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불안 극복, 그 두 번째 단계
"과장님, 방금 말씀하신 거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네? 어느 부분이요?"
"소비자의 구매 의사 결정은 데이터 기반이 아닌 비이성적이고 직관적인 과정에 의한 충동 구매가 대부분이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그 반대 아닌가요?"
전자 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할 때였다. 소비 심리에 대한 사내 세미나 중 같은 부서 동료가 '소비자의 구매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에 대해 발표를 하는 중이었다. 내가 듣기에,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흐름상 맞지 않았다. 앞에서는 소비자가 생각보다 이성적이다라고 하고서는 뒷부분에서는 충동 구매가 대부분이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동료는 '긴장을 해서' 말실수를 했던 것 같다.
그를 깎아내리려거나 공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궁금했다. 왜 앞뒤 내용이 안 맞는지. 그런데 굳이 그걸 발표 중간에 물어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거나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발표자의 다음 내용 전달이 말이 안 맞거나 발표 내용 전체가 흐트러질 수 있는 상황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어이 그걸 물어봤다. 고집을 부려 구태여.
평상시의 나는 이렇지 않다(정말이다, 흑). 다른 사람의 말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타입도 아니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편도 아닌 것 같고 엄청나게 무례하거나 타인을 대놓고 무시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다(적어도,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발표를 들을 때의 나는 조금 다르다. 내 속에 잠잠히 숨어 있던 다른 인격이 불쑥 튀어나온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 '내 스스로를 살펴보는 과정'에서야 알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발표를 '꼼꼼히 듣는 편'이라는 것을. 이 꼼꼼함에는 '비판'이 진하게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걸 깨닫는 순간,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서른이 훌쩍 넘도록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청중으로서 얼마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내까짓게 뭐라고 타인의 이야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적을 하곤 했을까. 내 스스로가 이미 오류와 허점 투성이인데. 너무 부끄러웠다.
비판(批判):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은 콤플렉스를 느끼는 영역이 생기면 그 부분에 특히 더 예민해진다. 시각, 후각, 청각 심지어 기억력도 예민해지는 듯하다. 예를 들어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타인을 볼 때 그 부분이 시각적으로 눈에 먼저 들어온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 몸매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의 몸매가. 손이 못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을 볼 때 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고 한다. 입냄새가 나거나 자신의 체취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타인의 냄새에 특히나 더 예민해지곤 한다.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청각이 더 열리기도 한다.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부분의 기억은 다른 기억보다 더 도드라지고 두드러진다.
발표에 대한 내 불안 증세 탓일까. 나는 다른 사람의 발표를 지나치게 비판적인 자세로 듣고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자꾸 헛기침을 하지?'
'목걸이가 한쪽으로 삐뚤어졌어'
'서론이 너무 긴데'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뭐라는 거지'
'왜 자꾸 천장을 쳐다보는 걸까'
'옷차림이 이 자리와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아닌가'
'머리를 왜 저리 자주 넘기는 거야, 신경 쓰이게'
왜 그랬을까 나는. 비겁하지만 이런 비판적인 시선은 고질적인 내 발표 불안 증세 때문이라 생각해버리고 싶다.
발표 불안 극복의 두 번째 단계: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에 호감과 사랑을 담기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들이 청중의 위치에 있을 때 무대 위 사람들을 더 날카롭고 더 깐깐하게 본다? 나는 그렇다고 본다. 무대 위에, 단상 위에, 마이크 앞에 선 사람이 긴장을 하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이입된다. 깊게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 사람이 답답해 보이고 좀 잘했으면 좋겠고 더러는 나도 같이 긴장이 되고. 아, 물론 늘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빈도는 높다.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공간 = 발표 자리.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위 = 발표. 때문에 '발표 자리'에 서서 '발표를 하고 있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비판적 시선으로 보게 될 수도 있다. 혹은 그 반대로 내가 너무 깐깐하게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 섰을 때 더 긴장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눈앞에 저 사람들도, 내가 저 자리에 있을 때 하는 것처럼, 나를 이리 쪼개 보고 저리 쪼개 보며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비판 중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 보면 시작 전 더 떨린다. 내가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 내 목소리는 어떤지 시선 처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둘 중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걸 '연습'으로 깨부술 수 있다.
직장 동료의 업무 보고, 다른 강연자의 세미나 등 청중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걸 듣게 되었을 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담아 호감을 꾹꾹 넣어 좋게 보기' 이게 두 번째 극복 방법이다.
'목소리가 어쩜 저렇게 좋지?'
'머리 스타일이 참 잘 어울린다'
'저 주제를 저렇게 풀어내니 새롭네. 메세지 전달이 더 분명 해지는 거 같아'
'발표자가 저렇게 편안한 자세로 서 있으니까 보는 나도 편안해지는구나'
'얼굴이 붉어지는 게 사람이 더 인간적으로 보이고 솔직해 보인다'
'헛기침을 하는 거 보니 긴장하셨나 보다. 긴장 절대 안 할 것 같은 인상인데 의외의 매력이 있네'
말이 안 되어도 좋고 손발이 오그라 들어도 괜찮다. 최면을 걸듯 주문을 외우듯 '무조건적으로' 화자를 사랑으로 호감으로 좋게 보려고 해 보자. 이 무조건적 긍정 시선과 태도가 평소 나와 소통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의식에까지 전달이 될 때까지 하고 하고 또 하자. 반복적으로 하다가 아예 습관이 되도록 '발표하는 타인을 좋게 보기' 연습을 해보자.
