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화 Oct 24. 2020

오만방자하고 신(神)적인 요구

발표 불안 극복, 그 세 번째 단계

10년 넘은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 있다. 내 얼굴형에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을 척척 잘 만들어 주시는 금손 원장님이다. 하루는 실수로 미용실에 지갑을 두고 왔다. 그다음 날 오전 일찍 지갑 속 신분증이 꼭 필요한 일이 있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급한 마음에 전화를 드렸다. 미용실 문을 닫은 지 한참 되었음에도 원장님은 한걸음에 달려와 지갑을 찾아주셨다.


(사진출처: www.freepik.com, a photo created by kues1)


고마운 마음에 근처 카페에서 차 한잔을 사드리기로 했다. 미용실 바로 앞에도 카페가 있긴 했지만 늦은 시간이라 이미 문을 닫았다. 몇 분 걷다가 불이 켜져 있는 카페 한 곳을 찾았다. 주문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쪽은 내가 잘 안 오는 곳인데."

"왜요?"

"나한테 상처 준 나쁜 놈이 있는 곳이라 나는 이 부근으로 잘 안 와요."


6년 전, 원장님이 가장 아끼던 직원 하나가 알짜 손님들을 모두 이끌고 바로 근처에 미용실을 오픈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장님이 상처를 아주 많이 받았다 했다.


"다들 그만 용서하라는데 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구요. 아직도 그 친구 소식을 듣거나 이 근처를 지나가면 화가 나서 진정이 잘 안 돼요. 내가 지를 얼마나 아끼고 좋아하고 잘해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래."


원장님은 그동안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세히 들려주셨다.


원장님의 이야기를 나는 조금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했을 때의 상처는 크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여전히 아프기만 한다면 아름답지 않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원장님마음속 상처를 예전에 일어난 사건 자체와 분리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건 자체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원장님 스스로 '이런 일을 절대 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해서 그 아픈 감정과 기억을 꼭 쥐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무엇이 더 건강하고 이로운가를 생각해보면 부정적인 감정을 뿌리 뽑아 벗어던져 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럼에도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어 그 감정의 골이 그대로 파여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을 놓아 버리는 게 실은 덜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원장님, 그건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뭘까요?"

"원장님께 상처를 준 그 '나쁜 놈'이 6년이 지나도 여전히 원장님의 감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잖아도 밉고 싫은 놈일 텐데 왜 그 사람에게 원장님 감정을 뒤흔들 수 있는 권한을 쥐어주고 있으실까요. 상처 받은 것만으로도 분하고 답답하실 텐데 더 억울하게."


원장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늦은 밤, 원장님이 전화를 하셨다.


Vintage photo created by freepik - www.freepik.com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가 그 해로운 감정을 안고 살 필요가 없다 싶었어요. '그 나쁜 놈한테 왜 내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게 해줘야 해?'라고 생각하니까 털어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6년 넘게 생각만 해도 화가 나고 괴로웠는데 평생 용서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너무 편해졌어요."


사소한 생각 변화 하나로 캐캐 묵은 원망, 불안, 걱정의 감정들을 덜어낼 수 있다. 생각 하나 바꾸는 게 뭐 그리 대단할까 싶은데 생각 하나 바꾸는 걸로 나쁜 감정들을 확 털어낼 수 있더라. 아, 때로는 시간이 조금 걸리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발표 불안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스스로 불안함과 초조함을 꼭 움켜쥐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상황을 제삼자의 시각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발표 불안계의 초고수님이 책을 한 권 소개해주셨다. 미국의 심리학자 알버트 앨리스의 '오늘부터 불행을 단호히 거부하기로 했다(How to Stubbornly Refuse to Make Yourself Miserable About Anything)'라는 책이다.


발표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라 추천해주고 싶다. 번역이 약간 어색한 부분들이 있긴 한데 아주 훌륭한 책이다.

우울증을 오래 알았던 어머니와 누이를 가족으로 둔 알버트 앨리스는 정신 분석이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치료 형태라 생각하여 다른 쳬계를 연구했다. 인본주의적/철학적/행동적 심리상담/치료를 결합하여 꽤 효과적인 정서 치료 방법을 개발해냈다. 미국과 캐나다의 심리학자를 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설문 조사에서, 엘리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제치고 역사상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심리 치료사로 선정되기도 했다(칼 로저스가 1위를 차지했다). 불안과 스트레스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는데(실제로 저서가 아아아주 많다) 한국어 번역본도 7권이나 있다!


이 책에 이런 부분들이 있었다.


"실패나 거절 같은 불행한 사건이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에 기여는 하지만 결코 감정 자체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감정의 근본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사건과 감정 사이에 끼어 있는 신념이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합리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자기 패배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신념들, 해로운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을 비합리적인 신념이라 부르는데 인간은 비합리적인 신념을 통해 자신의 불안정한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두리뭉실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 한 줄로 요약정리되어 있었다: [불안정한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렇다. 내 스스로 불안증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내게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을 통해 내가 느끼는 감정 사이에는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 '무언가'가 내 불안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내 발표 불안증과 '내 순서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서 발표하는 행위' 사이에는 여러 비합리적 신념이 있다.


