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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이 Sep 12. 2020

김밥 싸는 여자

인생에 엉뚱한 정류장이란 없는 법

출근(등원) 부담 없는 주말 아침이면,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당근을 썰어 볶고, 계란을 깨트려 부치고, 참치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놓는 등 속재료를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을 마치고 쿠쿠가 취사를 완료할 때까지 잠시 숨을 고른다. 마른 김에 밥을 펴고 오색의 재료를 채워 틈 없이 돌돌 말아주면 마침내 우리 집의 소울푸드 김밥이 완성된다. 손이 많이 가기로 정평이 나있는, 그래서 워킹맘인 내게 주중 아침엔 꿈도 못 꿀 이 음식은 주말에만 부려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여유를 상징하기도 한다.  


몇 주 전 주말, 아들 녀석에게 아침은 뭐 해줄까 하고 물었더니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김밥'이라는 답이 나왔다. 좋아하는 만화영화 주인공이 김밥을 먹는 장면이 나왔단다. 뜬금없는 (그러나 매우 귀여운) 그의 대답에 신이 나서 말아주니 금세 그릇을 비워냈다. 그 맛이 꽤나 좋았는지 그 후에도 같은 물음이 이어질 때마다, 녀석은 마치 생각하는냥 "어.. 음.. 오늘은.."으로 말끝을 흐리다 항상"김! 밥!"이라 힘주어 외쳤고, 그렇게 김밥은 어느새 우리 집 공식 주말 메뉴로 아침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명한 색감으로, 고소한 냄새로 오감을 자극하는 귀여운 김밥들


주방에 난 작은 창으로 투둑 투둑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김밥을 싸는 여유를 부려본다. 내가 바삐 준비하는 동안 아들 못지않게 김밥광인 남편이 기대감에 반쯤 찬 채 거실에서 아이와 열의 있게 놀아주는 모습이 보인다. 주방에서 부자지간의 흐뭇한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거실과의 물리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떨어진 공간에서 그들을 관망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괜스레 홀로 있는 듯한 외로움이 느껴져 별다방에서나 흐를듯한 재즈음악으로 주방을 채워본다.




문득, 그들의 모습 보고있는것만으로 벅차게 행복한 내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하게 느껴지며, "인생의 버스는 항상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라는 김영하 작가님 소설의 구절이 떠올랐다. 엉뚱한 버스 정류장에 내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승객처럼 내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시간의 틈이 벌어진다. 내가 단란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라니?!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아들과 남편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꽉 찬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의 모습을, 과거의 나는 단 한번도 상상한 적이 없다.  


친정엄마는 늘 내가 커리어 우먼이 되길 바랐다. 공장 가서 돈 벌어야지 어디 공부를 하고 있냐며 엄마를 나무랐던 외할머니는 엄마의 대학시험날 홀라당 미끄러지라는 의미로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한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바람과 달리 엄마는 국립대 교대에 입학해 선생님이 되었다. 작게나마 꿈을 이뤘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아빠를 만났고 엄마는 곧이어 결혼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두 아이의 엄마로, 선생님으로 2,30대를 친구도 없이 바쁘게 보낸 엄마는 늘 제약적 조건들로 본인의 역량과 잠재력을 다 펼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셨다.  


엄마는 부디 내 딸만큼은 가난/결혼/자녀 등 컨트롤 불가한 제약조건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본인을 위한, 본인에 의한,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달리는 삶을 살길 바라셨고, 무엇이든 곧잘 해내던 내게 기대를 걸었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시고 스스로 식견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부모님 덕에 내 유년기는 다채로운 추억들로 가득했고, 그 추억을 자양분 삼아 힘든 수험생활을 견딘 덕분에 나는 '좋은 대학'이라 불리는 곳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꼭 엄마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도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 평범한 삶보단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일을 하는 내 모습이 더 어울리며 가치 있다 생각했다.


내 가치관을 흔든 첫 번째 변곡점은 원하던 기업에서 인턴을 하면서였다. 내가 인턴으로 근무했던 곳은 한때 내 꿈의 직장이기도 하다. 수출을 진작시키고 해외 투자유치 등이 원활할 수 있게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기업이었는데, 한국과 세계 곳곳의 무역관을 오가며 우리나라 기업을 돕는 역할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매력적인 직장은 일가정 양립을 달성하기 매우 어렵다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롤모델로 삼고 싶을 만큼 멋진 여 대리님들조차 가정과 회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원하는 것이 오로지 일에 있어서의 성취감과 커리어뿐인 건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 자주 돌아보게 되었다.


두 번째 변곡점은 핀란드에서 해외인턴을 하며 맞았다. 일은 기대만큼이나 재밌었지만, 타국 생활은 내가 꿈꾸던 것만큼 멋있지만은 않았다. 이국적 분위기에 취해 스스로를 꽤나 멋있다고 착각하며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던 날들은 한 달을 채 못 갔고, 타국 생활은 곧 현실이 되었다. 일의 강도가 세질수록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가족의 품이 있다면 좋겠다고 갈망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새벽까지 해가 지지 않는 핀란드 백야를 즐기기는커녕 흔들리는 가치들과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으로 하얗게 보내며 나라는 사람은 일에서의 성취감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의 인턴 후 내 삶의 가치는 재편되었고, 나는 일가정 양립이라는 목표가 달성 가능한 직장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언젠간 가정을 내가 이룬다면, 이런 사람이 내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라던 품성을 갖춘, 내가 존경할만한 점이 차고 넘치는 남자를 만났고 나는 확신에 차 결혼했다. 곧이어 공기업 지방이주 정책에 따라 우리는 오랜 수도권 생활을 접고 지방의 도시로 이전했고, 나는 지금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서 아이를 기르며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일구고 있다.


엉뚱한 정류장에 내렸다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정확히 내가 와야 할 곳에 서있는 기분이다. 나는 지금 커리어 우먼도, 현모양처도, 이도저도 아닌 그저 주말에만 김밥을 쌀 여유를 가진 워킹맘으로 살고 있지만 삶의 그 어느 순간보다 꽉 찬 행복을 마음 깊이 느낀다. 아이에게 인생을 휘둘리며 사는 것보다 더 불행한 건 없다고 생각했던 대학생 때의 나와 아이가 주는 기쁨보다 세상에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는 지금의 나는 동일 인물이기도,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앞으로 내 인생의 버스가 나를 어디에 떨굴지, 또는 내가 버스를 어느 방향으로 몰아갈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내 삶의 누구보다도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나를 응원할 것이다. 가지 않은 길 보단, 내가 택한 길에 늘 더 큰 가치를 부여하며. 오늘도 열심히 김밥을 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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