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방랑자들의 이야기

fabulam spatii vagi

by Rudolf


quam bonus es | 너무도 착한 그대여


안드로메다 은하 건너의 작은 별에 절세미인에다 마음씨가 너무 고운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소문이 온 우주에 퍼져서 여러 별에 사는 왕자, 기사, 부자, 학자, 청년들이 찾아와서 청혼을 했다. 그러나 처녀는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만나지도 않았다. 그러자 남자들은 그 집 앞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면서 서로 자기가 그 처녀를 차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경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처녀가 사실은 장님이라는 것이었다…….


res, non verba | 소문이 아니라, 진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처녀가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장님 때문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세 남자만 남게 되었다. 아리우라 별의 왕자, 메가토니아 행성의 부자 청년,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먼 별에서 왔다는 거지였다. 게다가 너무너무 못생겨서 검은 천으로 얼굴을 온통 가린 채 지저분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그런데 엉뚱한 말이 떠돌고 있었다. 그 거지가 실은 처녀의 숨겨둔 연인이라는 것이었다. 먼먼 옛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



quid ploras? | 무엇 때문에 우시나요?


어느 날 밤, 잠이 오지 않는 아리우라 별의 왕자가 처녀의 집 창문 아래로 갔다. 처녀의 방은 4층이었다. 그러나 그 창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물론 불도 꺼져 있고. 그러나 어디선가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바로 처녀가 사는 4층의 창문이었다. 왕자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처녀여, 무엇 때문에 우시나요?” 그러자 울음소리가 멈췄다. “처녀여, 이 한밤중에 무엇이 그리 서러워서 울고 있나요?” 그러나 처녀는 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nolite flere, mulier | 울지 마시오, 그대여


왕자가 여러 번 물었지만 끝내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다음날 밤 왕자는 다시 처녀의 방 아래로 갔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울음소리가 더 크고 더욱 처량했다. 왕자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왕자는 벽에 길게 늘어진 담쟁이덩굴을 붙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담쟁이가 튼튼해서 왕자를 잘 버텨주기는 했지만 사실 아슬아슬했다. 그래도 왕자는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 올라가서 드디어 처녀의 방 창문 옆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울음소리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자는 창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 똑, 똑…….


in tenebris | 암흑 속에서


방 안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왕자는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안에서 누군가가 창문 쪽을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낮은 소리로 묻는 말이 들렸다. “누 구 세 요……?” 왕자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리우라 별의 토레이라 왕자요.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거요?” 그러자 방 안에서 갑자기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옷가지 스치는 소리……, 어딘가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 탄식과 같은 긴 한숨 소리……. 그다음에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왕자는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살며시 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 안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왕자는 방 안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요?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있는 거요?”

그러자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제발 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그 목소리가 너무 애절해서 왕자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왕자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녀에게 안 좋은 일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창문을 넘어 펄쩍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에서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도 없는 그믐밤에 초롱불 하나 없으니 주변은 물론 사람도 구분할 수 없었다. 왕자는 더듬거리며 문 쪽으로 가서 계단 바로 위에 섰다. 저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작은 등잔을 켠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그 빛 사이로 어떤 사람이 급히 지나치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은 남자의 모습 같았다…….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쓴 사람……. 왕자는 그 장면을 스치듯 보았는데도 그 순간 한 사람이 퍼뜩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지……. 그러나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왕자는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중에도 왕자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1층에 다다랐는데, 그곳에서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서로 꼭 붙어서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는 두 사람. 둘 다 모두 검은 옷을 입고서.



caelesti serenade | 천상의 세레나데


donecdum vita est, spes est

|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왕자는 두 사람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다. 아주아주 슬픈 그 이야기. 눈물 없이 들으면 가슴에 메고 숨이 막혀 질식사할지도 모르고, 눈물을 적게 흘리면 흘리다 만 눈물이 고여고여 썩어서 눈이 멀지도 몰라서 차라리 눈물 많이 흘리는 것이 나은 이야기.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먼먼 옛날 아주 머언 옛날, 저 멀고 먼 별의 깊은 숲속에 있는 검은 호수에 사는 마녀가 어느 따스한 봄날 나들이 갔다가 어떤 숲속을 거닐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가 소곤소곤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마녀는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나직한 웃음소리도 들리면서 그 소리가 나는 쪽에서 은색 가루들이 파르르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마녀는 그러한 것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그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자그마하면서도 아주 맑은 호수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녀의 산에 맑은 호수라니……!

