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 물 도 내 만 갓 하 여

by Rudolf


휘준은 대전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무조건 서울로 가기로 한 것이다. 대승리 근처를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무슨 일이 서울에서 기다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고 싶었다. 한때는 계속되는 도피생활에 지쳐 자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보자고.

휘준이 서울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자란 곳. 자의로 의해 떠난 것이 아니다. 동료들이 잡혀 들어갈 때 성진이 연락을 해주었다. 성진이 신문기자인 아버지를 통해 정보를 얻어 휘준에게 급히 알려준 것이다. 휘준이 알기로는 휘준만 빼고 거의 대부분 잡힌 것 같았다. 이 모두가 그 자식 민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명단을 넘겼으니까. 그 자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휘준은 모른다. 성진 역시 모른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법대로 간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휘준이 서울로 가는 데는 그놈을 찾기 위한 것도 있었다. 짐작 가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기 그놈이 요란하게 떠들던 말 속에서.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휘준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역에 내리니 오히려 배짱이 생겼다. 아니, 자포자기겠지. 어떻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서울역 앞 작은 광장을 보란 듯이 걸었다. 찌들고 겁먹은 모습보다는 그것이 오히려 더 안전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휘준은 우선 신당동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도피하고 아버지가 강릉으로 좌천되고 하면서 집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 편지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휘준에게는 집 열쇠가 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열고 들어갈 순 없다. 일단 그 근처에 가서 살펴보기만 할 것이다.

휘준은 버스를 타고 동대문으로 갔다. 그리고 동대문운동장 뒤쪽으로 가서 실내스케이트장, 광희국민학교, 한양공고 방면으로 이 골목 저 골목 구불구불 걸어갔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뒤따라오는 느낌은 없었다. 겨울철 대낮, 하늘은 잔뜩 흐려 있고 매서운 바람이 헐렁한 바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온몸을 휘집고 다녔다. 일부러 휘준이 잘 안 다니던 길로 돌아서 갔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산 곳이라 안 다녀본 길이 없었다.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구멍가게, 문방구, 세탁소, 이발소, 목욕탕, 쌀집, 정육점, 채소가게, 옷가게 등등 모두 낯이 익은 곳이었다. 그 가게들의 간판만 보아도 어릴 때부터 지나온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집까지 2백여 미터 남았다. 휘준은 멈춰섰다. 갑자기 눈물이 돌았기 때문이다. 마치 만주로 중국으로 북간도로 도피하다 조선 땅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심정이었다. 휘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내 조국, 내 땅’하고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언 땅의 흙이라도 파서 가슴팍에 숨겨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코끝이 아려왔다. 자신의 집이 저 앞인데 가지도 못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 휘준은 항의라도 하고 싶었다. 태극기를 펼치며 대한민국 만세라도 외치고 싶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 가사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가슴이 아렸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어 마음속으로도 더 이상 가사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마침 지나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흐느적거리며 눈물 어린 얼굴로 입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별로 좋게 여기지는 않았을 테다.

휘준은 대승리 제과점 근처에서처럼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렸었다. 그리고 여기도 내가 올 곳이 아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이긴 하지만 내 땅은 아니다. 내가 밟을 수 없는 금단의 땅.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곳.

휘준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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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기 그놈은 틀림없이 제 외가 쪽에 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짐작할 만한 말을 그놈이 휘준에게 했기 때문이다.

휘준은 2학년 말경으로 시간을 돌렸다.

명동 대성빌딩에서 흥사단의 문리대 아카데미 모임을 끝내고 저녁 늦게 나오는데 뒤에서 민기가 휘준을 불렀다.

“같이 가자.”

휘준은 아무런 표정 없이 돌아서서 바라보았다.

“막걸리 어때?”

휘준은 술을 못 마신다고 대답했다. 민기는 피식 웃는다.

“안주만 먹어.”

민기는 YMCA 뒤쪽으로 갔다. 파전이 맛있는 집이라며 한 골목으로 들어가 막걸리집 앞에 섰다. 휘준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민기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떠들썩한 분위기. 약간 어두운 조명. 진한 막걸리 냄새, 파전 냄새, 담배 냄새.

민기는 이것저것 주문한 뒤 말을 꺼낸다.

“너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무슨 재미로 사냐?”

“…….”

막걸리부터 나왔다. 민기가 주전자를 들며 말했다.

