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dolf Apr 23. 2021

아주 슬픈 (16&17/20)

16     


송연은 다시 무의도로 향했다. 9월초였다. 9월로 들어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무더위가 물러갔다. 물론 그 사이에 태풍이 두 번 몰려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하늘이 청보석처럼 맑고 높아진데다 날이 선선한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다.

    송연은 맑고 청량한 하늘 아래의 무의도 길을 걸어서 지난번 찾아갔었던 그 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교회 문 앞에서 잠시 서성이자 거짓말처럼 그 할머니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할머니는 송연을 보자 말은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래, 할머니는 송연이 다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오늘. 지난번과 같이 이번에도 운명처럼.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그 눈.

    하지만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르다는 것만 느꼈을 뿐.

    “별일 없었수?”

    억양 없는 할머니의 말. 지난번 길고 긴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은 잊어버렸는지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 하는 말투였다.

    네, 할머니. 하지만 마음이 힘들었죠.

    송연은 말은 없이 눈으로만 대답했다.

    할머니는 송연의 마음을 들었는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할머니는 돌아선다. 아무 말 없이. 그러더니 천천히 걸어간다.

    송연은 그 뒤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식당을 지나 오래된 창고처럼 생긴, 녹슬고 다 쓰러져 가는 골진 철판 헛간 옆으로 돌아간다. 천천히 터벅터벅.

    송연은 말없이 따라갔다.

    할머니가 헛간 뒤로 돌아가서 사라진다.

    송연은 급히 뒤따라갔다. 송연이 헛간 옆으로 돌아 들어가자 버려진 땅 같은 좁고 지저분한 공터가 나온다. 그곳에 아주 낡은 소형차가 한 대 서 있었다.

    할머니는 그 차에 가까이 가더니 열쇠를 집어넣지도 않고 앞문을 연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곧이어 차량 시동 거는 소리.

    할머니 차? 뜻밖이었다.

    송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차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리고 송연 옆에 와서 서더니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이 완전히 내려간다.

    할머니가 열린 창 안에서 눈으로만 말한다. 타라고.

    송연은 잠시 망설이다 아랫입술을 저 혼자만 알도록 지그시 물고서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차 앞으로 돌아서 할머니 옆 좌석 문을 열었다.

    너무 지저분했다. 바닥이나 의자나. 슬쩍 뒷좌석을 쳐다보았는데 그곳에는 무슨 물건인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보따리, 배낭, 냄비 등등이. 게다가 지독한 냄새…….

    하지만 송연은 아무런 내색도 않고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잡아당기자 잘 빠지지 않는다. 억지로 두 손으로 잡아당긴 끝에 가까스로 벨트를 맬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를 돌아보았더니 아예 안전벨트를 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송연은 괜히 무안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역시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이 앞만 보고 있다가 차를 출발시킨다.     



차가 도착한 곳은 무의도 남쪽 광명항 근처의 방파제 펜션 옆쪽의 숲속이었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연 역시 긴장은 되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는 듯 창밖의 광경만 쳐다보았다. 참 맑은 날. 할머니 쪽 열린 창으로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차 안의 고약한 냄새들은 거의 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차를 세우고 송연 쪽을 돌아다보며 먼저 내리라는 표정을 짓는다.

    송연은 말없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울창한 나무숲. 그 사이로 바닷바람 대신 시원한 숲바람이 얕은 언덕에서 불어 내려온다. 울창한 숲 위쪽에서 반가운 손님을 맞듯이 불어오는 가을바람.

    벌써 가을이야? 너무 빠른 느낌이다.

    어?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차에서 나와 송연 뒤에 서 있는 것이었다. 송연은 숲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느라 잠시 할머니를 잊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말은 없이 고개만 두어 번 살짝 끄덕이고는 숲속으로 난 좁은 길을 걸어 올라간다. 송연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비탈을 올라가자 송연은 숨이 찼다. 그러나 여든이 훨씬 넘었다는 할머니는 조금도 힘들지 않는지 묵묵히 일정한 속도로 걸어 올라간다. 허리도 약간 굽은 분이. 뒤에서 보니 그 작은 체구가 한없이 연약해 보였는데, 할머니는 평소에도 산길을 많이 걸었는지 아니면 원체 건강한 몸인지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 모습이다.

