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예-1
“알겠습니다. 시작하시죠.”
마 교수는 담담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첫날 인터뷰는 겨레가 주도했고, 조 부장이 옆에서 노트북에 말을 받아 적었다. 이따금 핸드폰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살피는 것도 조 부장 몫이었다.
“좋습니다. 교수님. 첫 번째 질문부터 할게요. 교수님 집안 조상님이긴 하지만, 편의상 존칭은 생략하고 이름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마 교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이 일본에서 도자기 빚기를 포기하고 나카무라 행수 아들과 갑작스럽게 결혼한 이유와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마 교수는 잠깐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설명을 시작했다. 성의 결혼 전후 이야기가 마 교수 입에서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그래요. 성은 도자기 빚기에 거듭 실패하면서 의지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습니다. 정신 집중도 잘되지 않으니 만드는 것마다 자꾸만 금이 갔고, 그때마다 가마터 뒤에 가져다 깨기를 반복했죠. 나중에는 깨진 조각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도공들과 일꾼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가마소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겠죠. 하루는 봉이 조용히 성을 불러다 놓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다독였는데, 성은 되레 버럭 화를 냈답니다. 그러곤 문을 박차고 나가 근처 바닷가로 갔는데요. 거기서 나카무라 행수 아들과 인연이 닿은 듯합니다.”
“인연이라면……어떻게?”
“나카무라 행수의 외동아들인 칸쿠로. 그는 성보다 한 살 어렸습니다. 같은 또래이고, 한마을에 살다 보니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컸지요. 하지만 둘의 성격은 극과 극이었대요. 성은 외향적이고 밝았던 반면, 칸쿠로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죠.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걸 즐겼고, 가마터 일은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대요. 나카무라 행수는 하나뿐인 아들이 내심 가업을 이어받길 바랐지만, 손재주가 없고, 일에는 워낙 젬병이라 물려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성이 뛰쳐나간 바닷가에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그때 칸쿠로는 낙조를 바라보며 시를 쓰고 있던 모양입니다. 종이에 대나무 붓으로 글을 쓰려는데 멀리서 어떤 여인이 뛰어오는 걸 봤죠.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가 성이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성은 해변 한쪽에 주저앉아 멍하니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답니다. 평소 성답지 않은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칸쿠로가 성을 향해 다가왔고, 흐느끼며 울던 성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더랬죠. 깜짝 놀란 성이 뒤를 돌아보곤 칸쿠로인 걸 확인하더니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답니다. 아주 서럽게요.”
“칸쿠로가 성을 위로하면서 관계가 발전했나 보군요?”
“칸쿠로는 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안고서 등을 두드려주었답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언젠가 해낼 거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은 칸쿠로의 말에 큰 위안을 얻었고, 그 길로 함께 집으로 돌아와 더 이상 도자기를 빚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가마소 운영에 다시 몰두했다. 마치 일에 미친 여자처럼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복잡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양.
그때마다 칸쿠로가 옆에서 성을 보살폈다. 그런 이유였을까. 성은 칸쿠로에게 우정을 넘어선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성은 다음 해 칸쿠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나카무라 행수는 크게 기뻐했다. 자신의 가마소를 물려줄 ‘아들 같은 며느리’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나카무라 행수는 한식구가 된 선물로 자신의 가마소를 성에게 넘겼다. 성은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다. 시아버지가 수십 년을 일궈온 가마소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나카무라는 며느리가 된 성을 믿었다. “나는 이제 힘없는 늙은이가 됐다. 장작 패는 일도, 불구덩이 화염과 싸우는 일도 힘에 부치는구나. 여기도 이제 젊고 힘 있는 행수가 필요해. 내가 누구보다 너를 잘 알잖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해 보거라. 넌 잘할 수 있을 게야.”
성은 시아버지 부탁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나카무라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와 상의하라고 했다. 성은 시아버지 격려와 응원에 눈시울을 붉혔다. 성은 나카무라 행수 집에서 불과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이듬해 칸쿠로를 똑 닮은 아들을 낳았다. 나카무라는 손주가 마냥 예뻤다. 어미가 젖을 물리는 동안을 빼곤, 항상 포대기에 싸매 업고 다녔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애가 내 손주야’라며 신나서 소개했고, 이다음에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나카무라 가마소 1호점과 2호점에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
인터뷰는 계속됐다.
