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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타임조아나 Oct 05. 2020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더라도!

뮤지컬 로터리 티켓 도전기


  Lottery ticket (로터리 티켓)


  이름을 적어낸 관객들 중 뽑힌 소수에게 싼 값에 오케스트라 앞좌석을 파는 이벤트. 작은 종이에 이름과 사고 싶은 장수(최대 2매)를 적은 후, 스태프에게 전해주면 그 종이들을 작은 통에 넣고 추첨을 한다. 호명이 시작되면 마지막 최후의 한 명을 남겨두고 모두 이름을 부른다. 호명된 사람들의 아이디카드와 적어낸 종이의 이름이 같은지 재확인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을 부른다. 만약 부른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다면 그대로 티켓 추첨은 끝이 나는 것이고 만약 이름을 불렀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다시 추첨을 하기도 한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였던 나에게 로터리 티켓은 구세주였다. 브로드웨이의 모든 뮤지컬을 보기 위해 커다란 배낭 하나만 메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도, 두 블록 떨어진 마켓에 과일을 사러 갈 때 길을 잃어버릴까 가슴 졸이던 초보 뉴요커였을 때도, 비싸게 구한 뮤지컬 <라이언 킹> 표를 잃어버렸을 때도, 저렴한 티켓을 구하기 위해 tkt 전광판을 뚫어져라 정독할 때도 로터리 티켓은 항상 곁에 있었다. 뉴욕의 장기 여행자였기에 가능했던 도전이었지만 그 안에는 작은 것에도 설레어하고 기뻐하던 내가 있었다. 로터리 티켓으로 시작하지만 일상의 단상들로 끝나는, 뮤지컬 리뷰에 담기에 애매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고 싶은 순간들을 짧게 편집해보았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 조상님들은 현명했다. 


  햇살이 쨍쨍 히 내리쬐었다. 방광염이 나아갈 때라 몸도 안정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브로드웨이에 들어서자 플리 마켓이 열렸는데 그중 한 곳에서 레모네이드를 사 마시고 로터리를 위한 돈을 뽑고 극장으로 향했다. 먼저 극장에 가서 이름을 적어 낸 J가 거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극장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매번 South Korea라고 적어내다가 이번에는 New York이라고 적어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사우스 코리아가 불리는 것을 들어본 일은 없었으나 그에 비해 뉴요오-ㅋ는 많이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이름과 뉴욕을 적고 그 뒤에 입술도장을 찍었다. 희미하게 입술이 종이에 옮겨졌다. 추첨할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사람들이 몰렸다. 나와 지율이는 당첨되면 어떻게 호들갑을 떨며 나갈지 이야기를 하며 추첨하기를 기다렸다.


  이번이 10번째 도전이었다. 이미 앞서 시도한 로터리 티켓에서 9번의 낙방이 있었기에 오늘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거나 아쉽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오늘? 하는 작은 기대와 함께 메모지가 가득 들어있는 투명한 통을 휘젓는 스태프의 하얀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3번째 종이가 뽑혔다. 뉴요오-ㅋ 하며 확성기가 울렸고 오늘은 왠지 저 뒤에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었다. 


‘췅히- 뤼!’ 


  오 마이 갓! 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풋풋하거나 통쾌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도 아닌 것이, 괴성 비슷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굳이 묘사를 하자면 ‘우오오옹오옹ㅇㅇㅇㅇ오!!!!!!!!’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이디카드를 확인하는 스태프는 내가 허둥거리자 진정하라고 말해주었다. 박스 오피스에 앉아 티켓을 끊어주는 아주머니에게 이번이 10번째 도전이에요!라고 소리쳤다.








 느지막이 일어나 요거트를 먹다가 마틸다 로터리 티켓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늦을까 걱정했지만 시간이 딱 맞았다. 이름을 적고 추첨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첨이 되어 마틸다를 보게 되었다. 티켓을 받고 공연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아직 먹어보지 못한 쉑쉑 버거의 shack steak burger를 먹어보기로 했다. 가격이 비싸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채식 주의자들을 위한 버섯 패티와 쉑쉑 버거의 오리지널 버전 패티가 함께 들어있는 더블 버거였던 것이다. 맛은 버섯 패티가 있는 버거를 따로 사 먹는 것이 훨씬 맛이 좋을 듯싶었다. 버섯이 정말 컸지만 베어 먹기가 힘들어서 다져진 버섯이거나 좀 더 잘게 잘렸으면 먹기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뉴욕은 공연장들이 골목 사이사이 숨어있어서 가끔 이게 공연장인가 싶다. 골목을 헤집고 도착한 공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초록색 종이 뭉텅이를 든 남자가 나타나더니 이제 이름을 부를 테니 집중해달라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이름을 부르다니?! 부랴부랴 다이어리를 꺼내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1시인 줄 알았던 추첨용지 배부시간이 알고 보니 12시였던 것이다. 내일 있을 1시 추첨 시간이 옆에 붙어있어 헷갈린 것이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딱 12시였고 너무 일찍 간 것이 아닐까 걱정하던 때였다. 순간 기운이 쭈욱 빠졌다. 이름이 불려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바보 같아졌다. 왜 이렇게 덤벙대지? 또 한 번의 기회를 날렸어! 저번에 기숙사 신청할 때랑 똑같은 꼴이잖아! 속상해하면서 공연장을 나서는데 순간 흠칫해졌다.


