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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숙희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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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드레신 Aug 08. 2024

김노인

5.

켄타는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숙희를 많이 생각했다. 숙희... 숙희라...”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세 번의 살인과 숙희. 불순분자.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듯 양 미간을 찌푸리고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내뱉었다.

한 참을 걸어 켄타가 도착한 곳은 김노인이 운영하는 골동품 가게였다.

“영감 계시오!” 찢어진 눈으로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켄타는 목청껏 김노인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잠시 후 달갑지 않은 표정의 김노인이 나온다.

얼굴에 주름은 많지만 70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체격과 빛나는 눈동자.

켄타는 김노인을 볼 때마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빛나는 눈동자가 늘 부담스러웠다.


“요즘 장사는 좀 어떠시오?” 가게 안에 보이는 청자 하나를 집어 들고 켄타가 물었다.

“당연히 잘될 일이 있나. 좋은 물건들은 값도 안 치르고 누군가가 와서 강제로 가져가 버리고 가게 안에는 자네가 보다시피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네.”

김노인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툭 내던졌다.


“값도 안 치르고 가져가다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허허 자네가 그걸 모르고 물어본단 말인가? 자네도 잘 아는 훌륭하신 분들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가격을 매겨 물건을 가져가 버리니 그게 그냥 가져가는 것과 무슨 차이인가?” 김노인은 배배 꼬인 말투로 대답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내 듣기로는 제 값을 다 주고 물건을 사갔다고 하던데. 그리고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지 못하는 조선인들이 물건을 가져가 함부로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대황국신민들이 가져가 제대로 물건을 다루는 것이 낫지 않소?”

“허허허허 그대가 이 물건들의 가치를 알고 말하는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켄타를 빤히 보고 김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물건 값을 흥정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오셨는가? ”

켄타는 김노인을 바라보지 않고 들고 있던 청자를 만지작거리다가 툭 내던진다. “요즘도 그들과 연락하고 지내시오?” 

“그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건가?”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다 알고 왔으니까. 얼마 전 일어난 우체국 사건도 영감이 작당한 거 아니오.”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그 사건이랑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허허.. 참.. 이래서 조선인들은 그냥 말로만 하면 잘 안 듣는다니까. 오랜만에 취조실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거요?”


취조실이란 단어에 김노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일세. 우체국 사건이라니.”

“어제 인력거 끌던 김씨가 죽었소.”

“인력거 끌던 김씨라니.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일세.”

“알지도 못한다라... 그 치 때문에 당신네 그 거대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는데. 우체국 다음은 은행, 다음은 경찰서 아니었나?” 나름 예의를 갖춘다고 김노인에게 어색한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켄타는 더 이상의 존중은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보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가늘게 떨리는 김노인의 팔을 켄타의 눈빛은 놓치지 않았다.

“이제 영감도 세상을 살만큼 오래 살지 않았소. 저승 가는 날까지 머지않았는데 험한 꼴로 가고 싶지 않다면 이제 그런 짓 따윈 그만해야 할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요. 더 이상 내 신경을 거스르진 마시오. 옛정을 생각해서 좋게 이야기하는 거요.”


김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주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봤다.

그 일을 추진하기까지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2년 전 자금마련을 위해 아껴두었던 보물 몇 점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몇몇 동지들이 밀정에게 당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김노인 역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켄타가 김노인의 보증을 서주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 후 김노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독립군 사이에서 퍼지게 되었고,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과정에서 켄타가 쳐놓은 덫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치스러웠던 취조실에서의 기억, 살아남은 죄로 끝없이 받아야만 했던 야멸찬 눈빛들. 김노인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켄타는 밑에서 부리는 호성이란 조선인 순사를 끊임없이 김노인의 가게로 보냈고, 느릿느릿한 말투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그는 김노인 가게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파악하였다.

그들의 눈을 피해 김노인과 동지들은 철저하게 서로를 모른척하며 은밀하게 일을 진행했고, 첫 번째 거사의 결실을 맺고 환호할 틈도 없이 박동지는 잡혀가고 말았던 것이다.

박동지가 잡혀가면서 남은 두 개의 커다란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으나, 도대체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박동지를 잡아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큰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인력거 끄는 김씨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김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켄타를 쳐다보았다.


“이보시오 켄타경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나를 잡아가면 되는 것 아니오. 공연히 시간낭비 하지 말고, 내 죄가 있다면 나를 잡아가 취조하시오.”

“하하하하 영감 진짜 한 번 해보자는 건가? 취조실이 어떤 곳인지 벌써 잊으셨소?” 켄타는 날카롭게 김노인을 노려보며 말을 잇는 한 편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김씨가 불순분자를 고발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켄타는 김노인을 떠올렸다. 아직도 조선인이라고 믿는 이 영감은 자기 조국을 위한 일에 방해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건 할 수 있는 노인이다. 더군다나 그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계획에 재를 뿌린 자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단했을 것이다.


켄타는 담배를 꺼내 물며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영감, 어제저녁엔 뭘 하셨소?”

“어제는 특별한 일 없이 가게 문을 닫고 곧장 집으로 갔소이다.”

“그걸 증명할 사람이 누가 있지?”

“나는 처자식이 없는 걸 알지 않소. 상수가 집에 있었지만.. 그 아이의 말을 믿어줄 리도 없고. 가만보자.. 아 어제 집으로 가는 길에 극장 앞에서 구두닦이 하는 박씨를 보았소.” 

“구두닦이 박씨?”

“그렇소 극장 앞을 지나가며 잠깐 인사를 했소. 그러고 보니 인력거 김씨는 박씨와 자주 어울리던 그 사람이오?”

“아까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인력거를 끄는 사람이 한둘이오. 인력거 끄는 사람의 성이 김씨건 박씨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소”

“박씨를 만난 시간은 몇시쯤였지?”

“해가 완전히 기울었으니 8시는 넘었을 거요.”

“8시라.. 그때 박씨는 뭘 하고 있던가?”

“막걸리 한 잔하러 간다고 하더군요.”

골동품 가게에 왔을 때의 분위기와 달리 켄타는 김노인에게 아무렇게나 반말을 김노인은 공손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물어보겠소.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항상 내가 주시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시오.”

사건은 막걸리를 마시고 난 후에 발생했다. 켄타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불을 끄고 골동품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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