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는 관을 장지까지 운반하는 가마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운반하는 들것이 상여다.
사람은 태어나서 세 번의 화려한 잔치를 벌인다. 첫돌, 결혼 그리고 장례다. 이때 가장 화려한 오방색을 사용하며,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는 봉황이나 용으로 장식할 수 있다. 인생에서 세 번만큼은 임금과 같은 레벨에 올라서도 눈 감아 주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문화다.
황룡과 청룡을 사용하되 매우 작게 만든다. 봉황도 자세히 보면 닭머리임을 알 수 있다. 대신 크게 만든다. 용을 크게 만들 줄 몰라서 작게 만든 것이 아니고, 봉황 만들려다 실력이 없어서 닭머리가 된 게 아니다. 감히 임금의 권위를 넘지 않으려는 겸손의 마음가짐이다.
현재 세 채의 유명한 상여가 남아 있다.
청풍부원군 상여는 조선 후기 대동법을 시행하였던 김육(金堉)의 아들 청풍부원군 우명(右明 : 1619~1675)이 죽었을 때 시신을 향리로 운구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것이다. 숙종대에 만들어진 이 상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모양이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궁중에서 쓰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주 최부자 상여는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21대손인 최필주(崔必周)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것. 최필주는 대단한 부자였는데 그가 죽음에 이르자 맏아들이 경남 통영의 조각공을 초청하여 만들게 한 것으로 6개월에 걸쳐 제작되었다.
이 상여는 4층 누각의 기와집 형태의 독특한 형태다. 긴 멜대 위에 4층 기와집 형태의 몸체가 조성되고 맨 위에 햇빛을 가리기 위한 넓은 천이 있다. 1, 2층 아랫부분에는 난간을 두르고 난간 위에 인물조각상을 세웠는데 망자가 외롭지 않게 저승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과, 저승길을 인도하는 신선으로 알려진 동방삭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유명한 상여는 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를 관을 이장할 때 사용한 것으로 ‘남은들 상여’로 불린다. 이하응의 아버지 묘는 원래 연천에 있었는데 후손 중에 임금이 나올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충청도 가야산 자락으로 이장한다.
거리는 장장 500리 길. 왕족이라는 위세를 빌려 가는 길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일정 구간 상여를 매게 했다. 맨 마지막 맨 사람들이 덕산면 남은들 주민들. 이때 주민들이 정성을 다한 데 감동한 이하응이 상여를 마을에 기증하여 ‘남은들 상여’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여를 매는 상두꾼 숫자는 크기에 따라 대개 12명에서 30명까지 다르나 짝수여야 한다. 발을 맞추기 위해서다. 모심기 등 농사일도 그렇지만 마을에서 인심을 잃으면 상두꾼 맬 사람도 없다. 이런 것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서로 조심하며, 이웃의 어려운 일에 솔선해서 돕게 된다.
가을이면 누렇게 벼가 익으면 또래들과 주전자나 됫병을 들고 들판으로 나가는 게 일이었다. 메뚜기를 잡기 위해서다. 기름에 볶은 메뚜기는 그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푸르다 못해 건드리면 깨질듯한 청명한 하늘. 들머리에 서 있는데 검은 리어카가 멀리서 나타나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 허연 노인이 때 묻은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이고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작은 집처럼 생긴 리어카. 앞에는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지붕처럼 생긴 곳에 천주교 성당에서 보던 십자가가 금박으로 박혀있었다. 그게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상여 같은 것이란 건 나중에 확실히 알았지만, 그때도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 듯하다.
뒤따르던 사람 하나 없이 노인의 뜀박질에 따라 우쭐우쭐 흔들리며 사라지던 검은 리어카. 외줄기 황톳길과 양옆으로 펼쳐진 누런 들판. 오십 년도 넘은 지금도 기억에 박힌, 가장 아름답고, 슬픈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