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라도 물어볼걸.
휘준은 가슴이 아렸다. 그 새벽의 장면이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휘준은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면서 줄곧 그 새벽을 생각하고 있었다.
키는 웬만했지만 몸은 마른 편이었던 휘준은 가까스로 하역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일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어느 정도 요령도 생기고 주변에서 도와주기도 해서 벌써 한 달째나 잘 버티고 있었다. 겨울 들어 바닷바람이 매서웠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땀에 흠뻑 젖어 추위도 있게 된다.
낮의 힘든 일이 끝나고 나면 가지게 되기 마련인 술자리에 휘준은 끼어들지 않았다. 원래가 술 체질이 아니어서 마시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낮의 일들이 힘에 부쳐 차라리 인부숙소에 가서 드러누워 쉬거나 잠자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휘준의 몸으로는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다. 사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지나면 이 짓도 끝내자고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마침 새해가 일주일 남짓 남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잘 버텨보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부산의 부두에는 눈 대신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계절이어서 여기저기에서 캐럴송이 울리고 있다.
휘준 혼자서 아무도 없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땀에 흠뻑 젖은 윗도리를 모두 벗으니 한기가 확 몰려왔다. 큼직한 석탄난로가 숙소 한복판에 있기는 했지만 사람이 없어서 화력을 높여 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휘준은 샤워장으로 곧장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아, 살 것 같았다.
뜨거운 물 아래에서 휘준은 그 여자를 생각했다. 왜 그 새벽에 그곳까지 나왔을까? 제과점에서 자기 할 일만 하고 휘준을 모른 척했다면 지금 휘준의 마음이 이렇게 아플 리 없었을 것이다. 그날 대승리를 떠나온 이후 한 시도 그 새벽의 장면을 잊은 적이 없다. 그것 때문에 휘준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다. 그 장면으로부터 상상과 공상과 헛꿈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상상은 달콤했지만 그 끝은 허망으로 이어졌다.
괴로웠다. 괴로웠다. 괴로웠다.
오오 고독이여
그대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
O Einsamkeit!
Du meine Heimat Einsamkeit!
허망은 그 여인이 등장하기 전에는 고고한 가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오직 괴로움, 그 한 단어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밥을 먹어도, 길을 가도, 짐을 날라도, 남들이 말을 붙여도, 밤에도, 낮에도 늘상 그 새벽의 장면이 휘준을 괴롭혔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부터 시작된 그 괴로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갔다. 이에 더해서 휘준의 공상은 끝없이 이어졌다. 매번 다른 형식으로 바뀌면서. 밥을 먹을 때는 그 여자가 옆에 앉아 있었고, 길을 갈 때는 옆에서 동행했으며, 짐을 나를 때는 함께 지고 갔으며, 남들이 말을 붙일 때는 여자가 대신 대답했고, 밤이면 베개 옆에 여자가 누웠으며, 낮에는 여자가 미소 지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꿈에는 여자가 없었다. 휘준 혼자 온갖 곳 헤매며 찾아다닐 뿐이었다. 골목으로, 부두로, 도시로, 대승리로, 부산행 열차 안으로…….
휘준은 서울의 성진에게는 일부러 전화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전 친구에게 몇 번 시외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곧 생각이 달라졌다. 혹 휘준을 위해서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그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분간 전화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여자 생각을 했다.
생각, 생각, 생각…….
휘준은 부두에서 뛰쳐나가 대전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대전역에서 내리자마자 버스를 탔다. 한 번 갈아탔다. 제과점 앞에서 내렸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유리창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있었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없었다. 당황해서 다시 나왔다. 한길 한복판에서 여자가 저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휘준이 서 있었던 방향을 향해서. 휘준은 달려갔다. 여자 옆을 지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다. 여자에게서 네 걸음 떨어진 곳으로. 휘준은 그 거리를 정확히 재기 위해 자신의 발걸음으로 한 발 두 발 천천히 걸어서 그 위치로 갔다. 그리고 돌아섰다. 여자가 없어졌다. 안 돼…….
휘준은 머리를 감싸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겨울 부두에서. 휘준은 어느 새 숙소 바깥으로 나와 어두운 부두에 혼자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 병신아, 뭐하는 짓이냐? 너 내가 없다고 네 마음대로 울고 주저앉고 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만족하는 거니?
