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날이 밝자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에필로그
샌더스의 시체를 가운데 두고 석진우 경위와 로버트 강, 그리고 채이슬 선생은 망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샌더스를 권총으로 쏜 것은 채이슬이었다. 이슬은 아직도 그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게다가 이슬은 그 총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쏘고 싶었다. 죽어 있는 샌더스에게.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더 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기관총으로 사정없이, 하루 종일이라도 쏘고 싶었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쏘고 싶었다. 마음속에 꼭꼭 눌러놓았던 응어리, 분노, 수치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아 핵폭탄이라도 구해 와서 샌더스에게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슬이 쏜 단 한 발의 총탄으로 샌더스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너무도 간단하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실감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간단히, 그렇게 한 순간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슬에게는 샌더스가 그렇게 죽으면 안 되었다. 오래 오래 평생을 두고, 지구가 멸망하고 온 우주가 사라질 때까지라도 고통 받다가 죽어야 마땅했다. 그동안 이슬이 당한 고통과 수치심이 그렇게 한 순간의 복수로 사라진다는 것이 믿기지도 않을 뿐더러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 인간은 꼬챙이, 불집게, 펜치 등을 총동원해서 우주가 무너지고 나서도 그 이후까지 영원히 영원히 고통 받게 하다가 죽여야 했다. 그런데 그 악당이 한 순간에 죽고 만 것이다. 너무나도 억울하게. 억울하게. 억울하…….
이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에 총을 쥔 채로 흐느껴 울었다.
석 경위와 로버트는 우두커니 서서 이슬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석 경위가 그러나 본능처럼 이슬 앞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석 경위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슬의 손에 쥐어져 있는 권총을 잡았다. 이슬은 저항하지 않고 손가락을 풀었다.
석 경위는 일어서서 조심스레 권총의 탄창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비어 있었다. 로버트가 석 경위 옆으로 왔다. 석 경위는 로버트에게 빈 탄창을 보여주었다. 로버트는 눈에 띄지 않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권총에는 총알이 단 한 발만 들어 있었던 것이다.
샌더스는 후회가 막급했다. 이제는 소용없지만. 멍하니 뜨고 있는 두 눈은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으나, 영혼은 자신의 시체 주변에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셋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했었는데, 일이 어처구니없이 되고 만 것이다.
샌더스는 그동안 채이슬을 아주 잘 활용했다. 기막힐 정도로. 천성이 여린 탓인지 이슬은 샌더스가 조금만 겁을 주어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 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이슬을 세계 각지로 불러내어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이슬은 샌더스가 놓은 덫에 걸린 뒤부터 마치 영혼 없는 자동인형처럼 행동했다. 무슨 일을 시키든 고분고분 따랐다. 아무리 지저분하고 치욕스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그렇게 해서 이슬은 몸도 마음도, 심지어 영혼도 모두 샌더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 날 샌더스는 이슬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느껴졌다. 다른 대상을 찾은 것이다. 태국의 한 어여쁜 소녀.
그에 따라 이슬을 사라지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더 이상 활용가치가 없어진 석진우와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늘 마음에 걸리던 로버트 강도 함께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려 했다. 그래서 이날 오후 석진우를 동영재로 오도록 공작을 꾸몄다.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영국 정계의 한 고위인사를 통해서 한국대사관에 부탁을 한 것이다. 한국에 가 있는 어떤 부호의 보석 파티에 석진우 경위를 보내도록. 그와 동시에 캐나다 대사관 쪽 끄나풀을 통해 로버트에게 동영재의 정보를 흘려주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 이슬까지 이곳에 온 것이다. 나중에 아프리카 쪽으로 불러서 한바탕 즐긴 뒤에 감쪽같이 없애려고 했었는데. 이렇듯 예정에 없었던 이슬에게 어처구니없게도 샌더스는 당하고 말았다. 하필 셋 중에서 가장 만만했던 이슬에게. 여기에 알맞은 고사성어나 명구는 없는지 모르겠다. ‘Nulla rosa sine spinis(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이 문구 정도면 이슬에게 어울리려나. 이밖에도 샌더스의 영혼은 허공을 떠돌면서도 자신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찾느라 바빴다. 딱히 떠오르는 문구는 없지만 혹 한자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여기에 해당할까. 아니면 ‘Ut sementem feceris, ita metes’ 또는 단테가 표현한 ‘contrapasso(인과응보)’는 어떨지……. 영어로 하면 수도 없이 많다.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You reap what you sow. Collect as it is sprinkled 등등. 그래도 이런 극적이고도 엄중한 상황에서는 라틴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했다. 샌더스 자신이 서양인이자 지식인이라고 자부했었으니까.
