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이언 킹> 리뷰 1
로어 이스트까지 와버렸다. 할렘가이다. 원래 이후의 일정은 브루클린에 가서 듀몽 버거를 맛보는 것이었지만 지하철역을 찾던 도중 우연히 샌드위치 맛집 ‘카츠 델리 카드 슨’을 발견했다. 가이드북을 읽어보니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샐리가 '가짜 오르가슴'을 연기하며 모두를 당황하게 했던 샌드위치 가게였다.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 브루클린은 다음에 갑시다. 아무리 사람이 많고 북적거려도 어떻게든 주문은 하게 되어있다.
기다리는 동안 들어보지 못한 메뉴들을 검색해보았다. corned 소금에 절인, rouburn, pastrami……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다가 pastrami를 먹기로 한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아저씨는 손놀림이 매우 빨랐다. 내 앞사람을 끝으로 고기와 빵이 떨어져 커다란 고깃덩이와 빵을 가져와 새로 잘랐다. 유후, 기분이 좋아졌다. 피클은 1인당 하나씩 주고 감자튀김은 따로 시켰는데 굉장히 크고 두툼했다. 짭조름하게 익힌 고기는 감동이었다. 어찌나 잘 익혔는지 부드럽게 씹히고 고기만 집어먹어도 느끼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기의 양도 무척 많아서 고기만 한참을 집어 먹었는데도 빵 사이의 고기는 그대로였다. 샌드위치 한 개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감자튀김도 반 정도 먹자 배가 불렀다. 테이크아웃이 되는지 물었더니 그냥 저기 가서 말하란다. 짐을 챙겨 들고 블루 북스토어에 들러 책 구경을 끝내고 나서는데, 갑자기 티켓 생각이 났다.
없다. 가방에 있어야 할 나의 티켓이 없다! 삼주 전에 예매해둔 뮤지컬 ‘라이언 킹’을 드디어 보는 날이었다. 티켓이라고 하면 '작은 종이'라서 잃어버릴 염려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아는데 그날은 그 작은 티켓을 그냥 가방에 넣어버렸다. 마치 디저트를 먹다가 옷에 흘리면 닦아서 버릴 휴지처럼, 금쪽같은 내 티켓을 그것도 욕심을 부려 제일 좋은 좌석으로 예매한 그 티켓을 ‘그렇게’ 무심히 가방에 챙겨 넣은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상상 속에서 했다고 믿기도 하잖아?
근처 벤치에 앉아 지갑이며 다이어리며 하나씩 확인을 했는데 어디에도 티켓은 없었다. 아니야, 티켓을 챙겨 오지 않았겠지. 집에 가면 있겠지. 책상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지하철을 탔다. 나는 가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상상 속에서 했다고 믿기도 하잖아?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내려 뉴욕 타임스 건물을 지나 세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고 책상을 살펴보는데, 역시나 티켓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다시 가방을 뒤집어 확인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티켓은 없었다. 없어졌다. 아마도 지도를 펼쳐보고 가이드북을 꺼내다가 떨어뜨렸을 것이다. 할렘가 한복판에서 휴지조각처럼 돌아다니고 있을 티켓이 불쌍해지며 수 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지,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 꼭 보고 싶었는데 못 보는 건가. 아, 나는 왜 이렇게 덜렁대는 걸까? 미치겠네. 새로 예매하면 더 비싸겠지? 어쩐지 로터리가 두 번이나 당첨되다니 운이 너무 좋다 싶었어. 아, 피 같은 내 돈! 15만 원짜리를 30만 원 주고 보게 되는 거야?!?! 제길 씨발 씨바알!!! 그러다가 갑자기 이렇게 혼자 궁상떨 바에 박스오피스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안된다고 하면 그나마 싸게 구할 수 있는 티켓이라도 구해서 보자는 심정으로 가방을 챙겨 다시 나갔다.
Oh, Miss smile, Don't cry. Welcome to New York!
길을 걷는 내내 박스 오피스에 도착하면 쏟아 낼 문장들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우쥬 would you?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I need your help라고 해야 하나? 너무 무례한가? 박스오피스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차근히 이야기를 듣더니 어려운 일이지만 한번 확인을 해보겠다고 했다. 내가 준비해 간 I exactly remember my seat number and I used my credit card '제 자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티켓은 신용카드를 사용했어요!'를 듣더니 자리가 어디냐고 물어보고 그걸 받아 적었다. 그리고 사용한 카드 은행과 어느 창구에서 예매를 했는지 묻더니 카드를 가져가 조회했다. 엇, 되는 건가? 나 오늘 라이언킹을 볼 수 있는 건가?
한 5분 정도 흘렀을까. 아저씨가 새로운 용지에 무언가 적어내려 갔다. Emergency Ticket. 그렇다. 난 내 티켓을 돌려받게 된 것이다! 아저씨는 산타클로스처럼 단호한 눈빛으로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눈물을 질질 짜며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아조씨... 정말 고마워여ㅜㅜㅠㅠㅠ
라이언 킹을 봤다. D언니와 S언니의 후기에 따르면 보는 도중 눈물이 몇 번 났다고 했는데 난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주에서 제일 맛있다는 피자를 먹으며 만나게 된 한국의 G언니와 ‘언니, 나는 스토리에 감동을 받는 사람인가 봐’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는 것이다. 나는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다. <라이언 킹> 이야기는 사실 간단하지 않은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삼촌 스카에게 복수를 하는 심바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주변 인물인 라사와의 사랑이야기가 아주 잠깐 등장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의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의 대표 뮤지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따로 있었다. 이야기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2014년 6월 11일 작성
2020년 9월 17일 편집 및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