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칠'(수 있는) 아이를 위한 엄마의 준비자세.
다치지 마!
괌에서 아이를 키우며 무서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아이가 다치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든 괌에서든 그 어디에서든 아이가 다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더 예민해진다.
한국에서 우리가 살던 아파트 상가에는 이비인후과, 피부과, 안과, 치과, 소아과, 내과, 정형외과, 심지어 정신과까지 있었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다쳐도 찾아갈 곳이 많다는 사실은 '엄마가 직업'인 내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하지만 괌은 그렇지 않다. 일단 의사 수가 적고, 그러다 보니 병원 수도 적다. 미국 본토에서 의사 하다가 돈 벌고 싶으면 괌으로 오면 된다는 말도 들어보았다. (근데 돈을 많이 많이 벌 수 있어도 잘 안 오신단다.)
여담으로 약사인 친한 언니가 서울에서 일을 하다 강원도로 가게 되었는데, 새로 일하게 된 강원도 약국에서 전셋집도 해주고 월급도 훨씬 많이 주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대우가 좋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그 직업이 그곳에서 귀하다는 거고, 그렇게 대우가 좋은데 여전히 그 직업이 그리 귀하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면서 동시에 이해가 가는 우리네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작은 괌은 어떻겠는가. (괌에 오고 나서 내 남편이, 그리고 내가 의사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보는 의대를 갔었어야 했어. 자기는 간호학과를 가지 그랬어.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위의 이유로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다치면 안 된다!"는 협박(?)을 '자연스럽게' 참 많이 하고 산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꾸 다친다.
그런데 다치지 마, 다치지 마, 다그치게 되는 다소 걱정되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은 신기하게 잘 안 다친다. 아이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어다닐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할 때가 많은데 어찌나 아슬아슬 잘 피하는지 참 신통방통하다.
"엄마,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왜 엄마는 자꾸 다치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라고 말하던 첫째의 떨리는 반항(?)처럼 다치는 건 정말 한 순간이다. 분명 별로 다칠 이유가 없는 상황인데 예상치 못한 찰나에 급작스럽게 찾아오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간식으로 남은 피자를 데워달라는 첫째의 요청에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피자를 넣는 순간.
"엄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켓몬 바뀌었...... 악!!!!"
둘째가 싱글벙글 웃으며 나에게 이야기하러 오다가, 열려있던 전자레인지 문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혔다. 깜짝 놀라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아이의 눈가에서 피가 난다. 예전에 첫째 눈가가 살짝 찢어져 응급실에 갔던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소리쳤다.
"앞을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부엌에는 왜 온 거야!!!!"
상처를 살짝 벌려보니 꿰매어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들자 눈물까지 났다.
-괌의 열악한 의료환경
-매일 100명 내외로 확진자가 발생하는 괌의 심각한 코로나 상황
-병상이 부족해 응급실까지 코로나 환자가 나와있다는 기사를 아침에 봄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아픈 아이를 몰아세웠다. 걱정이란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한 채 이 상황의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겼다. 안 그래도 아프고 놀란 아이에게 말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기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말한다지. 상황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남 탓을 하는 것.
두려움은 불안을 만든다.
나 스스로 육아의 덕목(?)에 관한 일련의 항목들을 나열한 후 육아 점수를 매긴다면 나는 나의 침착함에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아이가 중환자실을 가고, 몇십 통의 피를 뽑으며, 입원하고, 천식으로 잠 못 이룰 때, 아이의 입술이 찢어져서 꿰매고, 같은 반 친구가 아이의 얼굴을 심하게 할퀴어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때, 원인 불명의 피부병과 소양증으로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잠을 못 잘 때, 팔이 부러졌는데 성장판을 아슬아슬 건드렸을 때, 조산하고, 뇌출혈을 겪기까지 난 아이에게 한 번도 '그것들을 이유로' 내 쓰나미 같은 감정을 표출한 적이 없다. (심지어 우리 집 유리심장 남편에게도 표현한 적 없다.)
