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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Apr 24. 2021

아주 슬픈 (18&19/20)


18 

    


미연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 TV 뉴스 속보를 통해 전날 밤 대한민국 서울의 미국대사관 앞에서 한 남자가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송정섭이 자막으로 나오는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또한 그가 뿌린 전단지를 통해 지난 45년간 억울하게 감옥에 있었다며 대한민국 정부를 고발했다는 것이 뉴스로 나왔다. 뉴스 앵커가 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미연은 발광했다.     


19     


송연은 무의도 남쪽 해안가의 한밤중 절벽 숲 위에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45년 전 송정섭이 보안사에 체포된 소식이 무의도에 들려온 다음 날 동사무소에서 송정섭과 함께 일한 방위병이 밤늦게 다리 살짝 전다는 할머니, 즉 그 당시에 키가 하도 작아 몽당연필 같다고 해서 몽당 여편네라고 불리던 여자에게 몰래 찾아왔다. 

    그리고 방위병은 몽당 여편네를 강제로 끌고 무의도 남쪽 해안가 절벽 쪽으로 갔다. 

    “이 ×년, 너 때문에 나 죽게 생겼어! 내 친구까지 다!”

    그때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는 통행금지여서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되었고, 더구나 무의도는 간첩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고 해서 해안가 감시가 심하고 밤 10시 넘어서는 나다니기조차 힘든 때였다. 그런데도 한밤중 1시경에 집에 쳐들어와 몽당 여편네를 잠자리에서 끌고 나가 그곳까지 데려간 것이다. 몽당은 겁에 잔뜩 질려 소리도 치지 못하고 끌려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당장에라도 쳐죽일 기세였기 때문이다. 

    “살려줘……. 나 잘못한 거 없어. 내가 고자질한 거 아니야. 그 심술할멈이 그런 거야. 다 알잖아, 그거.”

    “그래도 네×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우리 이모님이 나 불쌍하다고 해서 그렇게 해준 거야.”

    몽당은 뒷걸음질 치다 낭떠러지 끄트머리께까지 갔다.  

    그때 방위병이 갑자기 달려들어 몽당의 멱살을 와락 붙잡고 소리쳤다.

    “죽여버릴 거야! 나까지도 간첩에 몰리게 됐어. 영창에 가는 정도가 아니란 말야!”

    “내가 가서 다 말해 줄게. 정말이야. 우리 둘 다 잘못한 거 별로 없잖아. 내가 가서 말해 줄게. 제발…….”

    “죽여버릴 거야!”

    방위병은 두 손으로 몽당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몽당이 캑캑거리며 발버둥 쳤다. 그러나 방위병의 손은 느슨해지지 않고 더욱 세게 죄어왔다. 몽당이 방위병의 손을 붙잡고 몸부림치다가 한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위병의 손이 풀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배를 움켜쥐었다. 캄캄한 밤이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방위병의 배에서 밤보다 더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같았다.

    “이 썅×…….”

    몽당은 낭떠러지 끝에 서서 겁을 집어먹은 채 몸을 덜덜 떨면서 방위병을 바라보았다. 몽당이 집에서 나올 때 만일을 위해서 미리 감춰서 가지고 온 칼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방위병의 배를 찌른 것이다. 방위병이 목을 조르느라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서 아주 깊숙이.    

    몽당은 계속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방위병을 바라보았다. 

    방위병은 배를 움켜쥔 채 눈을 부릅뜨고 몽당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을 내밀어 몽당을 잡으려 했다.  

    몽당은 더는 뒷걸음질 칠 수가 없었다. 자기 뒤는 시커먼 낭떠러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방위병은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 게다가 방위병의 치켜뜬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악귀와 같이 번득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몽당은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뛰쳐나가며 팔을 쭉 뻗어 방위병의 목 아래, 양쪽 빗장뼈 사이, 가슴뼈 바로 위를 칼로 푹 찔러넣었다. 그곳을 일부러 겨냥한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내민 칼이 그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끄윽 소리를 내며 방위병은 그 자리에서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두 눈은 부릅뜬 채 그대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 개의 검은 물체가 낭떠러지 위에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의 물체만 남아 미동도 않은 채 서 있었다. 마치 정지된 영화 화면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 아래에서. 

    무의도 남쪽 해안가 낭떠러지는 그런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밤 바닷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몽당은 그날 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날 밤 일을 더듬어 보고 나서야 자신이 한 일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방위병의 몸을 낭떠러지 아래로 굴려 떨어뜨린 것이 생각나고, 방위병의 목에서 칼을 빼내어 집에 가져온 것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칼에서 피를 말끔히 닦아낸 다음 천에 둘둘 말아서 마침 집에 가지고 있던 가죽주머니에 넣어 자기만 아는 곳에 깊숙이 감춰두었다. 그런 다음 두 눈 꾹 감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송연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마치 자신이 살인자인 것 마냥 손에 쥔 칼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칼은 45년 전의 칼이 아니다. 지금, 방금 전에 한 사람의 몸에 꽂아넣었다 뺀 칼이었다. 죽음의, 어둠의, 지옥의 칼. 송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송연은 망연히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가 칼을 다시 받아들 때까지. 

    송연은 그날 밤 그 할머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 상태로 한동안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지러운 꿈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 낭떠러지, 손에 묻은 피, 방위병이 아니라 할머니 목에 꽂힌 칼, 밤바다에 떠 있는 시체, 시커먼 숲 속에서 헤매는 송연 자신…….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듣고 또다시 송연은 어젯밤 들은 이야기보다 더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그 전날 밤 10시경 세종로 미국대사관 건너편에서 벌어진 분신사건. 불에 탄 채 죽은 그 남자의 이름이 송정섭이라는 것이었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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