“아들까지 낳은 칸쿠로와 성 부부의 삶은 어땠나요? 행복했나요?”
겨레의 질문에 마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마 교수의 말을 받아 적던 조 부장은 뭔가 반전이 있을 거란 예감에 눈썹이 움찔했다.
“칸쿠로는 요절했습니다.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어요.”
“네? 대체 왜요?”
“정확한 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돌림병이 유행이었다는 자료가 있긴 하지만…….”
마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칸쿠로는 어릴 때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관지가 약해 기침을 심하게 했다. 아버지인 나카무라가 기관지에 좋다는 별의별 약초를 구해다 먹였지만 소용없었다. 커서도 기침을 달고 살았고, 나이가 들면서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앉아서 기침하다가 옆으로, 뒤로 넘어지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기침하다 피를 토했고, 병세는 깊어졌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칸쿠로는 아들이 돌이 됐을 무렵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죠. 아내인 성은 졸지에 애 딸린 과부 신세가 됐고요.”
“아이고, 저런.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웠으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텐데…….”
“아니요. 성은 잘 이겨냈습니다. 칸쿠로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걸 알고 아내에게 마음 굳게 먹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아들을 자신처럼 대하며 살라고. 그래야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남아있을 아내와 아들을 늘 걱정했죠. 눈을 감기 전에도, 아내에게 비슷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반드시 꿋꿋하게 살아달라고, 그리고 도자기를 다시 만들라고, 아내가 못하면 아들한테라도 가르쳐 기필코 성공하라고.”
칸쿠로는 죽기 전 온 힘을 다해 시를 썼다. 그건 아내를 위한 마지막 연서(戀書)였다.
1.
밝은 낮인데 아직도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꾸벅꾸벅 조는 꽃이 있습니다.
다른 꽃들은 이른 새벽부터
제각각 꽃망울을 터트리고 뽐내건만
그 꽃만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을
잠꽃이라 불렀습니다.
2
잠꽃의 기상은 초저녁
선선한 미풍이 다가올 즈음입니다.
다른 꽃들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무렵
잠꽃은 혼자 잎들을 털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살포시 봉오리를 엽니다.
밤새 잠꽃은 혼자입니다.
3
깊고 깊은 밤
산골짝 계곡물과 풀벌레 울음소리가
위안은 되었지만
구슬피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만큼은
참을 수 없는지 이따금씩 눈물을
보이고 마는.
잠꽃이여!
4
잠꽃도 원래 이른 새벽녘
계곡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여느 꽃들과 함께 피던 꽃이었습니다.
매일 그 험한 계곡을 찾아 와
자기를 봐주던 이의 발길이
어느 날부턴가 끊기고 난 후
잠꽃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람만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것만큼
애절하고 외로운 마음은 없습니다.
5
이젠 잠꽃도 지려나 봅니다.
늦게나마 꽃을 피우고
꼬박 밤새우며 자기를 보러 올
그 사람만 기다렸는데
잠꽃은 차츰차츰 시들어 갑니다.
6
사랑받지 못하는 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꽃은 절대 그 사람을 잊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잠꽃> 나카무라 칸쿠로
성은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도자기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일꾼들은 하나둘 가마터를 떠났지만, 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칸쿠로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다물었다. 그녀는 칸쿠로 신주가 있는 사당에서 기어코 도자기를 만들어 당신 앞에 바치겠노라 맹세했다. 다음은 성이 죽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시에 대한 답서다.
당신
살고 싶다고 했지요
살아서 살아서 나와 행복하겠다고
작은 눈물 글썽이며 웃었잖아요.
슬퍼지기 전에 사랑하자고
그러면 슬픔도 덜어질 거라면서
축 처진 어깨 감싸주던 당신이잖아요.
당신
내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날마다 날마나 미안하댔지요.
어제도 오늘도 고맙댔잖아요.
괜찮아요.
당신이 쓴 시에, 글자 사이사이에
보이던 마른 눈물 자국들
모두 다 한결같은 당신의 사랑이었고,
전부 다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었잖아요.