“정말 안 마실래?”

“못 마셔.”

“받아만 놔.”

민기가 휘준 앞에 놓인 중자 크기의 찌그러진 주발에 막걸리를 따랐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휘준에게 내밀었다. 휘준은 받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민기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자기 잔에 직접 술을 따른다.

“나도 담배는 피우지 않는데, 너는 나보다 더하다.”

“말해 봐.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자식, 급하긴. 뭔 할 말이 있겠니? 그냥 얘기나 하자고 온 건데.”

민기는 잔을 반쯤 비우고 내려놓았다.

“혼자만 마시려니 싱거워서…….”

이렇게 말하면서 청각김치 하나 집어 입에 쑤셔넣는다.

“좋아. 말을 하지. 사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민기는 잔을 들어 남이 있는 것을 입에 탁 털어놓고서 잔을 휘준에게 내민다.

“받아.”

휘준은 민기를 빤히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민기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듯했다. 잔을 앞으로 내민 자세에서 그대로 잠시 가만히 있던 민기가 슬쩍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잔을 거둔다. 그리고 스스로 막걸리를 따랐다.

큼지막한 파전이 나왔다. 먹음직스러웠다. 그러나 휘준은 먼저 젓가락을 대기가 멋쩍어 눈을 돌려 저쪽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민기가 젓가락으로 파전을 이리저리 찢어놓는다.

파전은 미리 찢어놓으면 맛이 다 새나가는데……. 휘준은 아쉬운 눈빛으로 민기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휘준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말해. 물어볼 거 있으면.”

“너 우리 문리대에서 다 알더라. 아버지가 경찰이라며?”

휘준이 짐작하던 대로였다. 마음속으로는 욱 하고 치밀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

“아니, 뭐 그렇다는 거야. 그게 문제되는 건 아니니까.”

민기는 주발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또다시 자기 잔에 술을 따라놓고 파전 한 무더기를 입에 쑤셔넣는다.

“좀 먹어라. 여기 파전 맛이 최고야. 정 선배도 여기 단골이다. 이 파전 때문에.”

민기는 잔을 들어 이번에는 조금만 홀짝이고 내려놓는다.

“그래, 솔직하게 물어보자. 아니, 네가 직접 네 입으로 말해 봐라.”

민기는 등을 의자 뒤로 밀면서 팔짱을 끼고 휘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 믿어도 되는 거니?”

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섰다.

잠시 뒤 민기가 두리번거리며 나왔다. 휘준을 보고 놀라는 기색도 없이 옆으로 와서 선다. 손등으로 입을 닦는다. 막걸리 냄새가 확 풍겼다. 나오기 직전에 주전자째 들이부은 것 같았다.

“야, 술을 안 마시면 술값이라도 내야 하는 거야. 그런 건 아는 거지? 여기에 달아놓았으니까 다음에 와서 네가 갚아라. 밀린 것이 있어서 좀 많을 거야. 나 여기 단골이거든. 정 선배하고 말야.”

“다른 건 물어볼 거 없니?”

“많지. 아주 많아. 사실 나 너 무지 싫어하거든. 너 그 고상한 척하는 짓 눈에 거슬리는 거 알지?”

“웃기지 마.”

“짜식. 농담이다, 농담. 그런 걸 가지고…….”

민기는 휘준을 돌아다보며 낄낄거린다. 막걸리 냄새.

휘준은 노골적으로 한 발 옆으로 옮겼다.

“Quantum mortalia pectora caecae noctis habent! (등도 제 마음의 어둠은 비춰내지 못한다.)” 민기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읊듯이 말을 한다.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아무리 고고하셔도 어둠은 있는 법이지. 안 그래?”

“Abracadabra. (헛소리.)” 휘준이 대꾸했다.

“역시 멋지셔.” 민기가 낄낄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팔을 툭 친다. “걷자.”

둘은 종로 거리로 나와서 동대문 쪽으로 걸었다.

