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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18. 2020

강남미인형 스피치

발표 불안 극복, 그 첫 단계

공경(恭敬): 공손히 받들어 모심


나는 눈에 쌍꺼풀이 없다. 속상꺼풀도 없다. 유럽이나 남미에서 지낼 때 내 홑꺼풀 눈이 신비로워 보인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곤 했다. 진한 초록색에 옅은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에 눈 크기가 얼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내게 그런 얘기를 하면 딱히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하도 많이 듣다 보니 그런가 보다,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나는 쌍꺼풀이 짙게 드리워진 큰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눈이 크면 일단 얼굴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달라 보인다. 홑꺼풀 눈으로 평생의 반을 살아온 내게는 큰 눈이 예뻐 보이긴 한다.  그런데 내 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홑꺼풀 눈이 있긴 하다. 재미있는 건,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쌍꺼풀 없는 눈이 예뻐 보일 때는 얼굴 전체의 아우라가 우아하거나 곱거나 개성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 예쁘게 쌍꺼풀이 진 눈은 눈 자체로 아름다운 얼굴 아우라를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게 홑꺼풀 눈을 가진 자의 부러움 어린 생각이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10대 언저리였던 것 같다. 전용 테이프를 하나 사 와서 방에서 혼자 몰래 쌍꺼풀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 조심조심 테이프를 양쪽 눈 위에 차례로 붙였다. 그러곤 기대를 한가득 안고 거울을 보았다. 웃음이 빵 터졌다. 눈에 선 하나 그었을 뿐인데 거울 속 나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우울할 때 이걸 붙이고 웃어야겠다 싶어서 테이프를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내가 마음에 드는 일을 했을 때 거울을 보곤 한다.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예쁜 마음으로 누군가를 도와주고 그 사람이 알아채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떴을 때. 시작하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인 무언가를 꾸준히 노력해서 결국 해냈을 때. 화가 나서 나쁜 말이 입술까지 나왔지만 숨을 고르고 그 나쁜 말을 꿀꺽 삼킨 다음 화를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했을 때. 나는 이럴 때 거울을 본다. 그러면 내 얼굴이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이때의 내 눈은 참 아름답다. 전용 테이프로 만든 쌍꺼풀 없이도 '네 눈은 신비롭다'는 다른 사람의 평가 없이도 내 눈이 참 예뻐 보인다.


발표 불안 극복의 첫 시작은 내 스스로에 대한 공경, 공손히 받들어 모심, 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별 거 아닌 일에 쪼그라드는 못난 인간. 발표 따위에 긴장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 사람들 앞에 서면 덜덜 떨리는 모자란 이. 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내 스스로를 어느 한 지점에 옭아매어 꼼짝 못 하게 한다. 나아지려면 벗어던지려면 좋아지려면 우선 내 스스로를 공손히 받들어 모셔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게 칭찬받을만한 일을 하루에 한 가지라도 한 후 스스로에게 폭풍 칭찬을 해준다.


'오, 나 좀 괜찮은데?'

'그래. 나는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지'

'내가 좀 멋져 보이긴 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발표 불안을 앓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심성이 참 곱다. 발표 불안은 대개 스스로를 죄는 증상으로 타인의 시선을 과하게 받아들이며 생긴다. 그래서 발표 울렁증러들 중에는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사회성이 발달된 사람들이 많으며 마음이 곱고 상냥한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생각해보시라. 남들에게 피해가 가든 말든 타인이 불편하든 말든 저 사람이 내 인생에 무슨 상관이라고! 무소의 뿔처럼 독야청청(이 아름다운 말을 이리 활용하다니) 모든 게 내 위주,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이 발표 불안에 시달리겠는가? 고로 발표 울렁증이 있는 당신은 잘 찾아보면 칭찬할 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 없다? 찾으시라. 그래도 안 보인다? 그럼 칭찬할 거리 만들어서 행해 보시라.

 


칭찬 단계가 지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나를 공손하게 받들어 모셔주면서 발표자로서 나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나는 목소리가 좋다. 나는 웃는 모습이 예쁘다. 나는 손동작이 크고 의미 전달력이 있다. 나는 서 있는 자세가 참 바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빨리 알아챈다. 나는 사람들 웃기는 데에 소질이 있다. 나는 전문성이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다. 나는 영화를 많이 봤다(이것도 발표자로서의 큰 장점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 소개로 발표 시작 부분의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나는 손가락이 예쁘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뭐든 좋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발표자로서의 경쟁력을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쭉 나열해보자. (깊게 깊게 생각해보다 보면 내가 가진 장점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라게 될 수도 있다)


그중에서 5가지를 선택해서 메모를 따로 해둔다. 