당신
지금은 나 혼자 이 세상에 있지만,
절대 외롭거나 슬프지 않으렵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당신이건만,
저 파란 하늘 위 어디선가
날 지켜보고 있을 줄 아니까요.
영원히 날 지켜 줄 것을 믿으니까요.
그거면 족합니다.
내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당신> 마성
♏
성은 여전히 실패를 거듭했다. 세월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나카무라 행수는 자신이 업고 다니며 동네방네 자랑했던 손자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나카무라가 죽던 날, 그는 성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얘야, 그동안 못 난 늙은이 건사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런 말씀 마세요.”
“칸쿠로가 떠나고 너를 내보냈어야 했어.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해야 했는데……차마 그러지 못하고 내 욕심만 부렸어. 너에게 미안한 게 참 많구나.”
“아녜요, 아버님.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돌아가신 제 부친을 대신해 저를 거둬주셨고, 가마소까지 물려주셨잖아요. 그 은혜를 제가 어찌 갚겠어요.”
“아니다. 내가 네게서 받은 은혜가 더 많아…….”
나카무라의 음성은 점점 작아졌다. 숨이 갈수록 가빠져 헐떡거렸다. 성은 숟가락에 물을 떠 입을 적셔주었다.
“얘야, 아가!”
“네.”
“늬 아버지 말이다. 마 행수, 그 사람…….”
“제 아버지가 왜요?”
“마 행수가 장천으로 떠나기 전날, 나를 찾아와서 한 얘기가 있다. 장천에서 흙을 가져다 도자기를 빚겠다고. 그래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거라고. 자기가 못하면 너와 아들을 시켜서라도 언젠가는 만들고 말겠노라고. 그 사람을 만난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어.”
나카무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갈 줄 어찌 알았을꼬. 하지만 난 네가 마 행수의 꿈을 이루어주길 바랐다. 그래서 백제인의 실력과 자긍심을 온 세상에 알리기를 바랐다. 비록 내 생전에 그 광경을 못 보고 가지만……네가 아니라도, 네 아들이라도, 그게 아니면 그 후손대라도 반드시 꿈을 이루길 바란다. 그것이 마 씨 후예가 이루어야 할 가업이자 역사적 과업이니라.”
“네, 명심할게요.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 보답하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성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나카무라는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눈을 감았다.
“한세상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그간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님.”
나카무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시부상을 마친 성은 아들을 데리고 가마터로 향했다. 그녀의 아들 겐조는 앞으로 그곳이 자신의 평생 일터가 되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
성은 두 개의 가마소를 하나로 합쳤다. 도공과 일꾼도 얼마 남지 않아 그렇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여겼다. 그 무렵 겐조는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을 서당에서 왜국어를 배웠고, 집에 돌아와선 백제어를 배웠다. 겐조는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한번 보고 들은 건 절대로 잊지 않았다. 특히 글솜씨가 뛰어나 또래를 능가했다. 서당 훈장이 그의 문필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성은 겐조의 문장력이 아버지인 칸쿠로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직감했다. 언어 실력도 뛰어나 왜국어과 백제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글솜씨뿐만 아니라 손재주도 좋아 무엇을 만들든지 사람들 눈길을 끌어모았다. 어릴 적부터 가마터 주변에서 흙을 가지고 놀아서인지, 흙을 다루는 재주가 유달리 남달랐다. 성은 그런 겐조를 장차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문인의 길을 걷게 할지, 가마소에서 일하며 가업을 잇게 할지.
겐조의 나이가 열 살이 되는 날, 성은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네 나이도 이제 열 살이다. 앞으로 네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 묻고 싶구나. 너는 장차 무엇이 되고 싶으냐?”
“…….”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말에 겐조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동안 자신이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리 갑작스럽게 물어보시면……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저는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고 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기로서니, 그리 분별력이 없어서 어찌하겠느냐!”
어머니의 호통에 겐조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깜짝 놀랐다.
“내가 평생 네게 효도나 받으려고 이제껏 널 먹이고 재우며 키운 줄 아느냐.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성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
“됐다. 더는 보기 싫으니 그만 나가 보거라.”
방에서 나온 겐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마터로 갔다. 그는 가마터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어머니가 한 말을 곱씹었다.