Ut sementem feceris, ita metes
뿌린 대로 거두리로다
어떻든 샌더스는 동영재 외부에 설치한 CCTV를 통해 로버트 강과 채이슬이 함께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셋을 한꺼번에 처치하기로 한 것이다.
샌더스는 그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모두의 정체를 폭로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셋의 표정과 반응을 즐기고 싶었다. 특히 이슬의 수치심 가득한 얼굴을.
그런데 마지막 순간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샌더스 자신의 실수로.
샌더스는 이 점이 죽은 뒤에도 후회되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늘 냉정하고 차분했던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아마도 그 승리의 장면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급함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졌던 모양이다. 나이가 든 탓인가…….
샌더스는 CCTV를 통해 석 경위가 의자에서 일어나 코끼리 쪽으로 다가가서 그 뒤쪽, 권총이 놓여 있는 곳으로 손을 뻗는 것을 확인한 뒤 모니터실을 나섰다. 그리고 석 경위가 앉아 있는 방으로 향했다.
샌더스가 문을 열었을 때 그 세 사람은, 샌더스의 희망대로 모두 모여 있다가 깜짝 놀라 샌더스를 돌아다보았다.
샌더스는 세 사람 앞으로 가서 싱글싱글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때, 이제 서로서로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되었나?”
그러나 남자 두 사람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샌더스의 예상과 달랐다. 아직 서로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흠, 내가 정확히 알려줄까?”
샌더스는 이슬을 쳐다보았다. 느끼하고도 징글징글한 웃음이 깃든 표정으로.
그러면서 샌더스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두 신사분들, 여기 이브, 미스 이브, 미스 채를 우선 소개하겠소. 나의 사랑하는 여인 이브 먼저…….”
그 순간 총이 발사되었다.
코끼리 조각상 뒤에 서 있던 이슬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권총을 들고 쏜 것이다. 코끼리 조각상 바로 뒤에 놓여 있는, 석 경위가 잡으려다 멈췄던 권총. 석 경위는 어쩐지 그 권총에 음모가 있는 것 같아서 집어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샌더스는 코끼리 조각상에 가려 그 총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슬 앞에는 두 남자가 서 있어서 샌더스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샌더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권총에서 총알을 모두 제거한 뒤 갖다놓으라고 지시했었기 때문이다. 마담에게. 그런데 그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다니…….
항상 모든 것을 직접 꼼꼼히 확인하던 샌더스가 일생에서 처음으로 남에게 시킨 뒤 믿고 맡긴 일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샌더스가 살아온 모든 인생 과정 중에서 유일한 실수. 그것이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실수가 되고 말았다.
“두 분에게 특권을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밤 이 사건은 샌더스가 먼저 총을 꺼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처리가 가능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현장 증인이 되겠습니다. 그 대신 두 분은 앞으로 평생 한국에서만 사십시오. 두 분이 이곳 한국에서는 아무런 범법행위를 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한국 밖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눈을 감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국 땅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게 되면 곧바로 두 분에 대한 모든 것을 경찰에 알릴 겁니다. 나는 이번 주말에 캐나다로 떠납니다. 여기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늘 이 상황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아마 이 상황은 저기에 매달려 있는 CCTV 카메라에 다 찍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버트 강은 석진우 경위와 채이슬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