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러 밤 길 녜 놋 다

by Rudolf


아침에 일찍 일어난 휘준은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이제는 휘준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세상이 다 막혀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사방에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는 듯 숨이 탁탁 막혔다. 어디론가 나가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있다가는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휘준은 기차 안에 앉아서도 계속 심호흡을 했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었으나 규칙적인 기차바퀴 소리보다 자신의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쿵 쾅 쿵 쾅……. 휘준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맥을 짚어보았다. 120번이 넘었다. 1분에. 게다가 가슴 전체를 울리는 듯한 요란한 박동소리. 식은땀도 약간 났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며 미식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귓속에서는 웅웅거리는 날파리 소리…….

호흡이 점차 거칠어져 간다. 식은땀도 나고.

눈을 감았지만 주변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승객도 많지 않은 객실에서 공기가 탁하게 느껴졌다. 숨쉬기가 힘들다.

휘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객차 칸 문을 열고 나갔다. 출입대 계단에 내려가 손잡이를 붙잡고 섰다. 겨울바람이 기차의 속도에 힘입어 세차게 얼굴을 때린다. 얼음 알갱이가 와서 부딪는 것 같았다. 만주벌판 달리는 화객열차가 떠올랐다. 일제 경찰을 피해 연변으로 가는 독립지사. 휘준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러나 어떠랴, 나 혼자 생각인데.

밖에 나오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메슥거리는 것도, 어지러운 것도, 답답한 것도 모두 덜해졌다. 게다가 만주벌판 생각하니 마음도 트이는 것 같았다. 휘준은 손잡이를 꽉 쥐고서 눈을 감았다. 가자. 달려가자. 그 새벽으로. 그 여자와 마주섰던 그 자리로.

휘준은 문득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의 상태는 모습이 아니라 몰골이겠지. 그러자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그 동안 그 여자 앞에 나타날 때마다 자신의 몰골을 보였다는 생각을 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고!

한심한 놈.

- 네 큰 단점이 뭔지 아니?

(환열이 또 트집을 잡았다.)

- 너무 많아서 모르겠다.

- 알긴 아는구나. 그런데 고칠 생각은 없지?

- 뭘 고치냐. 그냥 사는 거지.

- 내가 한 가지 말해 주랴?

- 아이고, 됐네요. 말해 줘봤자 고치지도 못한다. 원래 내 천성이 그래. 그냥 사는 거지 고치긴 뭘 고쳐.

- 그래도 말해 주고 싶은데.

- 나 죽은 뒤에 말해 줘.

그런데 그놈이 먼저 죽었다. 휘준의 단점도 알려주지 않고. 그래서 휘준은 욕을 했다.

내 이 지저분한 몰골도 네 놈 탓이다. 미리 말해 줬으면 고쳤을 거잖아. 나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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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에서 내리자마자 휘준은 근처 목욕탕으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 이게 얼마 만이냐. 온몸의 때도 박박 밀었다. 목욕탕 휴게실에서 이발도 했다. 드라이어로 머리칼 말리고, 손발톱도 다듬고 귀지도 파고 로션도 발랐다. 시커멓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야 좀 폼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옷을 입는 순간, 아차차! 땟국에 젖은 겨울옷. 군복 까맣게 물들인 헐렁한 바지. 낡은 군용 파커. 말이 좋아 앵클부츠지 실은 군용워커 자른 구두. 스웨터도 다 낡고 실밥도 여기저기 터져 있었다. 내복은 지난 12월 말에 입은 뒤 한번도 빨지 않았다. 속옷은 입다 입다 너무 지저분해지면 그대로 버리고 그때서야 새것으로 갈아입곤 했다. 휘준 자신은 몰랐어도 남들에겐 냄새가 났었겠지. 이 생각에 또 한번 얼굴이 화끈거렸다. 메고 다니는 가방 역시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휘준은 대전역 남문시장 뒤편에 있는 도깨비 시장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사서 갈아입었다. 주머니 사정에 맞추려니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신경 썼다. 길거리 상점의 유리창에 비쳐보고서 지금 휘준의 처지에 그 정도면 개천에서 용 난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휘준은 용민중학교에 들러볼까 하는 우쭐한 마음도 들었으나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경찰서에도 가보지 그래?

그런데 한 가지 망설여지는 것이 있었다. 왜 한낮에 제과점에 가려고 하지는 않는 것일까? 때 빼고 광냈으면 한낮이 더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이번에도 휘준은 피식 웃었다. 야행성 동물이 낮에 돌아다니랴. 적어도 제과점 여자에게는 휘준이 야행성이란 말이다. 밤에만 보였으니까. 여기에 또 하나, 떠돌이 도망자에게는 밤의 로맨스가 더 어울린다고. 거기에 안개까지 끼었으면 더 낭만적이고.