자, 그다음 단계. 발표자로서 나의 단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말을 조리 있게 잘 못한다. 횡설수설하는 빈도가 높다. 나는 자세가 구부정하다. 나는 발표 시작 전 긴장감에 멘탈이 나간다. 나는 얼굴이 잘 붉어진다(이게 단점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불편하게 느끼면 단점이 될 수 있다). 나는 긴장하면 다리를 떤다. 나는 듣는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 얼어붙는다. 나는 즉석에서 발표를 하는 건 잘하는데 순서가 있는 발표는 잘 못한다. 나는 앉아서 하는 발표는 괜찮은데 서서하거나 앞에 나가서 하는 발표는 엄청나게 떨린다. 나는 목소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치열이 고르지 않아서 습관적으로 입을 오물거리며 말한다. 나는 발표 중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불편하다. 나는 긴장하면 말이 길어진다. 나는 떨리면 손톱을 물어뜯는다. 적어도 일주일은 고민해보자. 디테일이 중요하다. 최대한 많이 나열해보자.


이 중 5가지를 선택해서 메모를 한다. 


이 10가지를 머릿속에 잘 넣어두자. 장점은 내가 발표를 하는 중간중간에 최대한 잘 살려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단점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 극복이 가능한지에 대한 방법을 여러 채널을 통해서 찾아보자.


나는 우선 장점 5가지에 집중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내가 가진 장점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자신감이 조금씩 생기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불안 증세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내 마음이 편해야 한다. '발표'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따라붙는 불안, 긴장, 좌절, 실망, 자괴감, 고통 같은 다크다크하고 부정적인 단어들 자리에 '내가 가진 장점들'을 채워 넣어보자.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발표' 자체가 내게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활동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장점들을 선보이는 자리'가 될 수도 있음을 머릿속에 마구마구 심어주자. 쓸데없어 보인다고? 그렇지 않다. 불안 증세를 앓고 있을 때 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그게 우스워 보인다 하더라도,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

덧붙이자면 내 스스로가 언제 좋아보이는지도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홑꺼풀 내 눈이 예뻐 보이는 데에는 억지로 만든 테이프 쌍꺼풀이 필요한 것도 성형 수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선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때, 어려워 보이는 무언가를 해냈을 때 오는 성취감에 취해 있을 때, 끓어오르는 나쁜 감정을 어른스럽게 잘 조절했을 때 내 스스로가 예뻐 보인다. 

당신은 스스로가 언제 멋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다. 발표 불안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발표자로서의 내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파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떤 단점이 있는지가 정리가 되고 난 후에야 '내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게 가능하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것처럼 '발표자로서의 장단점'이 다 다르다. 스스로에 대한 '깊은 살펴봄' 없이 무작정 '스피치 학원'에 가서 발표하는 자세, 제스처, 표정, 시선처리 훈련, 발성, 호흡을 배우는 것보다 내 스스로의 문제점, 개선하고 싶은 부분에 대해 적어도 일주일 혹은 열흘 이상 시간을 투자해서 살펴보고 파악하고 정리하는 게 먼저다. 그러고 나서 내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강의나 책, 영상 등의 자료를 찾아보고 동시에 내가 가진 장점을 어떻게 더 계발 가능한지 고민해보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스스로를 살펴보는 과정을 뛰어넘고 '정형화된 스피치 훈련'을 먼저 받게 되면 그야말로 '강남미인형 스피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쁘긴 한데 어딘가가 부자연스러운. 세련된 얼굴인데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기억에 잘 안 남는. 코나 입술과는 조화가 잘 안 되는 듯해 보이는 크고 쌍꺼풀진 눈. 누군가를 따라한 듯한 어색한 발성. 억지로 만드는 이상한 목소리, 부자연스러운 제스처, 듣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요상스런 시선처리, 분위기와 상관없는 기계적 진행의 발표. 벌벌 떨고 있는 화자와 어울리지 않는 자신감 실린 어휘들. 내가 소화하기 어려운 것들을 먼저 섭취하게 되면 때로는 발표 불안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발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첫 단계는 내 스스로를 공손하게 받들어 모시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문제점/단점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다. 내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내게 필요한' '내게 맞는' 방법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장점에 대해서도 자주자주 떠올려보기'. 내가 가진 개성 있는 멋진 부분들을 잘 드러내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갈 수 있는 '나를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게 중요하다.


'내가 나답게'. 이것만큼 매력적인 발표 방법이 있을까? 


발표 불안에 시달리는 와중에 자신만의 장점 찾기에 집중할 수 있는 당신, 이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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