그 숲속에 수천만 번 와보았어도 보지 못했던 호수. 게다가 웃음소리까지 나다니. 괘씸한지고! 그래서 마녀는 암사슴으로 변장하여 호숫가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저쪽 아름드리 로뎀나무 뒤쪽에서 사람의 다리 네 개가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아마도 젊은 두 남녀가 나무 뒤쪽에 앉아 밀어를 나누며 웃는 것 같았다. 마녀는 그쪽으로 폴짝폴짝 뛰어서 가보았다. 그랬더니 꽃처럼 어여쁜 소녀와 귀공자같이 생긴 소년이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쁜 암사슴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일어나서 반가운 얼굴을 했다. “어머, 사슴이네. 너무 예뻐.” 그 말에 마녀는 분노가 더욱 치밀었다. 이것들이 감히 내 산에 들어와 사랑을 속삭여? 그러나 마녀는 자신의 모습이 암사슴인지라 눈을 반짝이며 그대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사슴의 등을 쓰다듬으려 했다. 바로 그때 마녀는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소녀도 깜짝 놀라 소리 지르며 뒷걸음질했다. “어머낫!” 그 순간 마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때 마녀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주문을 걸었는데, 그만 주문이 잘못되어 엉뚱하게 지렁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알간 색의 가느다랗고 예쁜 지렁이가 아닌, 몸 여기저기가 불퉁불퉁 튀어나오고 색도 거무튀튀한 못생긴 지렁이. 그래서 소년이 얼른 앞으로 뛰어나와 지렁이를 발로 콕콕콕 여러 번 밟아버렸다.

그 뒤 마녀는 온몸에 멍든 채 자신이 사는 저주의 성으로 돌아가서 몸 여기저기에 약을 덕지덕지 바른 채 몇 날 며칠을 누워서 지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너무 분해서 그 두 사람에게 저주를 입혀 소녀를 장님으로 만든 뒤 머나먼 별로 날려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은 못생긴 거지로 만들어 온 우주를 떠돌게 했다. 이렇게 해서 수천 년 동안 두 사람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연을 알고 있는 꼬마 별똥별이 거지에게 몰래 다가가 소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은 저 먼 우주 끝에서부터 소녀를 찾아찾아 이 별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 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청년과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지와 장님으로.



nondum omnium dierum sol occidit

| 아직 모든 날의 해가 진 것은 아니다


왕자는 두 사람에게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고 나서 왕자는 말했다. “나에게는 억울한 저주를 풀어줄 능력이 있다오. 이제 두 분의 저주를 풀고 내 별궁이 있는 별로 보내겠소. 그곳은 어떠한 저주도 통하지 않고 오직 사랑과 행복만 있는 곳이오. 그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오.”


vade in pace | 편히 가시오


이 소식은 즉시 온 우주에 퍼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왕자의 별궁이 있는 별로 떠나는 날, 저 먼 별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몰려와 축하도 해주고 수많은 꽃과 선물을 주었다.



sed…… | 그러나……


그 사람들 속에 한 못생긴 애꾸눈이 있었는데, 그가 마녀의 심복인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꽃마차를 타고 저 먼 별로 떠나는 순간, 그 애꾸눈은 사람들 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자기가 기르는 까마귀의 귀에 무슨 말인가를 하고는 얼른 날려보냈다……. [끝]

keyword
이전 04화‘믿거말거’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