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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Oct 22. 2020

울렁증 두레

발표 불안 함께 극복하기

스페인이나 남미에서 지낼 때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국의 문화'에 대해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빠뜨리지 않고 꼭 넣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두레'다. 한국의 문화를 설명하다 보면 자연스레 '정(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정'이라는 단어가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기 참 어려워서 '정'을 설명할 때 내가 예로 자주 드는 것이 '두레'다. 요즘 잘 쓰이지 않아 조금 낯선 단어일 수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이 '두레' 문화를 참 좋아한다.


두레는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이다(두레라는 말은 ‘두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두르다라는 말은 원래 여러 사람이 모인 상태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정한 집단, 조직을 표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마을 내에서 이웃 간에 조직을 맺어 서로 도우면서 농사를 지어 온 터라 이와 관련된 다양한 공동 노동 조직들이 있는데 소겨리, 품앗이, 보계, 황두, 두레, 울력 등이 모두 공동 노동 조직의 여러 이름들이다.


3 모작, 4 모작도 가능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기후와 토양의 특성상 농사짓기에 특히나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서 처지가 비슷한 이웃 간에 서로서로 손을 주고받으며 부족한 노동력을 함께 메웠다. 우리나라에 '정 문화'가 개인을 넘어 지역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건, 물론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웃사촌들 간에 힘을 합쳐 척박한 농지를 함께 개간하고 가뭄이 들면 물 길을 같이 틀면서 생긴 이 끈끈한 관계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발표 울렁증을 극복하는 데에는 그 원인이 성장 과정에서의 억압이든, 예민한 자율 신경계이든 혹은 트라우마 때문이든 상관없이 꾸준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노력과 연습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마음먹고 시작한 후 '꾸준히'하는 건 더 어렵다. 그래서 동기 부여라는 물이 들어왔을 때 모를 마구마구 심어야 하는데 이때 지치지 않고 꾸준히 모를 심으려면 '두레'가 필요하다. '극복'이라는 공동 목표를 가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모여 서로서로 격려하고 배움을 나누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울렁증 두레를 만나면 극복 과정이 훨씬 수월해지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상당히 많은 울렁증 두레 즉, 발표 모임이 있다. 발표 불안을 겪고 있거나 발표를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순서대로 발표를 하기도 하면서 불안증을 함께 이겨내고 발표 능력을 향상하자는 취지의 모임들이다. 발표 불안 모임은 꼭 학원이나 코칭 센터에 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에 상당히 많이 있다. 검색 엔진에서 '발표 불안 모임'이나 '스피치 모임'으로 검색을 해보면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도 꽤 많다. 스피치 모임은 온라인 카페, 밴드에 많이 있는데 동호회나 스터디 모임, 학원 수강생들이 모여서 만든 클럽 등 형태도 다양하다.


이미 우리는 발표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아직 아니라면 앞 글로 돌아가서 '나를 살펴보기'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자).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많은 고민을 했다. 동기 부여의 물이 넘실넘실 들어와 있다. 모를 심어야 할 때다. 연습을 시작해야 할 때가 왔다. 용기를 내서 내게 맞는 두레를 찾아보자.



울렁증 두레에 발을 담그면 다음과 같은 어마어마한 것들을 누릴 수 있다.


1. 발표 연습을 위한 무대와 청중: 연습을 하려면 무대와 청중이 필요하다. 두레에는 내 얘기를 사랑과 호감의 눈으로 들어줄 수 있는 훌륭한 청중과 나를 위한 맞춤형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 내 발표에 집중해주고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며 '주기적'으로 발표 환경에 나 스스로를 노출시킬 수 있다. 무대에 자주 설 일이 없는 사람은 불안증의 유무와 상관없이 발표 자리가 부담스럽다. 무대 체질인 사람이나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긴장되고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다. 울렁증 두레는 내가 발표할 수 있는 무대를 정기적으로 꾸준히 가질 수 있어서 불안 증세를 누그러뜨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2. 자신감 회복: 발표 울렁증 모임에서는 동병상련식 동지애가 주렁주렁 장착되어 있는 사람들이 불안증이 사라지기 전, 여전히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봐준다. 어떤 말을 해도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일 준비가 된 청중들이므로 내 긴장과 내 불편, 실수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발표를 할 수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발표를 해도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울렁증 두레는 자신감 회복에 큰 역할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피드백이 더 효과적인 것 아니냐? 우리는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다. 아직 무조건적인 응원과 칭찬이 필요한 때다.)


3. 사람 사는 이야기를 현장에서 라이브로: 발표는 '말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발표 연습 자리에서는 '이야기'가 있다. 평소 만나기 쉽지 않은 여러 분야 종사자들/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발표'라는 명목 아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표 모임에서는 크고 작은 회사의 대표이사들, 주부, 직장인, 예술가, 요리사, 교사/교수, 학생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이야기, 회사를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학교에서 일어난 일, 영화 촬영 중에 벌어진 사건, 장인어른과 다툰 이야기. 울렁증 두레는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현장에서 라이브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모임이다.


