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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21. 2020

동기화 망각, 그게 뭐야?

발표 불안의 원인들

우리나라에 '대한불안의학회'가 있다. 들어본 적 있으신가? 2004년에 시작된 이 학회는 불안과 불안장애를 연구하는 전문 학술단체로 현재 약 200여 명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대한불안의학회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동재 박사에 따르면 발표불안은 수행불안(performance anxiety)의 일종으로 사회 공포증의 한 형태라고 한다. 사회 공포증은 대인관계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증상인데 여러 전반적인 사회 상황에서 긴장을 하는 전반형(generalized type)과 발표 불안과 같이 특정한 상황에 대한 공포가 있는 한정형(specialized type)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오동재 박사는 발표 불안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글에서 발표 불안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발표 불안이 있는 사람들은 완벽하려는 경향과 자존심이 센 성격인 경우가 많고 예민한 자율신경계를 갖고 있어서 보통사람이 긴장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긴장하는 반응이 나타남

- 양육환경이 문제일 수 있음. 성격은 유전되는 부분이 많지만 부모의 양육태도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음

- 중요한 경험도 발표 불안을 일으키는 데 한 역할을 함


내가 지금까지 직간접적으로 겪어본 발표 불안의 원인도 이와 비슷하다.


1. 스피치와 관련된,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을 경험한 경우

2.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의 큰 충격은 아니지만 발표할 때 긴장한 상태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경험한 경우

3. 성장 과정에서 억압을 받아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어 있는 경우



한정형 사회 공포증의 일환인 내 발표 불안의 원인은 완벽하려는 경향, 예민한 자율신경계, 격렬한 감정적인 충격 이 세 가지에 해당된다. 완벽하려는 경향이나 센 자존심, 예민한 자율신경계 이건 인정하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발표와 관련된 격렬한 감정적인 충격? 나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 불안증의 가장 큰 원인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발표 불안 해결사 선생님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어색함과 민망함에 온몸이 가루가 될 것 같았던 자기소개가 끝나고 모두에게 과제가 하나 떨어졌다. '나의 발표 불안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울렁증에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고 조금 더 센 자존심, 내성적인 성격, 완벽주의자 성향 때문에 불안한 거라 생각했다. 무어라도 생각을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예전 기억들을 뒤적뒤적해보아도 꼭 집어서 '원인'이 될 만한 일은 없는 듯했다.


- 강사님, 저는 딱히 원인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내성적인 데가 있어서 발표 전에 불안하고 긴장이 되는 거라 생각해요.

-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 원인이 있을 겁니다.

- 글쎄요. 기억을 더듬어 봐도 큰 충격을 받았거나 크게 위축된 경험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헐, 이게 웬일인가. 있다. 있었다. 아주 큰 사건이 있었다. 일생일대의 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그 일을 '깡그리(이 단어도 글로 써보는 게 태어나 처음이다. 크크)'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 큰 사건을 어떻게 한 톨도 기억을 못 하고 있었을까. 홍콩에서 우르르 쾅쾅 제대로 맞았던 그 날벼락을 나는 십 년 넘게 잊고 살았다.


말로만 듣던 '동기화 망각 현상'을 내가 겪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장기 기억에서 망각(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회상하지 못하거나 재인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가 '억압'이라 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불쾌한 경험을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추방하는 방어기제로 억압으로 인해 일어나는 망각을 동기화된 망각이라 부른다.


기억에서 통째로 지워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나 보다.


홍콩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정리해서 발표를 했다. 15명 수강생들 앞에서 마치 큰 범죄 행각을 자백이라도 하듯 무겁고 어두운 심정으로 그때의 상황과 그때의 내 심정을 이야기했다.



오동재 박사가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환자들의 경험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에 대해 환자 자신이 충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문제이다. 어떤 사건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줄 때 그 사건의 객관적인 영향보다는 주관적인 해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건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잊지 못한다.'


발표할 내용을 정리할 때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너무 충격적이었지. 꽤 오랫동안 자책을 했었지.' 그런데 그 내용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내 입으로 얘기하고 내 귀로 듣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구나.'


사실 그랬다. 급히 내용을 수정한 후에 작성했던 원고가 바뀌었다는 걸 단상 위에서 확인하고 크게 당황을 하긴 했지만 워낙 준비를 오래 했던 스피치라 원래 내용 그대로 했어도 괜찮았고 수정한 내용을 사이사이에 조금만 반영하는 정도로 했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기억의 왜곡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날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내 발표 울렁증에 대해 발표를 하면서 '사실 환자들의 경험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에 대해 환자 자신이 충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문제이다.'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들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 때문에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건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잊지 못한다'라는 것도 인정했다. 깊은 패배감이 밀려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마음이 그렇게나 그렇게나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랬구나. 수정한 원고를 읽으면 되는 자리여서 원고를 외우지 않고 무대 위로 그냥 올라갔었구나. '발표 원고 외우기 강박증'이 그때 생겼구나.


스페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내 발표 스트레스는 실로 심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발표에서 빠지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했을 때는 나는 발표 전에 7~8장이 넘는 영문 원고를 작성한  전치사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 사실, 그 원고를 내가 직접 쓰는 거라 단어 하나하나 다 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원고를 외우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나는 쓸데없이, 부질없이, 괜스레, 공연히 그 길고 긴 원고를 밤잠 설쳐 가며 외웠다. 아, 정말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원고 외울 시간에 다른 즐거운 일들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홍콩 날벼락 사건을 떠올리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서 나는 내 단상 공포증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 내가 왜 이러는 몰라서 애가 타곤 했다. 속이 후련했다. 원인이 있었구나. 내가 가지고 있었던 희한하고 요상한 강박증들이 놀랍게도 홍콩 날벼락 사건 때문에 생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발표 불안의 원인은 사람마다 다르다. 성장 과정에서의 억압된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발표와 관련된 세차고 사나운 감정적 충격을 겪은 사건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내가 아직은 잘 모르는 여러 원인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원인'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우연히 나와 잘 맞는 강의를 만나게 되어 수업 과정에서 '원인'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고 발표를 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 자리가 있다면 좋을 테고 만약 없다면 혼자서도 가능하다. 하루 중 마음이 가장 편할 때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최소 3회 이상 내 발표 불안의 원인에 대해 써내려 가보자.


내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트라우마 때문이었거나 혹은 성장 과정에서의 가정 폭력, 폭언, 억압 등의 경험 때문이었다. 원인을 날 것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썩 내키는 일도 아니고 쉬이 되는 것도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꼭 필요하다. 이 원인에 대해 파고 파다 보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 당시 나의 주관적 해석으로는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수 있지만 현재의 내 눈에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일 수도 있다. 혹은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무언가를 현재의 나는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 둘째,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내 불안증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이상한 증상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발표에서 긴장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덜어주고 내게 맞는 해결 방법을 찾아 나가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변화를 위해서는 내 현재 상태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원인'을 알아야 한다.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이 되면 발표 불안이 이미 반 이상 극복이 된 거라 생각한다.  


당신의 발표 불안도 원인이 있을까? 있다. 그런데 그건 당신만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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