- 나는 이런 발표 따위에는 절대 긴장하면 안 된다.

- 긴장한 티가 나는 것은 멍충이 같다. 절대로 티가 나면 안 된다.

- 얼굴이 붉어진다는 건 기싸움에 밀리는 일이다.

- 긴장으로 심장이 빨리 뛰는 건 나약한 사람의 증거다.

- 실수를 절대 하면 안 된다.  

- 나는 뭐든 잘해야 한다.

-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때는 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앨리스는 이런 류의 비합리적 신념을 '신적인 요구'라 했다. 이런 비합리적인 요구는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비현실적이고 오만한 요구라고 했다.


나는 발표하면서 떨리고 긴장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비현실적이고 신적인 요구를, 오만하게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기를 하면 땀이 나고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프고 피곤하면 졸린 것과 같은 당연한 현상을 나는 '그러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인간은 감정의 방향과 강도를 다스릴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하게 망쳐버릴지 스스로 선택한다. 인간은 자신을 극심한 혼란과 절망에 빠트릴지 아니면 불안에서 벗어나게 할지 여부를 직접 택하는 존재다.


저자가 글 속에서 '이 책의 요지'라고 친절히 짚어준 부분이다.  


Background photo created by jcomp - www.freepik.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나를 괴롭히는 무대 공포증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니 결국 '내가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라는 거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오오오오랜 연구 끝에 인간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얘기한다. 정말로? 그게 가능해? 안 가능해 보이지만 한 번 믿어보자.


어떻게 없애면 될까? 부정적이고 혼란스러운 불안한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논리적으로 비합리적이라 반박하며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뭐 당연한 거 아니냐고? 이걸 연습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효과가 크다. 정말 크다.


다음과 같이 따라 해 보자.


1. 나도 모르게 당위적인 사고를 하고 있을 때 '나쁜 것이다'라고 반복적으로 떠올리자.


- 나는 이런 발표 따위에는 절대 긴장하면 안 된다.

=> 나쁜 거야, 이건.

=> 긴장하는 건 당연한 거야. 어떻게 긴장을 안 해?


- 긴장한 티가 나는 것은 멍충이 같다. 절대로 티가 나면 안 된다.

=> 아주 나쁜 생각이야.

=> 긴장한 티가 나는 건 당연한 거야. 긴장 좀 하면 어때.  


- 얼굴이 붉어진다는 건 기싸움에 밀리는 일이다.

=> 뭐래는 거니. 이거 정말 나쁜 생각이야.

=>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어. 어떤 사람 눈에는 상기된 얼굴이 귀엽고 예뻐 보이기도 한대.


- 긴장으로 심장이 빨리 뛰는 건 나약한 사람의 증거다.

=> 미친 거니. 이런 생각은 정말 나빠.

=> 설레는 기분이 들 때도 심장이 빨리 뛰잖아? 긴장으로 심장이 빨리 뛰는 건 당연한 거야.


- 실수를 절대 하면 안 된다.  

=> 뭐래니. 나쁜 거다, 이건 정말.

=>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실수 좀 하면 어때.


- 나는 뭐든 잘해야 한다.

=> 오만 방자한 생각이지. 나쁘다, 이런 생각.

=> 뭐든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미친 거니.


-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때는 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 뭐래. 이런 거 나쁜 거야.

=> 평정심을 어떻게 유지해. 적당한 불안과 적당한 긴장은 듣는 사람들이 냬 얘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양념이 되기도 해.


2.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해, 절대 이런 건 안 돼'라는 생각이 들 때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내 스스로 이 불안함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삐뚤어지고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이 나를 좀먹고 있다고 생각하자. 나는 내 스스로를 건강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3. '사람은 원래 감정의 방향과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거래. 내가 잘 조절 못하는 건 지금 내가 합리적이지 않고 비약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정서적 장애를 겪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 거야.' 이런 생각들을 반복적으로 되뇌자.


긴장이 될 때마다 습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나는 사소한 생각의 변화나 시각의 변화가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해가 안 될 때 '저 사람은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서 그런 걸 거야'라고 생각한다든지 '내 스스로 부정적이고 해로운 감정을 굳이 만들어서 붙잡고 있지 말자'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미 알고 있던 거였다.


그런데 내 '불안증'에는 이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전혀 적용이 되지 않았다. 적용할 의지도 여지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가 참 궁금했는데 깊게 파고들다가 허무하게 깨달았다. '긴장하면 안 된다'는 당위적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정서적 장애를 일으킨 것임을. 그래서 스스로에게 비현실적으로 신적인 요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 번에 그 오랜 불안증을 툭 떼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다른 잡념 걷어내고, 발표 시작 전 머릿속을 꽉 채우는 나쁜 생각들을 떠오를 때마다 단호하게 거부하는 걸 착실하게 반복했다.


정말로 효과가 크다.

허무할 정도로 효과가 크다.


하이고, 이렇게 간단한 걸 모르고 있었다니. 발표 불안은 이토록 악질이다.

이전 05화 타인을 보는 내 시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