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구두닦이 박씨는 혼자 잔에 막걸리를 채웠다.
“그래.. 처자식이 있나. 사는게 재미도 없었을텐데 잘간거지.. 잘갔어.. ” 늘 마주앉아 숙희 얘기를 늘어놓던 김씨가 없으니 적적해진 박씨가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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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있지만 박씨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변변한 장지도 없고, 가는 길이 어째 그리 황망할 수가 있어.” 물끄러미 막걸리 잔을 바라보던 박씨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고 싶지만, 남들이 볼까봐 그럴 수도 없고, 남은 막걸리 잔을 탁 털어 마시고 총각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눈물을 훔쳤다.
‘나 때문에 김씨가 죽은것인가. 내가 괜히 김씨한테 그 구두신은 작자를 말하는 바람에..’
박씨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묘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자들이 김씨를 죽였다면.. 김씨가 죽어가며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다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극장가 중심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박씨는 소위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배신한 사람, 또 그들을 밀고하던 밀정들을 처형하는 모습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은 때론 대담하게 길 한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행하기도 했고 사람을 시켜 은밀히 진행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내가 죽으면 나만 바라보고 사는 처자식들은 또 어찌할건가.’
너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에 박씨는 한기를 느꼈다.
‘어떻게 해야하지. 김순사님께 살려달라고 부탁을 해야하나. 부탁을 드려본들 김 순사님이 나를 지켜줄리도 만무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잔을 채웠다.
조금만 마시려고 했던 술이 불안한 마음이 커지자 자꾸자꾸 들이키게 되고 밖은 벌써 어두컴컴한 밤이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서 숙희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김씨가 참 좋아했었는데...’
박씨는 김씨를 떠올리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런데 숙희가 극장 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뒤따라가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저게 누구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박씨는 검은 그림자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 그림자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채 숙희를 따라가고 있었다.
치마를 입었음에도 봉긋 튀어나온 엉덩이를 적당히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검은 그림자는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들키지 않게 숨죽이며 걸었다.
갑자기 숙희가 고개를 홱 돌리자 검은 그림자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고갯길을 넘어 미리 보아둔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들켜선 안된다. 흐흐흐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은 그림자는 숙희가 다시 걸을 때 까지 기다렸다.
‘이런 간격이 너무 벌어졌군. 조금 빨리 따라가야지. 이제 저 고갯길만 넘어가면.. 흐흐흐’ 목표지점에 다다를수록 검은 그림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은만큼 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탁.탁.탁.탁.”
좁은 골목길이 끝나가고 고갯길이 보일 무렵 저 앞에서 느릿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긴채 숨죽이며 조심스레 숙희가 있는 곳을 보니 켄타의 부하 호성이란 놈이 숙희 앞에 서있었다.
‘제기랄!’
검은 그림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벽에 몸을 숨긴채 기다렸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