- 꺼져줄래? 연애도 못 해본 놈이 내 마음 어떻게 알아?
- 어쭈? 내가 고시에 합격해 봐라. 줄줄이 따라붙는다. 내가 연애 안 해도 돼. 여자들이 연애하자고 난리날걸. 너는 외무고사 합격해도 아프리카에나 나갈 것이니 어느 여자가 좋다고 하겠니? 콩고에 가서 연애나 해.
- 입만 살아서 떠드는 놈. 죽지나 말지.
아냐, 환열아, 이 말은 내가 심했다. 미안. 용서해라.
새해 들어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온 세상이 얼어붙었다. 10년 만에 금정산 옆의 논바닥에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휘준은 부두에서 나와 금정산 근처 여인숙에 머물고 있었다.
휘준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바닥에 놓았다. 동전까지 포함해서. 그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숙비, 식비, 교통비, 기타 등등. 3개월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엔……?
이 동네에 살면서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휘준은 생각했다. 혹 아이들 과외를 할 수 있을까? 영어만이라도. 그러다가 누가 신고하면? 대전에 있을 때는 친구의 도움으로 용민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친구 외사촌형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자신을 보증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 동네에서 오래 지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떠돌이처럼 며칠 정도야 묵어갈 수는 있겠지만. 절이나 수도원에 간다면 어떨까? 사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떠도는 말로는 휘준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그런 데라고도 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그런 데야말로 경찰이 가장 먼저 의심하는 곳이 아닐까.
휘준은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부두에 다시 가서 일하다 보면 무슨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처음에 부두에 가서 일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섣불리 묻거나 말하다가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다 싶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시 대전으로 갈까? 대승리, 그곳은 아무도 모른다. 용민중학교에다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숙한다고 말해 두었다. 그래서 걸어서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휘준은 괜히 대승리에서 떠난 것인가 하고 후회하는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사실 누군가가 미행하지 않는다면 대승리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대승리 그 월세 집이 가장 안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동네사람들과도 거의 마주치지 않아서 자신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지금도 그 방이 비어 있을까? 그 집이 아니라도 그 동네에서는 빈방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곳에는…….
휘준은 새벽에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 하룻밤 자고 버스로 영동으로 갔다. 그리고 또다시 시외버스로 대전 동쪽에 떨어져 있는 옥천으로 올라갔다.
옥천역 근처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자 밤 9시 가까이 되었다. 중앙로를 통해 옥천역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금구천에 가로놓인 옥천교를 넘자 곧바로 경찰서가 나왔다. 그 정문 좀 떨어진 곳에 서서 휘준은 경찰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 잡아가라 하고 속으로 외쳤다. 생각 같아서는 마음껏 소리 지르고 나서 잡혀가든가 도망가든가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웃기는 짓이라 마음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날이 추운데도 길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시골동네 치고는 제법 가게도 많았고 거리는 활달해 보였다. 여기저기 상점에서 비춰 나오는 불빛으로 길은 환했다.
옥천제일제과점.
휘준은 걸음을 멈췄다.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러 사람이 앉아 있기도 하고 빵도 고르기도 하며 그 안은 활달해 보였다. 휘준 옆으로 한 사람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서는 학생들이 생일케이크 같은 것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휘준은 제과점 여점원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주인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손님에게서 돈을 받고 거스름을 주는 것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님 같았다.
갑자기 실망스러웠다. 그 여자가 저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고 휘준은 안을 계속 들여다보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 여자를 찾았다.
안에서 앉아 있던 나이든 여자 손님이 의자에서 일어나다 밖을 내다보면서 휘준과 눈이 마주쳤다. 휘준은 움찔하고는 눈을 돌리고서 창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가던 방향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괜스레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다음날 아침 여인숙에서 일어난 휘준은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대승리 그 차고 눅눅한 방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부산일 테지.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것도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
눈을 감고 휘준은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러나 곧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럼 어젯밤에 무엇을 했었지? 어디에 갔었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워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휘준이 그대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기다리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이 옥천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휘준은 눈을 감은 채 대전까지 기차를 타고 갈까, 버스로 갈까 생각했다. 옥천에서 대전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여인숙에서 늑장을 부린다 해도 대전역까지 오전 내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밖에 나가 밥부터 먹고 보자. 아침밥을 자주 거르는 휘준에게는 뜻밖의 생각이었다. 왜 밥 생각부터 먼저 했을까? 휘준 자신도 의아하게 여겨졌다.