그저 괜찮다고 안아주는 것. 그것은 한참 자격이 부족한 것 같은 엄마인 내가 지금까지 육아하며 제일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부엌에 왜 왔냐니, 말이야 방귀야?)
아마 요즘 내 안에 두려움이 있었던 같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 이곳에선 병원에 가기 힘들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 확진자가 치솟는 괌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절대 다치면 안 된다는 강박.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있던 그 두려움이 아이를 두렵게 했다. 정서도 전염된다고 한다. 아이는 다쳐서 울었다기보다 두려워서 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괜찮다고 해두자.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정리했다. 꿰매어야 한다면 이곳에서 꿰맬 것인가, 코로나 환자가 넘쳐나는 병원에 지금 당장 뛰어갈 것인가 자문했고 내 대답은 'no'였다. 그래서 한국에 계신 아빠께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는 피부과 전문의로 계시는 친구분께 아이의 사진을 보내서 의견을 여쭤봐 주셨다. 선생님의 소견은 벌어지는 상처는 봉합이 흉이 생기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고, 아이의 상태는 봉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여건이 되지 않으니 최대한 벌어진 상처를 잘 당겨서 습윤밴드를 붙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상처가 조금 아물면 흉터를 방지하는 테이프를 붙이고, 후엔 흉터연고를 발라주면 (눈에 들어가지 않게) 될 것 같다고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너무 놀라서 그랬다고. 지금 괌에 코로나 확진자가 너무 많아서 병원 가기가 쉽지 않아 갑자기 너무 걱정이 되었다고. 다친 너에게 엄마가 소리부터 질러서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아이는 한 번 더 울었다.
"엄마 나도 다쳐서 미안해..."
"......"
다치는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은 아이의 마음에 불안감을 키우는 일인 것 같다. (물론 다쳐서는 안 되지만)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보니(오빠 위에 다리를 떡 하니 올려놓고 자는 장군 같은 우리 딸) 안심도 되고, 우리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밤이다. 자라는 동안 팔다리 성한 곳 없었던 덤벙이 딸을 우리 엄마는 어떻게 키우셨을까? 완벽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화낸 적도 소리친 적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도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나의 몸에 흉터는 조금 있지만 내 마음에 흉터는 없는 것을 보면 내가 엄마를 따라가기엔 아직 한참 멀은 것 같다.
작은 흉터도, 마음의 불안도 사랑하는 내 아이에겐 티끌만큼도 허락하고 싶지 않지만 다치는 것은 부모가 그리고 아이가 조절할 수 없는 일이므로(물론 확률을 줄일 수는 있다), 아이가 다쳤을 때 엄마가 '불안을 줄 것인지, 신뢰를 줄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를 항상 염두해야겠다.
엄마,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왜 엄마는 자꾸 다치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통통했던 노란 스타킹(흑역사)의 꼬맹이도 맨날 다치곤 했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일어날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침착했고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좀 더 자라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책을 뒤지고, 공부해서, 나름의 대책을 세우고 계셨다는 것을.
(이미 잘라버린 앞머리 혼내서 무엇하냐고... 하지만 엄마의 마음속엔 지진이 일어났었다고...)
(앞머리를 댕강 자르고 동네를 누비던 노란 스타킹 어린이는 18살에 동생 몰래 아이스크림을 냉동실 깊숙이 숨기다가 꽁꽁 언 소고기 덩어리를 발가락 위에 떨어뜨려 깁스를 하고, 22살엔 다이어트 한약 복용 1일 차에 쓰러져서 머리를 꿰맵니다.)
(그래서 저는 식탐은 있지만 음식을 잘 나눠먹고, 굶는 다이어트는 지양하는 '어른이'가 되었답니다!)
(친정 엄마 왈, 너는 애들 혼낼 자격이 없단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