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안 은 어 듸 두 고

by Rudolf


그렇게 그렇게 해서 휘준은 대종로에서 빠져나가 큰 도로, 작은 도로를 거치고 거쳐서 대전 외곽을 향해 나아갔다. 해가 너무 좋았다.

햇볕은 따사롭고, 햇살은 부드럽고, 햇빛은 환했다.

봄날, 너무도 화사한 날. 염통을 까발리기 딱 좋은 날.

휘준은 걸었다. 느리지만 쉬임없이 걸었다. 이 공기, 언제 다시 마셔 보랴. 내 사랑이 마시는 공기,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을 사랑의 공기.

아, 여자의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으련만.

그래, 이름이 뭐 중요해? 사람이면 되지. 사람이 사랑인 거야.

마음이 아팠다.

가슴이 아렸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좀 싱거웠다. 이럴 때 눈물이라도, 소나기라도 좌악 쏟아져 주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멋져 보이는데. 소낙비 한가운데에서 울부짖는 사내. 사랑에게 염통을 바치는 남자. 아니, 염통을 쪼개어 피의 색깔을 확인시켜 주는 방황하는 영혼.

온 세상 사람들아, 나 휘준이 가고 있다.

나는 사랑에게 염통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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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지나가며 먼지를 일으킨다. 휘준은 어느새 대승리로 향하는 한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못된 것. 이 화창한 봄날을 망치려는 너, 누구냐?

휘준은 팔을 훠이훠이 저으며 버스를 나무랐다.

이 한길을 주욱 걸어가면 제과점이 나온다. 옛날에는 신작로라고 불렀겠지. 처음 이 길이 닦였을 때는 고속도로 같았을 것이다. 태평양처럼 넓어 보였겠지. 이런 길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천국도 지옥도.

지금 휘준은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봄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 한길을 걸어서.

타박타박. 걷고 걷는다.

해는 서쪽으로 4분의 3쯤 기울어져 있었다. 휘준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봄이지만 등에서는 약간 땀이 돋는 듯했다. 이 한길은 수도 없이 걸었던 길이다. 대전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거의 매일 걸었지. 그렇지만 오늘처럼 길고 길었던 적은 없었다. 두 시간 여를 그렇게 걸으면서 힘들긴 했지만 지루하거나 쓸쓸하지는 않았었다.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 다하면서 걷고 걷다 보면 어느새 대승리 입구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휘준은 힘겹게 아주아주 느릿느릿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머릿속은 멍한 채.

아버지 편지. 그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썼다. 회한이나 자부심 그런 감정 없이 차분하게. 누이동생이 죽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을 썼을 때도 격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객관적 슬픔, 그런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절제된 글로 써나갔다. 마치 지금 휘준이 걷고 있는 이 길과 같은 느낌이었다. 길은 중립이다. 감정도 없고 냉정도 없다. 걷는 자가 길의 주인이다. 주인이 슬프면 길도 슬프고, 주인이 뿌듯하면 길도 뿌듯하다.

휘준은 힘겨웠다. 걷기가 힘들었다. 왜 이럴까? 수도 없이 걸었던 이 길. 한밤중 자정이 다 된 캄캄한 길을 두려움도 없이 걸었는데. 억수 같은 비도 맞고, 세찬 바람 몰아칠 때도 걷고, 별빛 오지게 빛날 때도 걸었고, 실망과 낙담으로 온몸이 처질 때도 타박타박 걸었던 길인데. 사실 오늘처럼 대낮에 걸어간 기억은 거의 없다. 무거운 어둠에 눌려서도 잘만 걸었던 이 길. 그러나 지금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렇다고 쉬어가지는 못하겠다. 이 길 끝에서 기다리는 종말이 있기에.

가끔 오가는 시외버스. 지게 지고 소달구지 끌고 가는 농부나 밭일꾼들. 머리에 보따리 이고 잘도 걸어가는 아낙들 등등이 흘끗흘끗 휘준에게 눈을 주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면서. 택시도 가끔 지나갔다. 먼지. 사람은 먼지를 내지 않는다. 달구지도 먼지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네 바퀴 달린 탈것들은 남들은 배려치 않고 누런 먼지폭탄 터뜨리며 달아났다. 느릿느릿 걷는 휘준은 그 먼지 속에서 잠시 실종되었다가 다시 귀환하곤 했다. 휘준이 밤에 걸을 때는 먼지 속이든 어둠 속이든 늘 실종되어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한낮의 실종은 의미가 달랐다. 봄날 대낮의 실종과 귀환의 반복. 그러나 이제 조금만 지나면 실종이든 귀환이든 둘 중 하나만 영원히 지속되리라.

사실 이렇게 한낮에 가면 안 되었다. 지난번에도 해가 있을 때 갔다가 난리가 나지 않았는가 말이다. 또한 지금 그곳에 갔다가 여자가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이 저절로 옮겨지는 것은 또 무슨 조화냐?

휘준은 멈춰섰다.

돌아갔다가 다시 올까?

그러나 갈 곳이 없다.

휘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구나. 역시.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ar)의 《속삭이는 사람들(The Soft Talkers)》. 미국의 대표적인 여류추리작가의 소설. 1957년도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번역되어 나오지 않아서 휘준은 영어 원서로 읽었다.

그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죽기로 결심한 두 사람. 자동차를 몰고 절벽 밖으로 달려간다. 더는 도피할 데가 없으니까.

파란 하늘이 보이는 날은 죽기에 좋은 모양이다.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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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준은 제과점 앞에 섰다. 대승리 입구. 아무렇지도 않았다. 간첩이 나타났는데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 반공방첩. 무찌르자 공산당.

제과점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들어갔다. 휘준의 옆으로 등 뒤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살펴도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있었지만.

지나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본다. 유리창 안에서도 쳐다본다.

휘준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와 휘준에게 다가온다. 주인인 모양이다.

남자는 말은 없이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휘준을 바라본다.

휘준은 대꾸를 해야 할 텐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왔고, 제과점 안에서도 나왔다.

저들 중에 혹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휘준이 묵었던 집 주인이나, 혹 어쩌다 골목에서 한두 번 마주친 사람이라도.

그러면 당장에 신고하겠지.

“저…….”

휘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 여자……, 여기에서 밤에 일하던 여자…….”

마주 선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쳐다보기만 한다. 아니, 이번에는 노려보는 것 같았다.

“자정 근처까지 일하던…….”

“당신 누구야?”

말이 거칠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사람인가 봐……. 어머, 그 애 찾나 보네……. 누구……? 저 위에 사는 애……. 누구? …… 아, 상묘? …… 그 애 박상묘? ……. 왜 여기엘 와서 찾아……? 그 애는 왜 찾는 거야……? 여기에서 밤에 일하잖아……. 이상한 사람 아냐……? 신고해……. 112…….

상묘? 박상묘.

그래, 이름이 상묘구나. 여자 이름. 특이하네.

휘준은 마음이 기뻤다.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큰 소득이 있었다. 보람이 있었다.

여자는 밤에만 일한단다. 그러면 지금은 당연히 여기에 없겠지.

어떻게 하지?

물론 이 시간에 여자가 없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휘준은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바보. 어리석은 놈.

휘준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열었다.

손을 집어넣어 칼을 잡았다.

꺼냈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물러난다.

앞에 서 있던 남자도 뒤로 몇 발자국 옮겼다.

신고해……. 신고해……. 신고해……. 빨리……. 전화…….

휘준은 칼을 자기 발 옆에 내려놓았다.

신고해…….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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