‘어머니는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내가 도공이 되어 가마소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글공부를 열심히 해 학자로 성공하는 걸 원하는 걸까…….’
겐조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확실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그때 가마터 안쪽에서 사람 발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요?”
겐조는 퍼뜩 놀라 머리가 쭈뼛 섰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봉이었다. 봉도 나이가 들어 거동이 편치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거였다. 어느 날 가마에 장작을 넣다가 쓰러지고 난 뒤부터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 했다. 하지만 이따금 정신이 돌아올 때가 더 많았는지라, 성은 그를 가마소에서 계속 일하게 뒀다. 대신 가마에 장작불을 넣는 일은 하지 못하게 했다. 수비질이나 유약 바르기 따위의 작업만 하도록 일렀다.
겐조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가 누군지 알아채고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 날도 어두운데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쯧쯧,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지 말이야. 일이 끝났으면 연장을 제자리에 두고 가야지, 아무렇게나 늘어놓고 가버렸지 뭐야. 그래서 창고에 정리해놓고 나온 참이다.”
봉이 정신은 다행히 온전한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도 참. 그런 건 내일 날이 밝으면 해도 될걸…….”
“그게, 그렇지 않다. 도공은 그렇게 하루를 마쳐선 안 된다. 처음과 끝이, 아침과 저녁이 같아야 한다. 그런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사발 정도는 만들진 몰라도, 이름난 도공이 될 수 없단다.”
봉의 말에 겐조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봉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도공의 삶이 어땠어요? 가마터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요? 궁금해요.”
“흠……겐조?”
“네, 할아버지.”
“난 말이야. 어릴 적부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단지 기물 만드는 재주밖에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했어. 천출이라 출세는 가당치도 않았고. 그러다 네 외조부인 마천왕 행수를 만나고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단다. 우리만의 고유한 전통을 살린 그릇과 사발, 항아리와 옹기가 가마에서 나올 때마다 뭔가 모를 희열을 느꼈지. 대단한 자부심과 함께 말이지. 그러다 네 외조부를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됐단다. 벌써 이십 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구나!”
겐조는 봉의 자글자글한 목주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풍파의 세월에 거칠어진 손을 살며시 잡았다. 봉도 겐조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몸에는 반은 백제인, 반은 왜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하지만 너의 친가나 외가 모두 이 가마터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었다. 너 역시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너는 네 부친인 칸쿠로나 어미인 성이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해야 할 중책이 있단다.”
“중책이요? 그게……뭔데요?”
“도자기. 도자기를 빚는 일이다.”
“도자기요? 어머니도 못 한 걸, 제가 어찌…….”
“아니야, 너는 할 수 있다. 겐조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널 갓난아기 때부터 봤어. 나카무라 행수가 널 업고 다니면서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내 손자는 커서 대단한 인물이 될 거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거야. 그걸로 이 나라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을 것이야’라고.”
겐조의 귀에 봉의 말은 예언처럼 들렸다.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여기로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잠시 뒤 봉은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는지 딴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천에 있는 내 딸이 오늘도 도자기를 굽고 있다는구나. 곱고 예쁜 도자기를, 흐흐흐…….”
봉은 한 손으로는 반쯤 구부러진 허리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서 가마터를 내려갔다. 밤길이 어두워 겐조가 뒤따라가며 봉을 부축했다. 집에 다다르기 전, 겐조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날이 밝는 대로 어머니께 말해야지. 어머니가 못다 이룬 꿈, 제가 해 보겠노라고.’ 가마터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밤새 내렸다. 겐조는 빗소리에 뒤척이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맞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새 멎었고,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
아들의 결심을 전해 들은 성은 사뭇 들떴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감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기쁘고 설렜다. 아들이 가마소에서 일하며 도자기를 만들겠다고 한순간, 성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겐조, 고맙구나. 내 아들.” 성은 아들을 얼싸안았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더는 참지 못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머니, 실망하지 않게 노력할게요. 부지런히 배울게요.”
“오냐, 겐조. 나도 성심성의껏 가르쳐보마. 우리 한번 잘해 보자꾸나.”
모자는 그날부터 가마소에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방 안에선 온종일 물레 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