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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26. 2020

아빠, 다 읽었어요. 들려 드려요?

칭찬 샤워와 조작적 조건 형성

내가 진행하는 발표 불안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가장 불편해하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순서가 있다.


'칭찬 샤워'


한 명씩 앞에 나가 정해진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발표가 끝나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발표자에게 칭찬 샤워를 한다. 말 그대로 칭찬을 마구 퍼붓는다. 발표자는 앞에 서서 손발이 오그라 들고 불편해도 꾹 참고 그 칭찬들을 다 듣고 있어야 한다.  


- 목소리가 제 취향 저격이네요. 오늘은 원래 좋으신 목소리가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 같아요.

- 손동작이 아주 자연스러우시네요. 전문 강연자 같으십니다.

-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말씀하시는 내내 얼굴이 참 밝으셔요.

- 지난번보다 확실히 발표가 좋아졌어요. 따로 연습을 하신 걸까요?

- 말씀하시는 도중 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볍게 살짝 웃어주시는 게 너무 좋네요.

- 오늘 옷차림이 너무 멋져요. 옷 고르시는 센스가 특출 나신 것 같아요.

- 어쩜 말씀을 그리 잘하시는지. 듣는 내내 몰입하게 됩니다.

- 그림 그리듯 묘사를 잘하시네요. 마치 제가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칭찬 샤워를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당황한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처럼 '선생님이 시킨 대로' '부자연스럽게' 가식적으로 칭찬을 만들어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분도 있었다. 칭찬을 듣는 동안 단상 앞에 어색하고 민망하게 서 있어야 하는 것도 처음에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칭찬 샤워는 발표 모임의 꽃이다. 평일 저녁 모임이라 회를 거듭하다 보면 피곤하고 지친 어느 날은 하루 빠질까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 칭찬 샤워를 받고 싶은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오신다는 분들이 꽤 있다.


우리 모두는 안다. 모든 칭찬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 발표 불안은 '긴장하면 안 된다'는 당위적 사고로 인한 정서적 장애나 성장 과정에서의 억압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편안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래서 발표 불안 증세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래도 춤추게 하는 이 칭찬에 영혼이 담겨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 불편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주는 신비한 작용을 한다.



모임 자리에서는 '에이, 이게 뭐야' 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 자기 전 양치를 하는 도중에 '내가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에 좋은가?' '웃는 모습이 좀 멋져 보이긴 하나?' 하면서 그 날 들었던 칭찬을 되새기게 되곤 한다. 정말이다. 들을 때는 분명 억지 칭찬이라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잘 준비를 할 때 문득 그 칭찬들이 떠오른다. 내 몸 어딘가에 꼭 붙어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불쑥 떠오른다, 칭찬의 말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화장실에서부터 거실, 안방 할 것 없이 여기저기 책들이 쌓여 있었다. 아빠가 책 읽기를 참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볕이 따뜻하게 드는 일요일 오후에 집에서 책 읽으시는 아빠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포근했다.


내가 아주 꼬맹이였을 때 하루는 아빠가 진지한 얼굴로 책을 한 권 주셨다.


"아빠가 이 책 내용이 너무 궁금한데 요즘 일이 많아서 그런지 도통 마음의 여유가 없네. 우리 딸이 아빠 대신 읽고 어떤 내용인지 들려줄 수 있을까?"


여러 감정이 마음속을 오갔다. 책 한 권 편하게 읽을 여유가 없는 아빠가 안타까웠다. 막내였던 나에게 '아빠 대신'이라는 말이 비장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아주 집중해서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각오 비슷한 감정도 올라왔다. 아빠가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던 게 거의 처음이라 약간의 부담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처음이었다. 책 한 권을 그렇게 집중해서 진지하게 열심히 읽은 게. 여러 번 읽었다. 왠지 모를 의기양양함이 생겼다.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빠 앞에 짜잔 하고 섰다.


"아빠, 다 읽었어요. 얘기 들려 드릴까요?"


나는 사과나무와 소년의 대화를 1인 2역으로 성대모사를 해가며 아빠에게 책 내용을 들려 드렸다.


내 스토리 텔링이 끝나자마자 아빠가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무슨 칭찬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여름에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 마냥' 쏟아진 칭찬으로 온몸이 흠뻑 젖을 것만 같았다. 너어어어어무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아빠와 나 사이의 '책 읽어 주는 딸 놀이’와 ‘폭풍 칭찬’은 계속되었다.



 이 놀이는 아이에게 여러 가지 긍정적인 영향을 안겨 주었음에 분명하다.


- 아빠와 딸 사이의 유대감 조성

- 책을 읽는 활동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 유발

- 집중력이 좋아짐: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습관적으로 집중을 하게 됨

- 발표력 향상


그런데 이 네 가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바로 '폭풍 칭찬'이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칭찬'을 수반하는 '긍정적인' 행위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내게 책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와 내용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아직도 책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이름이며 사건의 흐름의 요점을 꼼꼼하게 기억하면서 읽는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을 읽을 때조차 나는 무의식 속 칭찬 잔재 덕분에 긍정적이고 유쾌한 기분으로 책을 읽는다.


