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다음에 올 때는 마이쮸 사 오세요
시간강사의 계약 기간이 끝났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며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생각을 해보았다. 계속해서 나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도록 독서 논술 쪽의 일을 찾아보았다. 오랫동안 하며 차곡차곡 나의 자산이 될만한 일을 찾고 싶었다. 나의 레이다망에 특기적성 교육 강사 구인란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과 후에 1학년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는데 다양한 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강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과목 중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책놀이 강사'이다. 같이 책도 보고 다양한 독후활동을 놀이를 접목해서 하면 재미날 것 같았다. 재직 당시에도 수없이 반 아이들과 했던 일이고 또 아이를 키우며 책육아에 푹 빠져 온갖 독후활동을 다 해왔던 지라 자신이 있었다. 하늘도 돕는지 서류전형부터 면접까지 모든 곳에서 일사천리로 통과되었고 주 3회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도서관에 가서 온갖 책들을 대출해 와서 자료 찾아보고 각 학교 아이들 인원수에 맞게 구성하고 학습지 만들며 진심으로 즐거웠다. 이렇게 공들여 만들어놓은 내 수업들이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강사로 나가며 반복해서 쓸 수 있고 노하우가 쌓여간다고 생각하니 밤늦도록 교재 재작하는 일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계약서를 쓰러 학교에 방문하며 수업하게 될 공간도 살펴보았다. 당연히 컴퓨터와 책상과 의자는 기본으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수업을 미리 준비해 왔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아이들과 책놀이를 할 곳은 예상밖의 공간이었다. 이건 뭐 교실도 아니고 컴퓨터는 당연히 없으며 하물며 책상과 의자도 없는 리듬체조놀이 하는 텅 빈 공간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당황해서 머리에서 스팀이 나왔다. 내가 매우 난처해하며 어이없어하니까 담당선생님께서 학교에 교실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며 필요한 물품을 이야기하면 적극 구입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컴퓨터요. 책상이요. 의자요. 안 사줄 거잖아요. 엉엉 기껏해야 색연필, 색종이 같은 부자재 사주실 거 재가 모를까 봐요. 엉엉. 사실 교실 상황 볼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이 정도 일 줄을 몰랐지.
수업준비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이다. 직전 시간강사도 1학년 아이들과 수업을 했고 초임부터 1학년 담임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1학년 아이들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매우 잘할 줄 알았다. 건방지게도.
첫날 내가 본 풍경은 시장통 속 혼란 그 자체였다. 방과 후에 쏟아져 들어오는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제 갈길 못 찾고 있고 자기가 무슨 반인지도 몰라서 그냥 서있는 애, 오늘 수업이 아닌데 온 애, 선생님 저 일찍 가야 한다며 우기는 애, 말싸움하는 애 등등등 전국팔도 사연의 총집합체들이 뒤엉켜 떠들고 있다. 여기 시스템이 일단 한 교실에서 모두 모인후 각 교실로 흩어져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왜? 이런 시스템으로 돌리는지 알 수 없으나 매우 혼란스러워서 벌써 땀이 났다. 질서도 없고 통솔하는 이도 없고 여기 안에서 난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을 출석부에 의지해 이름을 불러서 책상도 의자도 없는 그 교실로 데리고 가야 한다. 첫날이고 난 중간에 들어온 사람이므로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지만 일단은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난 매우 자유분방하며 창의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생각해 왔건만 시장통속에 멘털 바사삭 털리고 나니 자유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각 잡아서 줄 세우고 안전하게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그 많은 아이들 속에 책놀이 아이들을 겨우 불러서 데리고 교실로 이동했다. 이미 체력은 바닥이고 땀이 비 오듯 왔다. 아이들을 바닥에 앉히고 나의 소개를 하려 했다. 분명 내가 소개를 하려 했는데 세인이가 대체 누구시냐고 묻는다. 분명 책놀이 수업을 들으러 왔으면 내가 누구긴 누구겠니.
"얘들아 반가워요. 여러분과 앞으로 책놀이 수업을 하게 될 선생님이에요."
"에이 옛날 선생님 어디 갔어요? 그 선생님이 더 좋은데 선생님도 마이쮸 갖고 왔어요?"
"읭? 마이쮸???"
"아 배고파. 선생님 초코파이는요?"
"읭? 초코파이???"
"선생님 다음에 올 때 우리 배고프니까 간식 꼭 갖고 와요."
"급식 안 먹었어? 급식 먹은 지 1시간 지났는데 벌써 배고프니?"
"급식 조금 먹었어요. 맛없는 거 나왔단 말이에요. 앗 선생님 가방이 왜 이렇게 빵빵해요. 간식 들었나 보다."
이러면서 내 가방을 열어 뒤지기 시작했다. 나 참 어이가 없다. 아이들이 그동안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이분들 왜 이리 선 넘을까. 정규교육과정에서 만나는 1학년들이 아니었다. 그저 이 아이들은 오전 학교 수업이 끝나고 놀러 온 것이다. 수업이 무료기도 하고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부모가 가라니까 온 것이다. 일단 모든 상황 파악.
드넓은 리듬체조 교실은 바닥이 매트로 되어있어서 그야말로 굴러다니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최적의 조건 최적 최적. 눈물이 난다 또르르.
첫날 수업 책은 아이들 활동할 수 있도록 '변신요가' 책을 준비했다. 다행히 깔깔 대며 즐겁게 책을 즐겼다. 그런데 이분들이 매트 위에 앉혀놨더니 자꾸만 뒤구르기를 한다. 축구복 유니폼을 입은 대현이는 앞 구르기 뒤구르기 하며 교실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진짜 공처럼 빠르게 굴러서 신기했다. 이분들은 제대로 앉혀놓는 것 자체가 도전과제구나. 땀을 한 바가지를 흘려가며 첫날 수업을 마쳤다. 계속 구르려고 하는 몇몇 아이들을 통제해 가며 준비해 온 책내용 속 요가 동작을 다 같이 해보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요가 동작 만들어 보기까지 마무리했다.
6교시 꽉 채워서 수업하는 것보다 이분들과 2시간 수업하는 게 에너지가 더 필요했다. 집에 오니 기절각으로 소파에 내 몸을 던졌다. 과연 나의 선택은 옳은 선택인가? 난 저학년이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온 교실을 굴러다니고 싶어 하는 너희들을 만나보니 어지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