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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13. 2020

어느 날 내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발표 불안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 기억 속에 어린 시절 나는 외향적이고 활발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반별 장기자랑에 곧잘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손도 자주 드는 말괄량이 같은 아이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초등학교 시절만큼의 발랄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거나 교단이나 단상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선생님들이나 같은 반 친구들, 같은 학교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발표 과제가 있을 때 주목받고 있다고 느껴지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관심받는 걸 아주 즐기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주어지거나 무언가를 해야 할 때는 기분 좋게 덤덤하게 잘 해내는 평범한 아이였다. 


이런 나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학생이 된 지 3년째 되는 여름날이었다. 미국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20여 개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문화교류 기구에서 주최하는 정기 모임이 홍콩에서 열리게 되었고 그 기구의 한국지부 운영팀으로 활동 중이셨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그 행사에서 '스피치'를 하게 되었다. 국제기구 활동 행사에서 하는 스피치라 해서 처음에는 긴장도 되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같이 준비를 해주시는 분이 있었고 두 달 간의 시간 여유가 있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는 안심했다. 대본이 있는 스피치이고 시간도 넉넉하니 차근차근 준비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홍콩에서 여러 나라 정치인들, 학생들, 저명인사들 앞에서 스피치를 한다는 사실에 마음 한편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준비 과정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드디어 출국 일이 되었다.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분이 막 들떴다. ‘초청’을 받아서 행사 참여 차 가는 외국 방문은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스물 초반의 나에게 일생일대 빅 이벤트였음에 분명했고 이 빅 이벤트는 특별한 흥분과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4박 5일의 여정 중 행사는 3일이었고 내 스피치는 셋째 날 오전이었다. 홍콩에 도착한 첫날은 같이 간 일행들과 홍콩 시내 투어를 했다. 나 외에 다른 학생들이 몇 더 있었고 교수님, 한국 지부 담당자분들과 같이 홍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일행들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나는 소풍 간 어린아이 마냥 일행들 꽁무니를 신나게 쫓아다녔다. 



행사 첫날, 영어권 학생들이 먼저 스피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준비해온 것과는 조금 달랐다. 두 달간 준비했던 내 스피치는 조금 '어른스럽고 진지한 톤'에 주제도 가볍지만은 않았는데 첫날 행사장 청중석에 앉아 들었던 다른 학생들의 스피치는 20대 학생들의 명랑함과 활기가 느껴졌고 딱 그 나이 때 학생들이 얘기할 수 있는 스무 살 초반스러운 주제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스피치를 같이 준비해주신 이사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셨다. 행사 첫째 날 저녁, 이사님과 함께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전체의 흐름은 그대로 두고 원래의 주제를 조금 가볍게 재해석해서 원고를 다시 썼다. 원고 수정 작업은 행사 둘째 날 밤늦게 마무리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학생들이 대본을 단상 위에 올려 두고 읽으면서 잠시잠시 청중과 눈을 마주치는 정도여서 스크립트를 차분히 읽기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 


행사 셋째 날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손발이 오그라들긴 하지만 나는 그 날 한복을 입었다. 내 순서가 되자 색이 고운 한복 치마를 손 끝으로 가볍게 말아 쥐고는 무대 옆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 단상 앞에 섰다. 숨을 한 번 고르고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을 쭈욱 한 번 둘러보았다. 긴장이 되기는 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제법 있었다. 발표를 시작하기 전 긴장감 속 자신감과 여유는 '내 20대 마지막 여유'였음을 그때는 몰랐다. 이 날 이후 10년이 넘도록 고통스러운 발표 불안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도 전혀 몰랐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시선만 살짝 아래로 내리면서 어젯밤까지 깔끔하게 정리해둔, 두 번 고이 접혀 있는 A4 용지 영문 원고를 천천히 펼쳤다. 연습한 대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인사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5장의 스피치 원고 첫 장 첫머리에 쓰여 있어야 할 ‘Hello, everyone’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이드 스트릿에 가서 옥팔찌 하나 꼭 사다 줘야 해. 거기에 특이한 옥으로 된 팔찌들이 많대’라고 손으로 쓴 문장 두 개가 있었다. 심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얼른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내 기대를 저버린 두 번째 페이지 첫머리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홍콩 맛집 리스트! 니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식당 위주로 정리를 했는데 점보 레스토랑 강력 추천!! 광둥요리 전문점인데 코스 처음에 나오는 게살 수프가 나는 너무너무 맛있더라고!”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내가 원고인 줄 알고 챙겨 왔던 5장 종이 뭉치는 이틀 동안 호텔 방에서 이사님과 열심히 썼던 스피치 원고가 아니었다. 홍콩이 처음인 나에게 친구들이 리포트 출력하고 남은 A4 용지에 선물 리스트, 맛집 리스트, 홍콩 명소 리스트를 잔뜩 써서 준 그 종이들이었다. 아침에 호텔방에서 나오면서 테이블 위에 리스트 종이들이 보여 가방에 넣었는데 단상 위에 오르기 전 스피치 원고라 착각하고 집어 들었던 거였다.  