민기는 뜻밖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부모가 이혼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이혼이 쉽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용산에서 살았는데, 부모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외가가 있는 안성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아버지는 곧바로 미국으로 이민 갔고. 아버지가 아들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민기 생일마다 미국에서 선물을 보내왔다. 안성 시골에서는 그 선물이 큰 자랑거리였다.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으며, 안성으로 내려가서도 계속 교사 생활을 했다. 아들 하나 희망으로 삼고서. 어머니는 지금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캐나다 여자를 만나 재혼해서 보스턴 근처에서 산다고 했다. 아들딸 셋을 두고서. 아버지가 민기를 이민 신청해 두어서 언젠가는, 아마도 몇 년 안에 미국에 갈지도 모른다. 군대 가기 전에는 이민비자가 안 나올 것 같은데, 가능하면 대학원에 진학해서 시간을 질질 끌면 한국 군대생활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군대는 갔다 오고 싶다고 했다. 이 땅을 떠나면서 군대는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주는 선물로.

휘준은 별 대꾸 하지 않으면서 민기의 말만 들어주고 있었다. 어느덧 종로5가까지 갔다. 기독교회관이 보이자 민기가 혜화동 쪽을 가리키면서 묻는다.

“문리대 쪽으로 가볼까?”

휘준이 대답 없이 가만히 있자 민기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냥 가자.”

둘은 동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이 서울이야. 국민학교는 안성에서 다녔지만 중학교 때부터 다시 서울 생활을 했어. 이모가 신촌에서 살았거든. 제법 부자라서 편하게 지냈지. 나도 너처럼 재수한 것 알지?”

민기는 휘준을 돌아다보고는 별 반응 없는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난 사실 학생운동 별 관심 없어. 이즘도 없고 정부 하는 일에 간섭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말야…….”

민기는 다시 휘준을 돌아다보면서 발걸음을 멈췄다. 휘준도 따라서 발을 멈추고 민기를 마주보았다.

민기는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휘준은 듣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민기가 얼른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휘준이 고개를 돌려 민기를 보았다. 민기도 고개를 돌려 마주보았다.

훤칠한 키. 건장한 체격. 그래서 휘준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피부 허옇고 멀끔한 외모. 아무하고나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금방 상대방을 압도하는 입담. 어디에 가든 리더가 되는 성격. 민기는 그 좋은 조건을 최대한 누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휘준이 민기를 언짢아하는 것에는 이러한 점들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휘준이 갖지 못한 남자다움을 민기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야망까지 지닌 호남아. 하지만 그놈은 덩치답지 않게 약았다. 너무 약았지.

“나는 미국에 가서 로스쿨에 갈 거야. 변호사를 하거나 정계로 나갈 생각이거든. 지금 공부하는 학과 사실은 흥미 없어. 원래는 법대 가려 했는데, 삼수는 할 수 없어서 일단 그 학과로 들어온 거야. 웃긴다.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거.”

휘준이 발걸음을 멈추자 민기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표정을 짓는다.

“왜? 내가 이상하게 보이니? 나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 사실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게 믿어지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나 너 싫어하거든.” 민기는 두 손을 활짝 벌렸다. “좋아. 다 털어놓고 말하지. 나 데모꾼 아니다. 그러나 데모 이력은 나한테 필요해. 미국에서는 그거 아주 좋은 타이틀이 될 수 있거든.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

민기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때, 내 꿈? 하는 듯했다.

휘준은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 솔직함. 대담함. 휘준으로서는 꿈에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이다. 게다가 민기는 머리가 너무 좋은 놈이다. 자신이 휘준에게 털어놓더라도 휘준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혹 경찰에서 민기의 장래 꿈에 대해 알게 된다면 휘준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민기는 마치 신부에게 고백성사라도 하듯이 휘준에게 털어놓았다. 산속에 들어가 바위에 대고 외치는 것보다 더 시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 세상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속이 후련하게. 주변 친구들 모두 휘준이 민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로 인해 휘준은 민기에 대해 더욱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민기는 주변 친구들에게는 자신이 어린 시절 안성에서 보냈다는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기 스스로가 휘준에게 그렇게 밝혔다. 안성 이야기는 곧 부모님 이혼과 연결되기에, 민기는 그러한 사실은 남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만은 어쩌다 이야기 속에 나오긴 했지만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일종의 어린 시절 상처인 셈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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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준은 안성으로 가기로 했다. 민기를 만나기 위해. 그놈을 만나 직접 진실을 물어보고 싶었다. 명단 넘겨준 것이 사실인지. 그리고 그 이유도. 미국 로스쿨을 꿈꾸는 그놈. 사실 한국에서 꼭 법대를 나와야 로스쿨에 가는 것은 아니다. 휘준 주위에서도 여대의 불문과를 나와 로스쿨에 가서 미국 변호사가 된 사람이 있다. 민기는 그보다는 미국 교포사회에서 우리 대학의 법대가 갖고 있는 명성과 파워를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 최고 엘리트 출신의 자부심으로 미국 주류사회나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망. 거기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이력이 붙으면 금상첨화일 테지.