  이렇게 속상해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일로 슬퍼하고 자책한다면 사실 나는 괴로워해야 할 일이 많다. 어제 여섯 시 이후로 음식을 먹은 것, 뉴욕에 오자마자 꼬박꼬박 글을 쓰지 않은 것, 영수증 정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쇼핑을 한 것, 지난번 늦잠을 자서 러시 티켓 줄은 서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것,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것……. 하지만 나는 더이상 이런 일들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졌다. 만약 오늘 러시 티켓을 잡지 못했다면 내일 다시 시도하면 되고 오늘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면 내일 한 번 더 역으로 내려가면 되는 일이었다. 중요한 건 '오늘'이었다. 물론 시간을 잘못 확인하는 것처럼 꼼꼼하지 못하거나 매일 아침 알람을 끄는 습관은 고치면 좋겠지만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매일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즐거운 뉴욕 생활이 강박에 사로잡히다 끝나면 슬플 거다. 중요한 건 이후의 일이다. 늦게 일어났든 일찍 일어났든 어찌 되었든 오늘은 시작되었고 러시 티켓을 잡든 잡지 못했든 누군가는 공연을 볼 것이고 관객을 다 채웠든 채우지 못했든 공연은 또다시 열릴 것이다.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려워 한 곳에만 머물려고 하거나 게으름이 나를 잡아먹도록 놓지만 말자.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섰다. 돈을 뽑으러 집 앞 스타벅스를 지나가는데 웬 훈남이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괜히 아이스티를 시켰다. 좀 더 용기를 내거나 시간이 많았다면 앞자리에 가서 ‘여기에 앉아도 될까요?’라고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게다가 계산기를 두드리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는 모습과 창밖에서 쏟아져 내리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의 반짝거림은 액자에 걸린 그림 같았다. 특히 붉은 속눈썹은 남자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햇살이 우수수 떨어질 것 만 같았다. 어쩜 앉는 자리도 저렇게 자기와 딱 어울리는 자리를 골라서 앉았을까. 


  길을 다시 나섰다. 옐프에 나온 지도대로 걸어갔지만 극장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40분을 헤맨 뒤에야 제대로 찾아갈 수 있었는데 집에서 고작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10분이면 오는 거리를 헤매다 40분이 걸렸다. 다행히 로터리는 끝나지 않았고 나도 부랴부랴 이름을 적어놓고 추첨을 기다렸다. 1시가 되고 수줍수줍 열매를 먹은 듯한 남자 스텝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될 것 같은 날은 정말 된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내 이름이 바로 3번째에 불리게 된 것이다! 3번째 로터리 성공에 3번째로 이름이 불리다니! 될 것 같았기에 담담한 마음으로 표를 받아 들었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피자가게에 들러 내 얼굴만 한 피자를 5달러에 사 먹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분명 공연은 3시 시작이고 문은 2시 30분에 열리기 시작하는데 줄은 이미 길게 늘어나 있었다. 2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지런하기도 하여라. 뮤지컬을 보고 나오는데 스테이지 문이 열리고 앙상블 배우부터 연주자들까지 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아역 배우들에게 사인도 받았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팸플릿에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을 하며 ‘오늘 공연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라고 묻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다. 공장장을 맡은 할아버지가 나와 사인을 해주는데 나를 보더니 ‘피곤한 사람들 사이에서 너는 정말 깨어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 로라 역의 빌리 포스터 배우와 함께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데 가슴이 또 두근거렸다.






생각할거리를 한아름 안고 들리던 브라이언트 파크





 28일은 로터리 티켓 도전의 날이었다. 북 오브 몰몬부터 헤드윅까지, 그러니까 오후 3시부터 8시까지 총 5편의 로터리에 도전을 했는데 모두 다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전 뉴욕의 해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브라이언트 파크로 왔다. 사진도 찍고 야경도 둘러보고 이 좋은 걸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집에 영상 통화를 했다. 바람은 매우 선선했고 건물들을 비추는 조명과 거대한 건물들 사이로 세어 나오는 노란불빛이 밤하늘에 아름답게 박혀있었다. 물구나무를 서는 아이들과 응원하는 아빠들이 보였다. 저만치 앞에서 앞구르기와 물구나무서기를 하던 아이는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할아버지의 박수를 받고 부끄럽지만 뿌듯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아빠에게 달려갔다. 귀여운 구석이 많은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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