    숲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야트막한 정상이 나온다. 그 위도 역시 나무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나무들 사이로 저 아래쪽에 바다가 펼쳐져 보였다. 할머니는 언덕 등성이에서 약간 비탈지게 바다 쪽으로 내려간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비탈이 더 급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나무숲 사이에서 시야가 탁 트인 곳을 골라 나가서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송연은 숨을 헐떡이며 할머니 근처로 가서 섰다. 그 아래는 거의 절벽 같은 느낌이었다.

    아, 바다!

    저 아래로 짙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바닷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부딪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이는 해녀도가 외롭게 떠 있었다.

    너무 좋다.

    송연은 두 팔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에서는 산새소리와 저 아래에서 바닷물 몰려와 부딪는 소리만 들려올 뿐 적적한 고요만 흐르고 있었다.  

    송연 옆에서 할머니는 저 먼 바다 끝만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헐렁한 바지 주머니에서 두툼한 무엇인가를 꺼낸다. 아주 오래되었을 법한 검고 길쭉한 가죽주머니. 두 뼘 정도의 길이였다. 할머니는 송연을 돌아다보며 가죽주머니를 내민다. 송연은 할머니를 마주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가죽주머니를 내민 채 여전히 송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연은 어딘지 숙연한 마음으로 가죽주머니를 받았다.

    할머니가 눈으로 말한다. 열어보라고.

    송연이 투박하게 생긴 지퍼 꼭지를 잡고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입을 열고 말을 한다.

    “학생이 여기에 따라오면 안 되었어.”

    송연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나한테 죽을 수도 있었잖아.”

    송연은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할머니를 바라볼 뿐이었다. 몸이 갑자기 굳어진 상태에서.

    “열어봐.”

    송연은 손가락이 굳어서 지퍼 꼭지를 잡아당겨   없었다.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과 사고가  얼어붙어 있었다.

    “열어.”

    할머니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송연의 몸은 더 굳어졌다.

    송연은 한 손으로 지퍼 꼭지를 잡고 있었으나 그 상태에서 모든 게 멈춰진 상태였다.

    할머니가 노려보듯이 쳐다본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송연이 들고 있던 가죽주머니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굳어 있는 송연의 손에서 가죽주머니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가죽주머니를 두 손에 잡고서 조금도 힘 들이지 않고 지퍼를 주욱 열었다.

    지퍼 열리는 소리.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나 숲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새소리 속에서 그 지퍼 소리가 마치 절벽으로 바윗돌 굴러 떨어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으로 송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송연의 등줄기로 한기가 쫘악 지나가며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러한 송연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할머니는 지퍼를 한번에 잡아당겨 열고는 가죽주머니 안에서 누렇게 변색된 천으로 돌돌 만 길쭉한 것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또다시 송연에게 내밀었다.

    송연은 몸은 굳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두 손이 그 천을 푸는 것이었다.

    그러자 낡은 천 속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물건이었다.

    칼, 녹슨 칼이었다.

    그런 다음 할머니는 몸을 돌려 한숨을 크게 쉰 다음 바다를 보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긴 이야기. 수십 년간 마음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결코 입 밖에 내면 안 되었던 그 옛날의 음산한, 그리고 끔찍한 이야기.     



