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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Oct 13. 2023

#4 남자의 첫 필라테스

<남자가 필라테스해도 되나요?>



필라테스 체험을 예약전화를 걸고 일주일. 드디어 체험일 당일이다.

한주 동안 온갖 유튜브를 찾아보며 필라테스에 대한 관심도는 끝없이 올라간 상태였다. 하루종일 최애 가수의 콘서트에 가는 것처럼 설렘과 기대로 흥분됐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유로 흥분된 상태였다. 체험수업이라 시간을 지정할 수 없었던 탓에 수업시간이 너무 타이트하게 잡혔다. 퇴근시간 땡 하자마자 뛰쳐나왔지만 지하철은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 다음열차엔 사람이 한가득! 실례스럽지만 불도저처럼 밀어부처 겨우 탑승에 성공했다.

시간은 여전히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결국 5분 정도 늦었다. 첫 방문부터...

센터문을 열자 이미 다른 사람들은 운동 중이었다.


"저... 오늘 체험수업 하러 왔는데요."

"어서 오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유가입니다."(실명이 아닙니다.)

"네. 짐은 이 안에 두시고 옷 갈아입으실 거면 환복하고 나오세요."

"네에."


카운터 직원을 따라 강사분들의 외투를 보관하는 한 평쯤 되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사실상 창고였다. 남자 수강생을 받는다고 해서(그룹수업말이다) 남자회원에 대한 시스템이 구축된 건 아니었다. 회원 성비율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기에 인테리어/공간 투자에 있어서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괜히 씁쓸한 건 개인적인 감상이다.)


신나게 주문했던 운동복이 아직 배송 전이었기에 대충 집에서 챙겨 온 트레이닝복으로 환복을 하고 자연스럽게 빈자리를 차지했다. 앞쪽 벽 전체가 유리로 돼있었는데 아무도 내게 눈빛을 주지 않았다. 옆에서 깔짝대면 쳐다볼 법도 한데 다들 집중력이 대단했다.

그중에는 또 다른 남자 회원이 한 명 더 있었다. 남자가 필라테스를 하면 여성회원이 불편해한다던데 아닌 모양이다. 현실은 냉혹한 무관심... 차라리 다행이다.




강사님과는 거울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특별히 소개나 말을 걸진 않아서 눈치껏 동작을 따라 했다.

스프링이 달린 사다리 같은 기구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기구 이름이 뭔지, 이게 어디에 운동이 되는지 따로 설명이 없었다. 내가 무료체험이라서 그런 건 아니겠지...?(단체수업이라 진행을 끊을 수 없는 거다!)


"골반은 말아주시고~ 복부 당겨주시고~ 팔 당기면서 상체 오른쪽으로 트세요. 골반은 돌아가면 안 돼요~ 배에 힘 안 풀리게 복근 잡아주시고~ 상체 눕지 마세요. 몸통 일자!  골반 정렬! 등 굽습니다~ 팔은 최대한 당길 수 있을 때까지~ 골반 고정~ 상체..."


와... 이렇게까지 엉망일 수 있나? 자세를 지적하는 강사님의 프리스타일 랩이 내 온몸을 쥐어짰다.

지금껏 수십 년을 사용해 온 육신인데 통제가 안 됐다. 수치와 분노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다들 비슷하다. 정상적인 몸뚱이는 하나도 없어 보인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찝찝한 위안을 느끼며 다시 한번 온몸을 쥐어짰다.


몇 회 반복 후 동작이 바뀌었다. 방근 점의 동장에서 하나 더 추가된 동작. 한 발로 서서 다른 발을 구부리고 몸은 돌리고 스프링을 당기고... 한마디로 좀 더 기괴하게 변했다.


중심 잡기가 어렵고 다리 떨림이 끊이질 않았다.

지진인가? 그래 지진이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지구 탓이야. 그게 아니라면 이 기구에 진동 기능이 탑재된 거다.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삐걱대지만 나처럼 격동의 춤사위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창피해 죽겠다'라는 말이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코어힘이 없어서 그래요. 꾸준히 하신다면 훨씬 편해지실 거예요."


위로 안 되는 위로다. 낯선 자세로 고문받는 육체가 찢어질 것 같았다. 정석적인 자세가 아니라 대충 흉내만 내는데도 자극이 많이 됐다. 오히려 몸이 굳었기 때문일까? '진짜 이 몸으로 살려면 계속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도 짧은 한 시간이 지나갔다. 죽겠는데 개운한 상반된 느낌이 들어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잠시만 이쪽으로 와주세요."

강사님이 나를 호출했다.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내용상 별다를 건 없었다. 같은 지역에서 가격차이는 총금액에서 몇 만 원 정도 차이였다. 오히려 여러 지점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가격이 좀 더 저렴했다. 카드 제휴의 프로모션도 프랜차이즈의 이점이었다.(업체/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1:6 남녀 혼성 그룹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라테스는 기간으로 등록하는 헬스장과 달리 횟수로 등록하는 방식이다.(PT수업과 같다.) 보통 20~회 정도면 주 2회씩 3개월이 된다. 자주 나오면 주 3회씩도 하는데(1~2달 소요) 주 2회씩 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여러 횟수 금액을 비교하며 가장 가성비가 좋은 횟수로 정했다. 가성비는 좋지만 카드를 내미는 손이 떨렸다. 힘들어서... 운동이 힘들어서 그런 거야...


어쨌건 이제부터 3개월간 내 육체가 조져지기로 했다.






센터 건물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상쾌했다.

운동 중엔 집까지 어떻게 가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몸이 안 아팠다.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 들어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이 아깝게 느껴졌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하루를 가뿐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겁게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 들었다. 포클레인으로 등을 한 삽 퍼간 것처럼 거추장스러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 구석구석에 새겨졌던 뻐근함이 모두 사라졌다. 아니. 평소에 불편한 부분은 없었는데 몸이 개운해지니 상대적으로 평소의 몸상태가 더 안 좋았었다는 역체감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다리가 휘청여 넘어질 뻔했다. 개운함에 속아 방심했다. 잘 늘려진 몸은 개운하지만 그만큼 혹사당했다는 사실을. 운동효과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허리는 저절로 곧게 펴졌고 팔다리가 가벼웠다. 지나치게 상쾌해서 오히려 불쾌할 정도다.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이렇게까지 변화가 느껴지다니! 확실히 꾸준히 한다면 좋은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돈을 냈으니 나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내돈내산 셀프고문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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