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휘준은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여자를 만나야 한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변명을 해야 한다.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자신은 간첩이 아니라고. 사람이라고. 여자에게 가서 자신을 보여주자. 믿지 않으면 옷을 벗고 알몸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가슴을 열어 보여줄 것이다. 거기에선 시뻘건 피밖에 나오지 않으려나? 아무려면 어떤가, 피보다 더한 진실이 있을까. 그래, 그것이 좋겠다. 내 심장, 펄펄 끓는 염통을 꺼내는 것이다. 진실보다는 피가, 피보다는 염통이 더 좋겠지.
휘준은 대전역에서 내리자마자 칼을 샀다. 시퍼런 날이 있는 이따만 한 칼 대신 중자 크기의 과도를. 그것이 가방에 숨기기에 좋다.
휘준은 이번에도 대종로로 들어갔다. 봄빛 찬란한 아름다운 날, 휘준은 이미 모자는 벗어서 대전천에 던져버렸다. 약간 긴 듯한 머리칼에 곱고 따사로운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어서, 마치 여인네의 봄나들이처럼 휘준은 머리칼을 찰랑찰랑 휘날리고 싶었다. 혹은 사자처럼.
나를 보라. 뜨거운 피를 가슴에 움켜쥔 채 사랑을 찾아가는…….
아차, 이쯤에서 스톱. 너무 나대지 말자. 내게는 숨겨진 여인이 있다.
여인? 어쭈. 여자가 아니라 여인이란 말이지? 말을 꺼내고 보니 그것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좀 있어 보이지 않니, 응?
그래, 좋아. 여인.
연인은 아니고? 에이, 그건 좀 심했다. 너무 나갔다고. 여자보다는 여인, 연인보다도 여인. 어쩐지 딱 중간인 것 같았다. 무엇의 중간인지는 모른다. 아니, 중간이든 말든 그게 더 멋져 보인단 말이다.
그런데 여인?
제길,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게다가 여인이라고 하니 굉장히 성숙한 사람 같았다. 적어도 30대 이상. 어쩌면 40대, 아니 50대.
아이고, 그건 아닌데. 그럼 어쩐다?
그래, 다시 여자로 돌아가자. 그 여자가 여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여자면 여자지.
어떻든 이제는 당당하게 대낮에 찾아가는 것이다. 사나이답게.
휘준은 자신이 청춘이 맞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들뜨는 총각. 마음이 두근. 발걸음은 빠르고. 기대감은 하늘에 닿고.
휘준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휘준 옆으로 젊음들이 지나간다. 청춘들이 흩어져 간다. 휘준 앞으로 다가왔다가 두 줄기로 나누어 휘준 옆으로 흘러간다.
휘준은 그들을 보았다. 앞에서 오는 청춘들, 옆으로 지나가는 젊음들, 뒤로 멀어져 가는 선남선녀들.
이들 사이에서, 대종로 한복판에서, 황홀한 봄날 아래에서 젊음을 저버리려는 사내, 그는 누구인가?
눈물을 흘리랴? 흘려주랴?
휘준은 하늘을 보았다. 너무 파랬다. 저렇게 하늘이 파래서 어쩌자는 거지?
내 피는 붉은데 하늘은 파랗다. 무슨 뜻이냐, 저 파란색?
차라리 하늘은 붉은색, 내 피는 파란색,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아니, 내 피가 붉다고? 파랗다고? 누가 봤어? 내 손가락 피는 붉지만, 염통의 피가 꼭 붉다는 보장이 있냐고? 파랗다면 어쩔 거야? 보여줘? 확인시켜 줘? 나도 실은 내 염통의 피가 붉은지 푸른지 모르겠단 말야.
휘준은 가방을 겉에서 더듬었다. 만져진다. 칼이. 시퍼런 날은 아니지만 날카로운 것은 맞다. 그 칼로 염통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게 하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 피의 색깔을.
하늘아, 너는 아니? 내 피의 색깔이 무엇인지?
내 청춘의 색깔이 회색이 아니라 붉거나 푸르다는 것을 아느냐 말이다.
이제 곧 그것을 확인시켜 주마. 절대 회색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휘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니들 피가 무슨 색이든 나는 관심 없어. 내 피 색깔만 여자에게 보여주면 돼. 그러면 여자가 알게 될 거야. 내가 간첩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
휘준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갑자기 의식했다.
사랑일까? 짝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도망자의 사랑?
왜 이리 복잡해?
휘준은 천천히 걸어가며 사랑을 생각했다.
여자를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참으로 싱거웠다. 여자를 몇 번 봤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번?
마주친 전체 시간은? 1분, 1분, 1분, 또 1분, 그리고 또다시 1분, 마지막으로 1분. 모두 6분?
말은 몇 마디 나눈 거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까지는 전혀 말이 없었지. 다섯 번째는 여자만 몇 마디 했고. 여섯 번째, 그때 가장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래 봤자 몇 마디 안 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네, 맞아요. 그게 사랑입니다. 바로 내가 사랑을 했죠. 뜨거운 사랑을. 내 염통 속 피 색깔까지 확인시켜 주고 싶을 만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랍니다.
내 사랑.
휘준은 다시 한번 가방 속의 칼을 더듬어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다리가,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려 발을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휘준은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따스한 봄날 파란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본다. 걱정스러운 눈빛? 수상하다는 표정? 발랄한 대종로 한복판에서 재수 없게?
그 모두가 합해진 사람들 마음이 휘준에게 쏠리고 있었다.
휘준은 간신히 일어섰다. 두 손으로 다리를 받치고. 그러나 당장에라도 염통이 터져나갈 것 같아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폭탄. 핵폭탄!
휘준은 허청허청 걸었다. 흐느적흐느적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사람들 눈길이 줄어들었다.
갑자기 휘준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갈등.
- 네가 보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는 인간 같지?
(휘준이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드물었다.)
(환열이 휘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대답을 한다.)
- 뭐 먹었니?
- 밥.
- 아닌 것 같은데.
- 국도 먹었다.
- 너무 먹었구나.
- …….
- 너는 아무 생각 없는 인간 맞아. 생각하지 마. 지금 뭔가 생각하려는 것 같은데, 너 같은 놈은 생각을 하면 곧바로 사고 치거든.
- …….
- 그냥 멍청하게 살아라, 아가야.
환열의 말이 맞다. 환열은 여자를 생각했다. 그게 잘못이다. 그래서 지금 저지르려는 거다. 일을. 큰일을.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