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웠다. 대승리에 가고도 여자를 보지 못한 것이. 휘준은 하역인부 숙소에서 밤이면 그 생각에 괴로웠다. 인부들이 빽빽하게 누워 있는 나무침상 위에서 몸이 노곤한데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며 온갖 공상에 휘감겨 있는 자신이 처량했다. 공상 중 대부분은 그 여자였다.
새벽. 제과점에서 나오는 불빛 외에는 온 세상이 캄캄했던 그 공간…….
여자는 참 용감했다.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나? 몇 번 잠깐씩밖에 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다니. 도망자의 행색이 뭐 그리 번듯하겠는가. 어둡고 초라하고 겁먹은 모습이었을 텐데.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여자. 겉모습은 그보다 어리게 보이지만 대충 그 나이쯤 될 것이다. 체격도 그리 크지 않고 마음도 여린 것 같았다. 역광이라서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표정은 꽤 진지했던 것 같았다. 겁먹었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휘준이 다시 찾아가면 어떤 표정으로 맞아줄까? 휘준을 기억할까? 혹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까? 쫓기는 자. 긍정적으로 생각해 줄까, 아니면 불순분자로? 혹 시국사건에 관련되었다면 좋게 생각해 주지 않을까? 그러나 경찰에서야 당연히 위험인물로 인식시켜 주었겠지. 혹 간첩? 그렇다면 휘준을 신고해서 포상금 타려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경찰에서는 주민들에게 그렇게 알리는 것이 체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하지.
휘준은 낙망했다. 여자가 자신을 간첩으로 여긴다?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여자는 그날 새벽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 것인지 알게 되고 소름이 돋겠지. 휘준과 마주쳤던 일들을 악몽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여자의 뇌리에 휘준이 뿔 달린 악마로 각인되겠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을까, 그 사실을 알고서? 이미 소문은 그 근처에 다 퍼졌을 것이다. 집주인도 그 방에 소금을 뿌리고 고수레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안 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여자, 그 여자가 자신을 저주하는 장면이 휘준을 몹시 괴롭게 했다. 여자가 휘준을 떠올리며 소름 돋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그 새벽의 기억에 고개를 흔드는 모습.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실제의 상황이다. 여자가 휘준을 만났던 것을 자기 일생 최대의 악몽이라고 생각하며 평생 몸서리 칠 것을 생각하니 휘준은 토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안 돼. 안 된단 말야. 제발, 제발…….
휘준은 여자한테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알려야 한다. 여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상관없다. 단지 휘준의 올바른 모습만은 알려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러지로 여긴다 해도 여자에게만은 그런 대접 받고 싶지 않았다.
이것 봐요, 여자 씨, 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절대, 절대 아니라고요! 날 믿어줘요…….
휘준은 똑바로 천장을 향해 누운 자세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숨이 막혀 헉헉거렸다.
3월이다. 새 학기가 시작된다. 지난해 늦봄 문리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동료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도피한 뒤 1년이 다 되어간다. 여기저기 버려진 신문을 통해, 귀동냥 눈동냥으로 들은 라디오나 TV를 통해, 그리고 사람들 소문을 통해 시국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승리 그곳에서 탈출한 뒤 어느 누구하고도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다. 아버지, 동료들, 학교 친구들 모두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저들도 나에 대해 모르겠지. 혹 아버지는 얼마 전 휘준이 대전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벌써 그곳을 떠났을 거라고 여겼을 테니.
불효자.
그 말이 맞다. 휘준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그 편지를 받은 뒤에도 아버지 걱정은 물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도피 전부터도 그랬었지만.
지금 아버지는 어떻게 지낼까? 강릉으로 간 뒤 다른 변동은 없었을까?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전화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강릉경찰서. 강릉. 그곳에는 친구들과 한번 가본 적 있다. 그 기억은 가끔 난다. 그러나 강릉에 있는 아버지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볼까, 강릉에 가서?
마지막이라니? 뭐가 마지막인데?
휘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휘준아, 지금 뭐하는 거냐고?
여자, 그 여자가 생각났다.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라도…….
그런데 또 마지막?
뭐야,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뭐냔 말이야……?
갑자기 휘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 생각에, 여자 생각에.
인부숙소의 밤은 휘준의 마음을 너무 괴롭게 한다. 낮에는 육신을 괴롭게 하고.
그런데도 이 괴로움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 인부숙소에서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고향도 출신도 나이도 과거도 미래도 국적도 묻지 않는다. 떠나도 괜찮고 들어와도, 다시 와도 묻지 않는다. 하루 일하고 하루 돈 받고 하루 잠자면 그만이다. 삼시세끼 주고 똥 싸게 해주고 샤워하게 해준다. 그뿐. 희한하게 경찰도 이곳에는 오지 않는다. 제3지대. 아니, 그보다는 무인지대가 맞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다. 이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곳을 떠날 때 비로소 이들에게 과거가 있고 전과가 있고 도피해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이들은 서로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로가 피한다. 묻지도,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낮에는 짐을 지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밤에는 코를 골면 된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잠 못 자고 가슴앓이를 하는 청년. 인부숙소 바깥세상에 미련이 너무 많은 젊은이. 못난이.
편지를 쓸까……?
아버님 전상서.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 말고. 아버지……, 불효자는 웁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소자를 용서…….
휘준은 편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마음으로 쓴 편지를 환상의 손이 마구마구 찢어발긴다.
휘준은 한밤중 여기저기에서 코 고는 암흑의 허공으로 손을 들어 편지 조각들을 날려버렸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