그런데……. 없는 돈 들여 기껏 요모조모 잔뜩 치장했는데 꼭 암흑천지나 꼭두새벽에만 가야 하는 걸까?

휘준은 이것저것 생각이 복잡해졌다. 훤한 대낮에 얼굴 마주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걸까? 그 여자야 자기 생활에 충실할 테니 무슨 문제가 있으려나만, 휘준 자신은 도망자 신세여서 여러 모로 주눅이 들어 있는 처지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앞에 나타나서 여러 사람 눈에 띄었다가 자칫 의심이라도 산다면 문제가 커지게 된다. 게다가 오늘밤 자정 가까이 되어서 제과점에 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뒤 어디에서 잔단 말인가?

혹 대승리 마을에 가서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야 하나? 아니, 지난번처럼 아예 월세로 몇 달 지내면 어떨까…….

휘준은 생각이 복잡했다. 대승리에서 월세로 지낸다면 대전에 눌러앉겠다는 이야기다. 일도 해야 한다. 새벽시장에 가면 일하는 데는 문제없겠지만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참으로 답답했다. 자신의 처지가.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돈은 벌어야 하면서도 늘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다니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 미래가 있는 걸까?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도 휘준의 발은 대승리로 계속 향하고 있었다. 아직 해는 많이 남아 있었다. 혹 이 낮에 여자가 제과점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한번도 낮에는 제과점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한낮에 그곳을 지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는 제과점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또다시 휘준의 가슴이 뛰었다. 대승리로 이어지는 한길이 나타나자 호흡까지 가빠졌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휘준은 가끔 길에 지나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무심한 척 터벅터벅 걸어갔다.

제과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모른 척하며 지나갈까? 안은 들여다보지 않고. 사실 빨리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오늘밤 잘 곳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니다. 지난번 묵었던 곳에 다행히 방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한다. 혹 방이 없다면 하룻밤만 묵어가자고 사정하기도 지금으로선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이리저리 머릿속이 복잡한 중에도 벌써 제과점 근처까지 다다랐다. 휘준은 일부러 길 건너편에서 제과점을 멀리 돌아 지나갔다. 의식적으로 그러려니 걸음걸이가 좀 어색해지는 것 같았다. 혹 안에서 여자가 자기를 본 것은 아닐까? 에이, 뭔 상관이야.

가까스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이 쉬어졌다. 마치 저 뒤에서부터 숨을 참고 있었던 느낌이다. 심호흡을 몇 번 하자 답답한 것이 겨우 풀어졌다. 휘준은 뒤돌아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발걸음을 빨리 해서 지난번 묵었던 집으로 향했다.

골목을 세 개 돌고 마지막 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휘준은 멈칫했다. 검은 가죽점퍼와 청회색 공군점퍼를 입은 남자 둘이 휘준이 묵었던 판잣집 쪽문에서 주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휘준은 그대로 골목으로 들어갈 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골목 입구 쪽 한 집의 문이 열려 있어서 휘준은 그 너머로 보게 된 것이다. 휘준은 얼른 몸을 숙이고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는 살그머니 돌아서서 소리를 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누구지? 형사? 알 수 없다. 얼핏 보긴 했지만 남자들은 우악스럽게 생긴 것 같았다. 나이는 적어도 30대 이상은 되었을 것이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휘준이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또한 적어도 뒤를 밟힌 적 없다고 휘준은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훨씬 전에 사달이 났을 것이다. 혹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생겨서 저들이 온 것은 아닐까? 물론 형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모험은 할 수 없다. 어떤 일인지 몰라도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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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준이 제과점까지 나가는 동안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한 여러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다. 휘준은 시내와는 다른 방향, 즉 종점리 쪽으로 몸을 돌려서 성큼성큼, 그러나 도피하는 모양새는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서둘러 걸어갔다. 최대한 평범하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숨이 탁탁 막혔다. 다리는 후들거렸다. 가슴은 물론 마구 방망이질. 머릿속은 뾰족해진 느낌.

휘준은 계속 종점리 방향으로 걸었다. 할 수만 있다면 종점까지 가고 싶었다. 사실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 없다.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듣고 짐작한 바에 따르면 두 정류장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종점까지 가는 데는 작은 시내가 있어서 다리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산비탈에 있다. 어떻든 일단 이 동네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저 사람들이 혹시 대승리 입구에서 종점리까지 올라가며 뒤지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 모두 따질 겨를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종점리에서 더 멀리라도 가야 한다.