듣는 사람의 자리에서 발표자를 무조건적으로 아름답게 보는 것이 충실히 연습이 되어 있으면 내가 발표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가 더욱 수월해진다.
'내 앞의 저 사람들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게 봐주고 있다'라고 주문 외우기.
발표를 이어가면서 청중의 반응을 살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때그때 조정해야 한다? 듣는 이들의 표정에서 내 이야기가 지루한지 흥미로운지 파악한 다음 지루해하고 있다 싶을 때 분위기 환기를 위한 농담이나 일화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건 아직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옥죄여 오는, 이 어마 무시한 발표 공포와 발표 불안, 무대 울렁증이란 이름의 나쁜 놈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중이다. 좌중의 현실적 반응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직 관여할 바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내 마음 편하기' '불안한 감정 떨쳐내기'를 성공해서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 따위가 내 안에서 솟아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중생들이다.
발표를 시작하기 전 계속 반복하자. (그렇다고 큰 소리로 외치지는 말고 속으로 반복하자 ^^;)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여기 모든 이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게 봐주고 있다.
이 우스워 보이는 주문이 효과가 꽤 크다. 내가 먼저 고운 시선의 청중이 되어 무대 위 사람을 아름답게 보자. 그다음 이 주문들을 외우며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들도 내가 했던 것처럼 나를 예쁘게 봐주고 있을 거라 생각하자. 우리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나도 모르게 말려든다. 아, 저 사람들이 지금 나를 참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고 있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정말이다. 한 번 해보시라.
내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고 싶다.
"잠시만요. 회장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진 것 같습니다."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잠시만 촬영을 멈춰주세요."
IT 회사에서 일할 때다. 한국의 스마트 그리드(전기 공급자/생산자 측에 전기 사용자의 정보를 전달해 효과적으로 전기공급/관리 가능케 하는 서비스) 관련 기술을 인도 현지에 구축하는 프로젝트 총괄 기획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인도 정부 프로젝트 하나를 낙찰받아 진행 중이었는데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언론사 인터뷰가 있었다. 미국에서 오신 회장님이 인터뷰어로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인터뷰 사전 원고 작성 지시를 받았다. 현장에서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인터뷰 참관을 하게 되었다. 회장님은 내가 작성한 원고보다 훨씬 더 말씀을 잘하셨고 인터뷰가 끝난 후 회장님의 사진 촬영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 촬영 중에 나는 회장님의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굳이 바로 잡아야 할 정도로 눈에 띄게 삐뚤어져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촬영을 멈춰 달라 요청했다. 고집을 부려 구태여.
넥타이만 삐뚤어진 건 아니었다. 정장 윗도리 어깨 부분에 아주 작은 먼지 몇 톨이 묻어 있었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붉은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가슴팍 조금 아래에 매달려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촬영을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빠른 눈에 레벨 높은 오지랖까지 장착되어 있어서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게는 인터뷰도 일종의 발표였으니까.
나는 눈이 빠른 편이다. 글도 아주 빠르게 읽는 편이고 문서의 오타 찾기, 여러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곳에서 특정 물건 찾기 등 무언가를 눈으로 찾아내야 할 때 그 속도가 아주 빠르다. 휘리릭 스쳐 지나간 사람들, 풍경들도 디테일하게 스캔이 가능하다. 이 빠른 눈은 발표 울렁증에 불안감을 한 스푼 더 얹어 준다. 왜냐하면 무대 위 내 발표 시간 전 그 긴장된 와중에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손동작, 앉은 자세, 작은 몸동작과 손의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빠르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긴장을 하게 되면 그렇잖아도 이 빠른 눈이 스스로 '비판의 갑옷'을 주워 입어버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 예민하고 빨라진다. 에잇.
그래서 나는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주문을 외울 때 내 눈을 심리적으로 가린다. 주문을 외우는 데에 집중을 하면서 그 최면의 과정 속에 나의 그 빠른 눈도 넣어버린다. '나를 사랑해주는 이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지 말자. 그냥 사랑을 받기만 하자'. 물리적으로 눈을 뜨고는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감은 상태로 돌입한다. 이게 가능한가? 연습으로 가능하더라.
발표 불안 극복의 두 번째 단계는 타인을 보는 내 시선에 '비판'이 아닌 '호감'과 '사랑'을 담는 거다. 그런 후 발표 자리에 섰을 때 청중 또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게 봐주고 있다'라고 주문을 걸고(나처럼 눈이 빠르고 예민한 분들은 심리적으로 눈도 감아버리고) 나를 최면 상태로 빠뜨려 보자.
꾸준히 반복해서 연습하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최면 상태에 빠진다. 이 최면 상태가 지속이 되면 전에 없었던 '타인의 시선에 대한 근육'이 조금씩 생기는 걸 느낀다. 이 근육이 점점 더 많이 생기고 점차 더 단단해지면 그때, 최면 필터 걷어낸 현실적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 많은 시선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는 내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