그러나 그의 야망이 자신의 희망대로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휘준이 있는 한. 휘준은 그놈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이름을 덧붙여 주고 싶었다.

다음날 낮에 휘준은 버스를 타고 안성으로 갔다. 민기 어머니는 여중에서 수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안성에는 여중이 둘 있었다. 하나는 남녀공학에서 1972년에 여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민기의 어머니는 그 이전부터 여중 교사였다고 하니 나머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민기의 나이에 대략 여자의 결혼 나이를 합하면 40대 중후반이 될 것이다. 그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으면 민기로 연결될 수 있을 터이다. 40대 중후반, 여교사, 수학 담당.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휘준의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안성시청 건너편에 있는 여자중학교. 겨울방학이라서 그런지 그 주변은 한산했다.

휘준은 공중전화로 가서 114를 통해 학교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학교로 전화했다. 가는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3학년 수학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잠시 후 다른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여보세요?”

좀 전 여자보다 다소 굵은 음성이었다.

휘준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이 민기 어머니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민기 어머니가 3학년 수학을 담당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3학년 수학 선생님이 여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협박범. 음모자.

지금 휘준의 위치는 그런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휘준은 민기 어머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자신과 민기 사이에서 그분이 희생자나 매개자가 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휘준은 그분에게 지금 불편한, 아니 그보다는 불안한 마음을 준 것이다.

나쁜 놈.

휘준은 몸을 돌려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유와 정의. 마치 사치와 위선의 구호 같았다. 지금껏 지켜왔던 가치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비참했다. 이럴 때 조선의 선비들은 어떻게 했을까? 대쪽 같았다던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무너진 순간 무엇을 선택했을까? 적어도 지금 휘준 같은 도피는 아니었을 것이다.

갑자기 제과점 여자가 떠올랐다.

숨이 막힌다.

이대로 그리로 달려가고 싶었다.

버스 운전수를 칼로 위협해서 대전으로 차를 돌리게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그 새벽에 여자와 마주섰던 순간을 재현하고 싶었다. 그날 그 시각에 나누었던 대화를 수정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휘준이 마음으로 그리는 대화로.

여자가 제과점 문을 열고 나온다. 휘준 쪽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휘준도 마주보고 걸어간다. 여자의 얼굴은 역광이어서 잘 보이지 않아야 정상일 테지만 어쩐지 휘준 뒤에서 밝은 가로등이 빛나고 있는 것 같다. 여자의 얼굴이 환히 보인다. 여자가 선다. 휘준도 선다. 여자가 휘준을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이 순간 여자가 무슨 말을 해야 휘준이 그리는 장면에 어울릴까?

아……, 저……, 그…….

휘준은 그 대사를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영화에서 소설에서 TV에서 수도 없이 보고 들은 대사가 있을 텐데 휘준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한 듯 아무런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에 메이고 숨이 막혔다.

아니, 그 대사는 분명 여자가 하는 것일 텐데 왜 휘준이 찾고 있는 거지?

휘준은 혼란스러웠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여자가 제과점 문을 열고 나온다.

여자가 한 발자국 내딛는다.

휘준도 한 발자국 여자 쪽으로 내딛는다.

여자가 걸음을 빨리한다.

휘준도 걸음을 성큼 옮겼다.

휘준의 발이 젖었다. 휘준이 내려다보니 물이 흐르고 있었다. 휘준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물이 제법 많았다. 발목까지 물에 잠겼다.

여자는 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거리면서 계속 다가온다.

휘준은 당황스러워 쩔쩔매고 있었다. 물이 발목을 넘어 정강이까지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쉬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물이 여자의 무릎까지 올라왔다.

휘준은 손을 내밀고 오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여자는 계속 다가왔다.

휘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상태로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휘준은 가만히 있었다.

거칠어졌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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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준은 서울에 올라가 청량리 너머 휘경동 지나 위생병원 쪽으로 가서 여인숙에 들어갔다. 이제 휘준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자유도 사상도 정의도 모두 사라졌다.

여자도.

여자가 없으면 휘준도 없는 것이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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