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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21. 2020

에이, 그럼 좀 어때요?

발표 불안 증후군 전문 병원

어느 월요일 아침, 흑마늘을 먹었다. 같이 살고 있는 친구의 어머니께서 몸에 좋다며 하루에 3개씩 집어 먹으라고 직접 만드신 흑마늘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시큼한 맛이 낯설긴 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3개를 먹었다. 빈 속에 먹으면 혹시라도 속이 쓰릴까 봐 잘 안 먹던 아침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오전에 외부 미팅이 있어서 출근했다가 차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라디오를 들으며 영동대교에 막 진입을 했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처음 몇 초 찌르르하게 아프더니 명치부터 그 아래쪽으로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파서 몸을 운전대 쪽으로 구부리고 숨을 깊게 쉬었다. 화장실을 가야 하는 상태였다. 액상 변(식사 중이시라면 죄송합니다!)이 나오기 일보 직전 같았다. 앞을 보니 다리 저 끝까지 차가 밀려 있었다. 사고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차들이 거의 멈춰서 있다시피 했다.


눈 앞이 다크다크해졌다. 통증으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등에서 땀이 주르르 흘렀다. 이 사태를 어찌하면 좋을꼬!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평소보다 두세 배는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다, 영동대교를 넘어가는 데에. 다리를 건너자마자 길 가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을 찾아 미친 사람처럼 뛰었다(이 날 나는 굽 9cm 구두를 신고 있었다. 흑). 어찌어찌 화장실을 찾았다. 정장 블라우스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사건 발생 후 며칠이 지나는 동안 영동대교 근처만 가도 배가 아팠다. 눈 앞에 차가 밀려 있는 게 보이면 배가 찌르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나는 길이 막히는 시간에 버스나 택시를 탈 수가 없었다. 어느 역에나 화장실이 있는 지하철이나 급하면 내 의지대로 화장실로 직행이 가능한 '내 차'로 이동을 해야 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불편함을 느낄 정도는 됐다.


병원을 가봐야 하나 싶던 참에 지인에게 서초구 쪽에 있는 한의원 한 곳을 소개받았다. 과민 대장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에게 꽤 잘 알려진 한의원이라 했다. 이 병명을 내게 갖다 붙일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 느꼈지만 뭔가 문제가 생긴 건 맞는 듯했다. 마침 그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약속을 잡고 방문을 했다.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머리가 약간 희끗한 40대 중후반 의사 분이 책상에 앉아 있으셨다. 간단히 질문 몇 가지를 하신 후 진료실 간이침대에 누우라 했다.


- 자, 한 번 봅시다.


내 배 여기저기를 눌러보셨다. 일어나 앉아 진맥도 했다.


- 어디가 안 좋으세요?

- 심리적 불안감에 배가 아픈 거 같아요.


흑마늘 참사에 대해 말씀드렸다.



- 그 후로 어떤 증상이 있으실까요?

- 화장실이 안 보이면 배가 아파요.

- 배가 어떻게 아프죠?

-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집니다.

- 어느 부위가요?

- 여기가요.

- 또 어떤 증상이 있으시죠?

- 길이 막히면 배가 아픕니다. 화장실을 못 가게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 화장실이 안 보이면 어떤 증상을 느끼실까요?

- 땀이 나고 배가 아프고 눈 앞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안 나요.

- 배가 아프고 불안한 증상이 어느 정도일까요? 숫자로 표현해 봅시다.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가 0, 극도로 고통스러운 게 10이면 화장실이 안 보였을 때 느껴지는 고통은 몇 점 정도 될까요?

- 8 정도 됩니다.

- 왜 고통스러운 걸까요?

- 화장실이 안 보여서요.  

- 화장실을 못 가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죠?

- 옷에다 실수를 하게 되겠죠.

- 에이, 그럼 좀 어때요?

- 네?

- 옷에 실례를 하게 되면 고통스러운 정도가 몇 점 정도 될까요?

- 수치스럽긴 하겠지만 고통스럽지는 않겠죠.

- 그렇다면 차라리 옷에 실수를 하는 게 더 나은 거 아닐까요?

- (헐, 남의 얘기라고 막 하시네, 이 양반이?) 무슨 말씀이세요?

- 옷에 실수를 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게 더 고통스럽다고 하셨잖아요.

- 그렇죠.

- 에이, 그럼 실수를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 ...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솔직히 다 큰 어른이 옷에다 실수를 한다는 건 체면이 깎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이 의사 분의 '에이, 그럼 좀 어때요?'라는 말에 머리가 디잉~했다. 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심각하네요 그 정도면. 약을 드셔야 할 것 같아요. 그걸 그리 두면 큰일 납니다. 우리 몸은 마음과 연결이 밀접하게 되어 있어서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면 몸도 같이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런 얘기들을 듣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이, 그럼 좀 어때요?'라니.


맞다. 맞는 말이다.