휘준은 혹시 버스가 오지 않을까 몇 번 뒤돌아보았다. 버스가 온다면 타고 올라가야 하나? 그리고 만일 종점리에서 내려오는 버스가 있다면 어떻게 할까? 그거 타고 내려갔다가 그 사람들하고 마주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게다가 혹 자신이 지금 공연한 호들갑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겹쳐져서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처음 서울에서 도피할 때보다 더 마음이 급박하고 초조했다.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두어 뼘 남아 있어서 그것도 원망스러웠다. 빨리 해가 넘어가면 논밭이나 숲 사이로 해서 어디론가 숨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의심만 살 뿐이다.

다리가 더욱 후들거려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혹 사람들 마주치면 태연한 척하기 위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다행히 겨울 저녁 무렵 대전 외곽의 빈민촌에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시내로 일을 나간 사람들은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고, 마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웬일인지 휘준으로서는 다행이긴 하지만 밖으로 나올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10여 분 걷자 저 멀리 종점리에서 버스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는 판단을 잘 해야 된다. 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갈지, 아니면 그대로 걸어서 올라가야 할지.

그러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 빨리!

어떻게 할까?

시간이 없어. 어서!

그냥 올라가자!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어. 위쪽이 안전해.

가자! 휘준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더 빨리!

버스가 다가온다. 길에서는 이쪽에서든 건너편에서든 버스정류장 표시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버스는 대승리 입구에서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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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준은 갑자기 버스를 향해 손을 들었다. 마구 손을 흔들며 뛰듯이 길을 건넜다. 운전수가 휘준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휘준은 버스 앞쪽으로 달려들 듯 뛰어갔다. 버스가 급정거한다.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운전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창문을 열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휘준은 차 앞을 지나가며 머리를 숙였다. 차 옆으로 돌아서 문 쪽으로 갔다. 버스 여차장이 마지못해 문을 여는 느낌이 들었다. 휘준은 차에 오르며 고개를 숙이고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해댔다.

버스 안에는 두어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혀를 끌끌 차는 듯한 모습으로 휘준을 바라보았다. 휘준은 그 사람들에게도 머리를 숙였다. 그러면서 공연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다. 버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눈여겨보게 만들었으니.

병신.

휘준은 의자에 앉자마자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쓰고 버스 반대편 창으로 바깥을 살폈다. 길 양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속도를 올리며 대승리로 향하자 갑자기 휘준은 자신이 잘못 판단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 두 사람이 올라탈 것만 같았던 것이다.

아, 실수한 것 같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마음이 절망감에 휩싸였다.

대승리 입구가 저 멀리 보였다. 저곳만 무사히 지나가면 된다. 정류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과점 옆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도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제과점에서 누군가가 나온다. 나이든 아주머니와 어린 남자애. 휘준은 제과점 창 안으로 안을 살폈다. 유리창이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몇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휘준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휘준은 반대편 창 가로 옮겨서 살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버스가 정류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휘준은 목을 길게 빼고 골목을 살폈다. 그러다 갑자기 뒤쪽에 앉은 사람들과 앞쪽의 운전수가 신경 쓰여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휘준은 고개는 움직이지 않은 채 운전수의 백미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을 관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류장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버스가 지나치려는지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래, 좋았어. 빨리빨리. 얼른 지나가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수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휘준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 골목에서 두 사람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까 그 점퍼들. 마구 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모습이 보인다.

안 돼! 지나가! 속도 줄이지 마! 휘준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 순간 휘준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버스가 급정거한 것이다.

휘준은 앞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받치고 몸이 쓰러지는 것을 막은 뒤 저도 모르게 뒤에 앉은 아주머니를 뒤돌아보았다. 아이구 하면서 앞 의자를 붙잡는 것이 보였다. 순간 휘준은 제일 뒤쪽으로 자리를 옮길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앞으로 쏠리며 균형이 맞지 않아 일어설 수 없었다.

버스가 선 뒤 곧바로 문이 열렸다. 잠시 후 두 점퍼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약간 숨이 찬 듯한 모습이다. 먼저 가죽점퍼. 버스 계단으로 올라서며 뒤쪽을 쓰윽 살핀다. 뒤이어 공군점퍼가 운전수에게 인사라도 하듯이 뭐라고 말을 하며 올라온다. 둘은 운전수 쪽 뒤로 세 번째 좌석에 가서 나란히 앉는다. 가죽점퍼는 안쪽으로 쑤욱 들어가면서 그쪽 창 바깥을 내다본다. 공군점퍼는 버스 안을 휘이 한번 훑는 것 같더니 휘준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듯했다.

휘준은 무심한 척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공군점퍼의 눈길이 따갑게 느껴졌다.

무표정. 무심. 무관심.