여인숙에서 밖으로 나온 휘준은 근처에 밥집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식당이 몇 있기는 했지만 문이 닫혀 있기도 하고, 하루 장사를 준비하는지 문 입구에 여러 물품이 쌓여 있기도 했다. 실망스러웠다. 옥천역 쪽으로 잠시 걸음을 옮기는데 어젯밤 보았던 제과점이 눈에 들어왔다. 휘준은 가까이 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주인인 듯한, 그러나 어젯밤에 본 나이든 남자는 아니고 그 정도 연배의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신기했다. 그 여자가 아니라도 아무도 없는 제과점 안에서 저렇게 다른 사람이 정리를 하는구나. 휘준은 혹 아주머니가 돌아다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휘준을 돌아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휘준은 얼른 창에서 떨어져 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에 내린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갈까, 아니면 역으로 가볼까 망설이면서 터벅터벅 걸었다. 갑자기 아침밥 먹을 마음이 사라졌다. 차라리 조금 전 그 제과점으로 돌아가서 빵이나 몇 개 사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혹 문을 연 다른 제과점은 없나 하며 길 양쪽을 살폈다.
대전역에서 기차에서 내린 휘준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곳저곳을 너무 티 나게 돌아다보면 그것도 남의 눈에 띌 것 같아 목은 꼿꼿이 세운 채 눈만 돌렸다. 역 앞 여기저기에는 틀림없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휘준뿐만 아니라 경찰에서는 찾아야 할 사람이 여럿 있을 테지. 그러나 다른 인간을 찾다가 휘준이 걸리면 그것보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을 터였다.
휘준의 현재 모습은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허름한 총각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도 처음 서울에서 도피할 때와는 천양지차인 느낌이다. 겁먹고 못 배운 가난뱅이 행색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못 배웠다는 것만 빼면 실제로 현재 휘준의 모습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것이리라. 하나 덧붙인다면 힘겨운 삶에 지친 모습이겠지.
휘준은 대전역에서 곧장 앞으로 걸어가 대전천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 대종로로 들어갔다. 번잡했다. 한겨울이지만 선남선녀의 젊음들이 도로를 꽉 메우고 시끌벅적 활기 넘치게 몰려다니고 있었다. 휘준은 그들 사이에서 촌뜨기가 되어 어리벙벙한 채 지나는 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또한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을까……?
둘 다 불가능하다고 휘준은 생각했다.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는 저들과 같이 될 수 없다.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없고. 채 1년도 안 된 기간에 휘준과 저 젊은이들은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처럼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떠올랐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 . .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그래, 대한민국 이 땅은 이제 나에게는 남의 나라가 되었구나. 선각자 시인에게도 당시의 현실이 남의 나라였던 것처럼 휘준은 자신이 이제 이 땅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슴 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방인은 아무런 책무도 지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그저 훌쩍 떠나면 그뿐, 기억할 일도 기억 받을 일도 없는 것이다.
휘준은 자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방인.
역외자.
그림자.
더 나아가 투명인.
대종로 젊은이들이 자신의 주위로 무심히 흘러갈 때 휘준은 비로소 자신이 해방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자신은 저들에게 빚이 없고, 저들도 나에게 부채가 없다. 젊음을 공유하거나 나눌 이유도 사라졌다.
휘준은 한민족에서 이탈된 소외감을 느끼며 대종로를 걸었다. 그러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당당하게. 화끈하게. 아차, 화끈은 안 된다. 아직은 정체(?)을 드러낼 수 없다. 그리하여 대종로 젊음은 1월의 추위를 녹이고 있지만 휘준은 또다시 스스로를 얼어붙게 해야 했다.
휘준은 계속 걸었다. 대종로 끝까지. 젊음들 사이로. 사실 휘준은 서러웠다. 동시대 젊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국가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젊음에서 버림받은 자신이. 그렇다고 울 수도 없다. 지금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나타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이 거리를 다 지나기까지는. 그 다음 휘준은 또 다른 형태로 버림받기 위해 나아가리라. 그 여자에게서.
휘준은 그대로 계속 걸었다. 대전 외곽지역을 향해서. 이 길은 휘준이 늘 걸었던 그 밤길은 아니다. 오늘은 일부러 젊음의 영토를 가로질러 왔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소속감을 주려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이방인 것을 확인하고 말았다.