하늘이 무너져 행사장 바닥이 아래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당황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두 달간 준비했던 원고가 머릿속에 온전히 다 들어 있었고 수정 원고도 내가 직접 썼으니 준비했던 스크립트를 바탕으로 스피치를 끌고 나갔어도 되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기대 어린 낯선 시선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 앞에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긴장감을 가득 짊어지고 떨리는 손 진정시키며 펼쳤던 원고에 스피치 스크립트가 아닌 친구들이 써준 선물 리스트를 보고 일시적으로 너무나 당황을 해버렸다. 몇 초 정도 온몸의 감각 기관이 멈춘 것 같았다. ‘정신줄을 놓는다’라는 게 어떤 뜻인지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들과 귀에 들리는 소리들이 아득하고 희미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그 자리에, 무대 위에 오르기 전 열고 들어왔던 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단상에서 내려가 그 문을 열고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흠칫 옆으로 반의 반걸음 정도 움직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하늘로 솟아버리거나 땅으로 꺼져버리고만 싶었다.  


솔직히,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피치를 하긴 했다. 끝나고 박수를 받은 기억은 있다. 그런데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스피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내내 일생일대 빅 이벤트를 제대로 망쳤다는 좌절감에 짓눌려 있었고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의 얼굴로 마음으로 귀국을 했다는 것만 기억난다. 


예기치 못한 날벼락을 제대로 맞은 이 날 이후 나는 극심한 발표 불안이 생겼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마음먹고 정확하게 세어보니 홍콩에서의 그 날 이후로 나는 16년 동안 발표 불안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다!!) 발표 불안을 떨쳐내기까지 책 오만권 분량의 사건 사고를 겪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 회사를 다니더라도 어떤 업무를 맡게 되더라도 맞닥뜨리게 되는 '업무 보고' '발표' '전체 회의' + 각종 행사에 영혼이 탈탈 털릴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고통받고 좌절했다. 견디다 못해 사직서를 쓰기도 여러 번. 


어이없고 슬프게도 내가 졸업 후 맡은 일 대부분이 '발표'를 많이 하는 일이었고 적게는 열몇 명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다. 더 슬프고 우스운 건 나는 '발표를 잘하는' 축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말을 조리 있게 꽤나 잘하는 편이고 스토리 텔링 자체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걸 참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과 대화에 '발표'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얼어붙기 시작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앓아 왔던 발표 불안 증상은 '시작 전 긴장 증세'였다. 내 순서가 오기 전,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면서 내는 울림에 머리까지 웅웅 거리고 목이 타면서 입안이 바싹 마르고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다가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머리가 멍해지는 증상이다. 


내 증세는 겉보기에는 멀쩡해서 다른 사람은 눈치채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더욱 얘기할 데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기를 16년. 참다 참다못해 스피치 학원에 등록을 했다. 학원을 다니는 동안 발표 불안과 관련해 시중 서점에 나와 있는 책이란 책은 다 사 와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변화가 그다지 없었고 나아지지도 않았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건가...'


힘이 쑤욱 빠졌다. 그런데 이대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내 상황이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는 상태였다(이 상황에 대해서도 다른 장을 할애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어떻게든 이겨내 보고 싶었다. 

내 나름의 연구를 시작했다. 


2년의 필사적 노력 끝에 마침내 나는 길고 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 터널 속에서 빠져나왔다.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년 간의 노력 과정 속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이겨냈다. 훌륭한 조언자들도 많이 만났다. 수많은 인연들 중에서, 발표 불안 때문에 1년 휴직을 했을 정도로 극심한 발표 불안에 시달리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체계적 해결 방안'을 발견하여 지금은 스피치 학원 강사나 전문 강연자보다 더 멋지게 강의를 하시는, 발표 불안계의 초고수님과의 인연이 아주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발표 불안은, 증상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확신컨대 극복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게 발성, 호흡, 말 잘하는 법, 완벽한 준비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더라.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나와 함께 이겨낸 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복한 인생에 큰 위협을 가하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는 극심한 발표 불안, 극복 방법이 명확하게 있다. 차근차근 따라하기만 하면 온전히 완전히 제대로 아주 극복이 가능하다! 


궁금하신 분 있으신가? 어서어서 오시라. 


16년을 앓았던 극심한 발표 불안을 극복한 '발표 불안 연구가(내 스스로 하도 대견해서 연구가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흐흐)'로서 시작하는 첫 번째 글, 시작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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