휘준은 숨도 멈춘 채 창밖만 내다보는 척했다.

공군점퍼가 고개를 돌려 앞쪽을 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 휘준은 계속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들은 누굴까? 겉으로 보기에는 인상이나 풍기는 것이 꼭 형사 같았다. 게다가 하필 휘준이 머물렀던 집에 찾아갔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휘준의 짐작이 맞는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어떻게 그 집을 찾았을까? 휘준 생각에 자신은 아무에게도 그 집을 알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행을 당한 적도 없다고 확신했다.

혹시……, 동네사람 누군가가 신고한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인간이 있다고.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낯선 사람이 늘 밤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나갔으니까. 사람은 살지만 사실 얼굴을 본 사람은 별로 없을 테고, 단지 그런 사람이 잠만 자고 나간다는 말이 퍼져나갔을 수도 있겠지.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간첩이라든지……. 아니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이 사람 저 사람 건너다니다 경찰에 들어갔든지.

그야 어떠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저 점퍼들 시야에서 멀어져야 한다.

제발 먼저 빨리 내려라. 내 맘 좀 편하게. 도무지 마음이 졸려서 살 수가 없잖아.

버스가 대전으로 들어가도 저들은 내릴 기미가 없다. 버스에는 그 동안 계속 여러 사람이 타고 한두 사람인가 내려서 제법 붐비기 시작했다. 어쩌면 적당한 곳에서 사람들 속에 섞여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옳다. 사람들이 여럿 일어설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문에 가서 선 사람도 두엇 있었다. 사람들 틈으로 점퍼들을 엿보니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류장은 무슨 시장 입구인 듯했다.

버스가 섰다. 여러 사람이 문에 몰려 있었다. 휘준은 가만히 일어서서 살그머니 그들 틈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몸도 움츠린 채. 조심조심 버스에서 내렸다. 성공한 것 같았다. 버스가 떠날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버스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시커먼 매연과 함께 코를 찌르는 경유 냄새. 휘준은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점퍼 둘이 눈가에 들어왔다. 휘준과 같은 방향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갑자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내 핸드백!”

한 사람이 휘준 옆으로 후다닥 뛰어가며 가방을 탁 쳤다.

“저놈 잡아!”

날카로운 비명. 휘준의 가방이 땅에 떨어질 뻔하다가 팔에 걸렸다. 가방을 친 사람은 무엇인가를 손에 든 채 사람들을 헤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 순간 또 다른 사람이 휘준 옆으로 달려간다. 가죽점퍼. 그 사람이 휘준의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휘준의 몸이 약간 비틀거리다가 가방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뒤이어 공군점퍼가 휘준 옆으로 달려가다 가방을 피해 건너뛰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달려갔다. 뒤쫓는 것 같았다.

그러나 휘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공군점퍼가 가방을 건너뛰면서 휘준을 돌아다보았던 것이다. 그때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휘준은 묘한 것을 느꼈다. 공군점퍼의 눈빛이 순간 망설이는 듯했었다. 공군점퍼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뛰어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휘준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그 태도에서 휘준은 망설임을 느꼈다. 그러나 공군점퍼는 그대로 앞으로 뛰어갔다.

점퍼에 이어서 나이든 여자가 계속 소리치며 휘준 옆을 지나 달려갔다. 사람들이 죄다 놀라서 여자가 달려가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준 역시 가방을 다시 둘러메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틈으로 공군점퍼가 보였다.

그런데…….

공군점퍼가 멈춰서는 것이 얼핏 보였다. 사람들에게 가려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더니 곧이어 사람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서두르는 것 같았다.

휘준은 곧바로 돌아서서 뛰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도망쳐야 할 차례인 것이다. 몇몇 사람이 놀라서 몸을 비킨다. 휘준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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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뒤쪽에서 한참 떨어진 좁은 골목. 휘준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벽에 기댔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휘준은 골목 입구를 돌아다보며 가슴이 조마조마한 채 10여 분을 보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 점퍼들은 아니다. 휘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러나 저러나 일이 커졌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으니. 저들은 휘준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휘준의 사진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테니. 이제 대전뿐만 아니라 대승리에까지 휘준에 대한 소문은 곧 퍼질 것이다.

그 여자. 이 판국에서도 여자를 떠올리는 휘준은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대승리 다음에 곧바로 생각난 것이 그 여자인 것을 어찌하랴. 아쉬웠다. 이제 다시는 그 여자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을 테니.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휘준은 조심스레 골목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밖에서 기다리다 요놈 하고 잡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몇 사람 지나가기는 했지만 휘준에게 관심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휘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급히 걸었다. 대전역 쪽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갈 작정이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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