17     


G7에 이어 G8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기존의 독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가나다순)에 한국이 참여하는 첫 번째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축하하기 위해, 회의가 열리기 전날 저녁 서울의 광화문 앞 도로가 통제되고 그곳에서 길거리 공연을 벌이게 되었다. ‘범이 달려간다’는 표어와 그 주제에 맞춘 엄청나게 큰 걸개그림이 광화문 벽에 설치되었고, 또한 한국 최고의 뮤직 아티스트들이 백두산 호랑이의 위풍당당한 등장과 함께 그 이후 미래와 우주를 향한 질풍노도의 질주를 표현하면서 각종 축제를 벌였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진행된 이 행사에 국내 모든 방송국은 물론 G8에 속하는 국가와 장차 여기에 포함되기를 희망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G8에 들어가지 않은 국가들에서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와 이 공연을 실시간으로 중계방송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수많은 인파도 차츰 사라진 뒤 광화문과 세종로 일대는 각국 방송국 직원들이 서울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밤 10시경 송정섭은 세종로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에게 영광스러운 오늘. 그러나 온 세계에 가장 부끄러운 날이 되리라.


화려한 행사가 끝난 뒤의 광경은 다소 허망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엄청난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광화문 일대는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평시와 같은 정도의 분주함은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거리는 송정섭의 마음같이 공허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반면에 자동차는 여전히 많았다. 광화문광장을 한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환한 헤드라이트 밝히고 빛의 물결을 이루며 달려가는 차량들. 조금 있으면 신호등에 걸릴 텐데도 마치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마구 내달린다. 그러다가 끼익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아슬아슬한 순간에 멈춰선다.

    송정섭은 그러한 장면이 부러웠다. 대한민국에서 등록된 2,400만 대의 자동차와 집에서 기르는 개 숫자를 합하면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다고 하는데, 송정섭은 운전조차 하지 못한다. 개도 물론 없고. 미성년자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차는 없어도 운전면허증은 가지고 있다는데, 이 두 가지에서 송정섭은 제외된다. 2관왕. 그리고 20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 중 40년 이상 투표권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3관왕. 여기에 개도 기르지 않으니까 4관왕. 대단하다. 또한 가정도 없다는 것까지 더하면 5관왕이 된다. 출세했다. 가문의 영광까지는 아니더라도.

    송정섭은 세종로 건너편, 미국대사관이 길 건너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가서 멈춰섰다. 미국대사관의 연회색 담장 중간에 난 정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는 경찰이 띄엄띄엄 서 있고. 낮에는 대사관 옆 골목에 경찰버스가 잔뜩 들어서 있고 전경들이 그 근처를 얼씬거리거나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어서 무슨 요새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적적해 보이기는 여느 건물과 매한가지였다. 다른 점이라면 경찰이 담장 앞 중간중간에 서서 경계를 한다는 것뿐.

    송정섭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복수하는 일. 또 하나는 미국대사관에 망명하는 일.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모두 이룰 희망은 없다. 그래서 한 가지만 택하기로 했다.

    송정섭은 가지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에서 노란색 안전요원 조끼를 꺼내어 입었다. 다음으로 안전모와 커다란 랜턴, 그리고 휘발유통과 라이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한 묶음 되는 종이뭉치.

    송정섭은 왼손에는 종이뭉치를 들고, 오른손에는 랜턴을 들고서 도로를 좌우로 이리저리 비추며 세종로 한복판으로 들어가 걸어갔다. 총알처럼 달려오던 차들이 요란한 클랙션 소리를 내며 멈춰서거나 비껴간다. 송정섭은 세종대왕 동상 앞 해치마당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 휘발유 통을 열고 머리에서부터 부었다. 그리고 종이뭉치 끈을 푼 다음 전단지를 하늘로 마구 날렸다. 어설프지만 인터넷 번역 앱을 통해 G8 국가의 언어들로 모두 번역해서 실은 고발장을.

    그런 다음 미국대사관을 향해 똑바로 섰다. 곧이어 라이터로 몸에 불을 붙인 뒤 두 팔을 들어올렸다. 순식간에 세종로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 송정섭의 귀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사이렌이 아니다. 높고 가늘고 절규하는 목소리. 그것은 미연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그 부근에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을 찍던 수많은 나라의 TV 방송국 카메라가 그 장면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음 화로 계속]

이전 12화 아주 슬픈 (14&15/2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