- 너는 왜 늘 외톨이 연습을 하는 거냐?
- 남이야.
- 그런 건 취미도 특기도 아니다. 애들한테는 안 어울려요.
- 냅둬.
- 에비! 어디 고추 좀 볼까?
그 녀석. 애어른 같았지. 환열 말이다. 제 아버지가 직업 없이 떠도는 바람에, 민주당 정부 때 한 자리 얻을까 하고 그쪽에 기웃거렸던 것이 족쇄로 남아 쿠데타 일어나고 정권 바뀐 뒤에는 변변한 직업 하나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복덕방이나 건축업자들 쫓아다니며 용돈 좀 벌었다고 하는데, 신세한탄하면서 술로 탕진해서 환열은 힘겹게 학교에 다녔다. 고3 내내 옆자리에 붙어앉아 있었기 때문에 휘준은 그 사정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머리 좋고 생활력 강해 중학생들 과외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대학도 멋지게 한번에 철썩 붙었지. 그리고 사실 휘준이 옆에서 요모조모 도와주기도 했다. 참고서나 문제집은 항상 두 권을 사서 나눠주었으니까. 그때마다 환열은 미안하다 고맙다 아무런 표현 없이 그저 묵묵히 받기만 했다.
대승리 가는 길에 포장도로가 끝나고 맨땅이 나왔다. 한길. 그러나 진흙길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다소 멀리 돌아왔지만 이내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어지럽던 마음이 잦아들었다. 솔잎을 찾은 송충이. 피식 웃었다.
- 사실 나는 잉여인간이다. 인간사회에서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야.
- 갑자기 뭔 말이야? 너답지 않잖아. 차라리 날 구박해라. 그게 네 모습이잖아.
- 나, 실은 약한 사람이다. 너 놀리는 재미로 살기는 하지만, 그 재미 말고는 낙이 없어.
- 가자. 내가 한잔 살게.
- 병신, 술 한 잔 못하면서.
- 오늘은 내가 마셔줄게. 나도 하고 싶은 말 많다.
- 아냐, 가야 돼. 과외 하나 더 맡았거든.
- 고민 있냐?
- 고민은……. 맨날 그렇고 그런 거지. 사실 요즘 왠지 모르게 불길한단 말야.
이 말이 마지막이었다. 환열은 그날 밤 정보과 형사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날벼락처럼 날아든 죽었다는 소식.
그 뒤 휘준은 악다구니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겁할 정도로. 겁 많은 범생이가 악질이 된 것이다.
저 멀리가 대승리 입구다. 휘준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대승리에서 나갈 때는 짐이 세 개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다. 휘준은 다 버렸다. 미련을 두던 모든 것 죄다 버렸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외에 속옷 몇 벌. 그것으로 끝이다. 책도 버렸으며, 자잘한 감상을 적던 노트도 버렸고, 여벌의 운동화도 버렸고, 서울에서부터 아끼고 가지고 온 자신만의 추억거리들도 버렸다.
이제 휘준은 여행객이 아니다. 도피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수많은 젊은이 중 하나일 뿐이다. 집에서 잠시 나와 어디엔가 다녀오는 청년. 더벅머리 지저분한 길거리 방랑자.
휘준은 제과점을 겨냥하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갑자기 휘준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이쯤에서는 가슴이 설레야 하지 않은가? 마구 방망이질 쳐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게다가 그 여자를 떠올리며 가슴 아려하던 그 감상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 방망이질 치는 가슴과 아련한 아픔은 동일체여서 그 둘 중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도 소실되는 것일까? 신기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나, 그러나 더는 갈 수가 없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다간 가슴이 다시 방망이질 칠 것 같았다. 그러면 휘준은 감당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발은 나아가려 한다. 두 다리가 마음을 반역하려 한다.
유행가 가사인 듯, 어느 소설이나 시에서 따온 듯 ‘못 잊어 왔네’라는 구절이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 구절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넣으려 휘준은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망설임과 자학과 자조.
헛웃음.
의지와 충동의 싸움.
잠시의 갈등.
결국 성공했다.
의지가 마음을 이긴 것이다.
휘준은 발걸음을 돌렸다.
서글픈 승리.
자축하지도 못하고 휘준은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