선생을 아주 아끼셨던 모양입니다.”
석 경위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고인이 초청한 마지막 손님이라서 몇 가지 증언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그 뒤 경찰과 변호사가 석 경위에게 와서 몇 가지 간단한 것을 묻고는 돌아갔다. 석 경위의 이름과 직업, 주소, 전화. 그리고 고인을 언제부터 알았는지, 이 저택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등.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형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콜라나 음료수 캔을 파는 자판기에 와서 동전을 넣고 누르는 듯한 느낌. 그리고는 원하는 캔이 나오면 그것을 들고 가버리는 것.
그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 샌더스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운전기사를 데리고 왔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한 번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샌더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눈을 반짝거리며.
“명함 있습니까?”
그제야 석 경위는 자신이 상대방 명함만 받고 자신의 명함은 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열흘 정도 뒤에 샌더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노인의 저택에 한 번만 더 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탁이 아니라 어딘지 당위성이 있는 듯한 느낌.
석 경위는 샌더스가 보내준 차를 타고 다시 그 저택으로 갔다.
샌더스는 석 경위를 반갑게 맞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저택을 상속받았습니다. 석 경위까지도요.”
죽은 노인은 운명하기 전에 육성으로 녹음을 해서 유언을 남겼는데, 샌더스에게 석 경위를 아들처럼 돌봐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석 경위를 아들이 아니라 하수인처럼 부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석 경위의 집까지 찾아오며 친근하게 대하는 듯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자신의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즉, 골동품과 보석의 운반이나 암거래에. 그리고 그때마다 석 경위의 비밀통장에는 상당한 금액이 쌓이기 시작했다. 석 경위는 자신이 경찰 신분인 것을 잘 알면서도 한번 그 세계에 발을 들이밀자 마치 영안이 뜨인 듯 돈에 집착하게 되었다. 고아 아닌 고아로 큰 그로서는 평생 만져볼 수 없는 금액의 돈에. 그러나 그 돈은 당장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익명의 계좌로 외국 은행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계좌이체를 하면 되겠지만, 그러다 보면 계좌 추적을 당할 수 있어서 가능하다면 현지에 가서 현금으로 직접 인출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아니면 그 계좌를 담보로 하여 대출을 받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도 역시 현지에 가서 처리하는 것이 안전하다. 따라서 그 돈은 미래의 자금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즉 외국 은행의 대여금고에 보석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도 있다. 금액으로 따지면 아직 얼마 되지 않지만, 앞으로 간간이 외국에 나가면서 그곳에 가서 현금을 찾아 보석으로 바꾸어 조금씩 보관해 둘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자도 거의 없는 현금 저축보다는 보석의 미래가치가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 경위가 두 번째로 그 저택에 갔을 때 아래층 홀에서 울려퍼지던 음악. 그것은 바로 무소르그스키의 ‘죽음의 노래와 춤’이었다. 제1악장 죽음의 자장가, 제2악장 죽음의 세레나데, 제3악장 죽음의 트레팍, 제4악장 죽음의 야전사령관. 샌더스는 기막히게도 그 곡이 죽은 자신의 사촌과 석 경위를 연결시켜 주는 음악인 것을 알아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대한민국 한복판 야산의 한옥 깊숙한 방에서 또다시 흘러나오는 그 죽음의 음악.
석 경위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울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던 것이다.
‘죽음의 노래와 춤’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석 경위는 두 손을 내리고 얼굴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 천장과 한옥 창 사이를. 그곳에서는 감시카메라가 석 경위를 향하고 있었다. 석 경위는 그때까지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