4, 지식의 창고: 울렁증 두레는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대부분 일상에서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있다. 울렁증 두레에서는 나는 몰랐던 좋은 책, 글귀, 영화, 영상, 강연 등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각종 정보가 활발히 오고 간다. 정보 창구가 다양해진다. 실제로 1년 이상 발표 불안 모임에 참석하면 꽤 박식해진다. 꼭 발표 관련 정보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의 지식이 쌓인다.


5.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발표 모임은 모임의 특수한 성질 덕분에 매회 거듭될수록 사람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얘기를 한다. 발표 모임의 주제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들' 위주이다 보니 결국 자신의 내면 이야기가 나온다. 성인이 되어서 직장에 들어가고 경제 활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속 얘기를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이 아닌 친구 아닌 동료 아닌 사람의 인생 스토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리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다. 울렁증 두레를 꾸준히 참석하다 보면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여러 관점에서 현상을 보게 되고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더 많다. 아주 많다. 



나는 첫 두레를 잘 만났다. 운이 좋았다. 마음 잘 맞는 성실한 구성원들을 만났고 1년 동안 꾸준히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울고 웃고 배우고 듣고 말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임의 첫 시작은 발표 해결사 원장님 강의 수강생들 중 별도 연습 자리를 원했던 사람들이 한 달에 두 번 격주 수요일 강남역 부근에서 만나는 정기 모임을 만들면서였다.


그 어색했던 첫날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다. 7층에 위치한 모임 공간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후회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같은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 15명이 모인 것이긴 했지만 수업을 들었던 날짜가 모두 달라 일면식이 있는 이들이 없었다) 리더도 진행자도 강사도 없이 수강생들끼리 모여 스피치 연습이라니. 어색함이 흐르고 넘치다 폭발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죄송하다고 메세지 남기고 그냥 갈까. 그럼 너무 무책임하잖아. 아니, 참석한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 있느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 그놈의 자기소개를 또 하겠지. 사람들은 처음 만나게 되면 왜 소개라는 걸 해야 할까. 그냥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면 안 될까. 왜 호구조사를 하고 직업을 말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요약정리를 해야 하는 걸까. 1층에서부터 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긴장이 되어서였다.


어색한 공기가 그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 꽉 찼다. 모두들 불편한 기색이 얼굴 한 가득이었다. 모임 결성과 동시에 만들었던 단톡방에서 그 날 참석 의사를 밝힌 이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서먹하고 멋쩍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모임을 제안하셨던 분이 앞으로 나가 진행을 시작하셨다. IT 분야 벤처 회사 창업 멤버였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회사가 직원 30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서 임원으로서 발표 자리에 설 일이 많아졌는데 심적 트라우마를 겪은 경험 이후로 발표 불안이 아주 극심해졌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1년 간 휴직을 하셨다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스피치 강사보다 언변이 뛰어나셨고 전문 강사 포스가 너무 뿜뿜하셨기 때문이다.



이 분이 그분이다. 내가 만난 발표 불안계의 초고수. 앞으로 계속 언급하게 될 발표 불안 전문가. 초고수님은 30대 후반에 지독한 발표 불안이 시작되어 8년간 터널 속에서 살았다 하셨다. 그러다 1년 동안의 울렁증 두레에 참석을 하시는 과정에서 발표 불안이 더우면 땀이 나듯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운동선수가 운동 기술을 익히듯 시간을 들여 연습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즐겁고 재미나게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셨다.


초고수님은 이 첫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발표 전문가 경지에 올라 있는 분이셨다. 그런데 앞서 참석하셨던 그 1년 간의 두레를 통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던 불안증에서 자유로워졌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이 모임을 제안하셨다 했다.


선한 영향력.


내가 발표 불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된 분이시고 내 발표 불안 극복에 스승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신 분이다. 이런 분을 첫 울렁증 두레에서 만났다. 1년 간 꾸준한 가르침을 받았다. 1년이 지날 무렵 나도 울렁증 두레를 하나 새로이 만들어서 초고수님의 행보를 복제했다.


울렁증 두레는 이래서 내게 더 의미가 깊다.


발표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심리적 상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과정을 함께 하는 동안 서로의 내면 이야기들을 자연스레 듣게 된다. 그래서 울렁증 두레는 일손을 서로 나누는 중에 옆집 수저가 몇 개 있고 그 집 딸은 성격이 어떠하고 막내아들 생일은 언제인지도 알게 되면서 이웃이 점점 더 끈끈한 사촌이 되어가는 그 과정과 조금은 닮아있다. 울렁증 극복은 혼자 보다 함께일 때 훨씬 도움이 된다. 혼자 가는 길은 지루하지만 같이 가보면 참 즐겁고 재미난 게 발표 불안 극복이다.


(발표 모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여러 장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예정이다)


당신에게 잘 맞는 발표 모임을 하나 찾아서 모심기를 시작해보자. 두레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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