아빠의 이 폭풍 칭찬은 내 성장 과정에서 여러 이름표로 다양한 얼굴로 순기능을 크게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칭찬은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존재감을 유지하는 대단한 말들의 집합이다.


발표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칭찬 샤워'라는 방법을 접하게 되었을 때 아빠의 폭풍 칭찬이 내 기억 서랍 어디에선가 신나게 뛰쳐나왔다. 정서적 장애가 기폭제가 되었던 건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빠의 칭찬들이 새록새록 하나하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발표 모임에서 칭찬 샤워를 받을 때 나는 그 칭찬들이 더 애틋하고 따뜻하고 감사했다. 발표하기 전 긴장이 될 때 이 칭찬 꾸러미들을 떠올리면 웃음이 배시시 나오면서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나는 발표 불안의 극복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칭찬 샤워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이 주장에는 이론적 근거가 있다.


해리스택 설리번: 발표 불안은 당신의 대인 관계 역사 속에 숨어 있는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헨리 머레이: 발표에 불안을 느끼는 건 동기가 부족해서다. 어떤 동기가 부족한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발표에 대해 무의식적 작용이 있을 것이다.

프레드릭 스키너: 사람의 행동은 그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내 불안증 때문에 심리학 책을 깊게 파본 적이 있다. 여러 심리학자들 중에 내 발표 불안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행동주의 심리학이다. 이는 내면이나 무의식, 동기보다는 행동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 날벼락을 맞으면 불안하다.

- 발표 시작하기 전 날벼락을 맞았다. 불안하다.

- 발표하기 전 불안하다.


발표와 불안 사이에 '날벼락'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 홍콩에서 스피치를 시작하기 전 날벼락을 맞았을 때 나는 극도로 당황하고 긴장을 하며 불안감을 느꼈다. 벼락 정도는 맞아야 불안했던 내가, 발표와 벼락이 연결이 되면서 발표 시작 전 벼락 없이도 벼락 맞은 듯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게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고전적 조건 형성이다. 학교 다닐 때 스쳐 지나가듯 배웠던 '파블로프의 개'가 이 이론에 대한 실험이다.


- 먹이를 준다. 침을 흘린다.

- 종을 울린다. 먹이를 준다. 침을 흘린다.

- 종을 울린다. 침을 흘린다.


이 이론에 따르면 나는 발표 때문에 불안해진 게 아니라 불안을 유발했던 날벼락의 경험과 발표를 연결해버려서 그렇게 불안에 떨었던 것이다. 즉, 나는 발표 '따위'에 긴장을 덜덜 했던 멍충이가 아니라 발표를 불안감과 연결시킨 '비합리적인 사고'로 긴장 증세를 겪은 것이라는 거다. 나는 멍충이가 아니었다!


내 불안 증세에 빛 한 줄기를 더 보여준 건 '조작적 조건 형성 이론'이다. 프레드릭 스키너는 '인간의 행동은 그 행동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라 주장했고 이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상자 실험'을 했다.


- 상자에 쥐가 있다. 지렛대가 있다.

- 지렛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온다.

- 쥐가 우연히 지렛대를 눌렀다. 먹이가 나온다.

- 쥐는 지렛대를 자주 누른다.


이 실험을 통해 스키너는 쥐가 지렛대를 누른 행동은 행동 전에 주어지는 자극보다는 뒤따라오는 결과(지렛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것)에 의해 더 크게 통제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어린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밥을 잘 먹거나 하는 행동은 특정 자극에 의해 자동적으로 유발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러한 행동을 할 때 어떤 보상을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나는 발표를 하려고 할 때마다 불안 증세를 느끼게 되어 발표 행위를 피하거나 줄이려고 했다. 때문에 발표에 '먹이'와 같은 '보상'이 결합되어 있으면 내 행동의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거다.



이 먹이가 바로 '칭찬 샤워'다.


발표 해결사 원장님 수업에서 처음 경험해보았다. 내 순서의 발표가 끝나자 짜 놓은 각본 같은 칭찬 샤워가 쏟아졌다. 어리둥절했다.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부끄러웠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이 칭찬 샤워를 받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내 칭찬 샤워 순서가 되면 여전히 어색 어색 웃음을 짓긴 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칭찬들이 떠올라 공연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발표 불안계 초고수님과 함께 한 1년 동안의 발표 모임에서 나는 원 없이 칭찬 샤워를 받았다. 내 특정 행동 '발표'에 그 결과를 먹이인 '칭찬'으로 연결을 해서 '발표를 하면 칭찬이 쏟아진다'를 반복적으로 주입을 하니 서서히 내 심경에, 행동에 변화가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표 자리에 대한 부담이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또한 칭찬은 발표 불안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주기도 한다.


발표 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자. 시간이 좀 걸리지만 내 스스로 나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도 나름 효과가 있다. 친한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산 다음 '발표를 할 테니 나에게 칭찬을 좀 해다오' 같은 엉뚱한 방법도 좋다. 그렇지만 더 훌륭한 방법은 '울렁증 두레'에 참여를 해보는 것이다.


주위에 발표 불안 모임이 있는지 검색 한 번 해보시는 거 어떤가? 칭찬 샤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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