그래, 그럼 좀 어때? 배 좀 아프면 어떻고 실수 좀 하면 어때. 실수를 했을 때의 수치심보다 배가 아프고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훨씬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난리법석을 부리다 막상 화장실에 도착하면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화장실이 여기 있구나 하고 확인만 하고 정작 화장실에서 볼 일은 보지 않았다(실수를 하는 건 한 달 이불킥 사건이다. 그렇지만 나는 하지도 않을 실수로 고통받는 것보다 차라리 '실수 좀 하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내려놓는 게 필요한 상태이긴 했다).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막연하게 길이 막힌다 = 배가 아프다 = 화장실에 가야 한다 = 화장실이 근처에 없다 = 불안하다 순서로 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던 거였다.


발표 불안도 결이 비슷하다. 내 차례가 온다 = 실수하고 싶지 않다 = 긴장된다 = 떨린다 = 불안하다 순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인데 왜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은 건지,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발표를 해야 한다 = 잘해야 한다 = 긴장된다 = 불안하다'를 느끼고는 힘들어했다.



그런데, 좀 못하면 어때? 좀 떨면 어떤가. 발표 도중에 실수를 하면 그냥 실수를 하는 거다. 긴장을 하게 되면 긴장을 하는 것이고. 떨려서 말을 제대로 못 하거나 횡설수설을 하거나 긴장감에 뭐라도 실수를 했다손 치더라도 좀 민망하고 체면 좀 깎이는 것 말고는 딱히 뭔가 없다. 그런데 왜 그리 실수하지 않으려 안달복달하며 힘들어했던 걸까.


- 긴장 좀 하면 어떤가?

- 초조해지면 좀 어때?

- 좀 떨면 어때?


떤다고 불안해한다고 실수 좀 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더라.


나는 긴장감에 얼굴이 붉어지면 수치심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얼굴색으로 들킨 것 같은 마음에 기싸움에서 지는 거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싶지만 꽤 오랫동안 그랬다.


가까운 친구 하나가 IT 업계의 굵직한 업체들 임원진들이 수백 명 참석하는 세미나에서 강연을 하게 되어 응원차 참석하게 되었다. 친구는 전문성 뿜뿜하며 발표를 잘했다. 무슨 내용인지 100% 다 이해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눈으로 집중을 하면서 친구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발표 불안 증후군이 있는 나는 친구의 상기된 얼굴에 시선이 자꾸 갔다. 질의응답 시간에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오거나 답이 조금 매끄럽지 않으면 친구의 얼굴이 붉어지곤 했는데 나는 그게 신경이 쓰였다.


친구 파트가 끝나고 중간 쉬는 시간에 친구와 간단히 점심을 같이 먹었다.


- 후련하겠다.

- 그럼, 준비 엄청했잖아.

- 떨리지는 않았어?

- 완전 떨렸지.

- 그런데 괜찮았어?

- 무대 위에 올라가면 다 떨리는데 뭘. 다리가 다 후들거리더라고.

- 얼굴이 빨개지는 게 보이길래 긴장 엄청 했나 보다 싶었어.

- 어, 맞아. 나는 긴장하면 얼굴이 확확 붉어져.

- 신경 쓰이지는 않아?

- 긴장한 게 드러나면 좀 부끄럽기는 한데, 나 얼굴 붉어지면 좀 귀엽지 않냐?

- 응?

- 나는 발표하는 사람이 얘기하다가 얼굴이 빨개지면 인간적이게 보이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그렇더라고.

 

친구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 긴장 좀 하면 어때. 발표 자리인데. 저런 자리는 누구나 다 떨리잖아.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내가 보기에도 아주 중요한 자리인 듯했고 친구는 충분히 긴장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럼 좀 어떠냐니. 얼굴이 빨개지면 귀여워 보인다니. 멋있었다. 으아. 나는 긴장이 되면 긴장을 떨쳐버리려 몸부림치고 얼굴이 붉어지면 마음을 가다듬고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그런데 누구나 다 떨리는 거잖아. 긴장 좀 하면 어때. 얼굴 좀 달아오르면 어때.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마음에 쿠욱 박혔다.


발표 불안에 고통받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 실수 좀 하면 어떠니.

- 그럼 좀 어때?

- 어떻게 매번 잘할 수 있지?

- 그럴 때도 있는 거야.

- 어쩌라고.

- 오늘은 그런 날인가 보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건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나처럼 실수하는 거 싫어하고 꼼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내 스스로를 내려놓고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하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무언가 잘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그득한 상태에서 불안한 마음에 내가 잠식되어 있으면 될 일도 안 되고 안 될 일은 더 안되더라. 실수하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건 하등 도움이 안 되었다. 그래서 잘하고 싶은 일에도 실수하고 싶지 않은 일에도 의식적으로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좀 어때 주문을 계속 외웠다.


말 자체가 가진 힘 때문이었을까? 주문을 자꾸 외우다 보니 깨달음이 왔다. 정말이구나. 그렇구나. 잘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긴장 좀 해도 되는구나. 에이, 그럼 좀 어때.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표 증후군 전문 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자리에 전문의가 앉아서 이리 얘기해주면 좋겠다.


'에이, 그럼 좀 어때요?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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