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손기정, 서윤복 같은 ‘조선의 마라토너’다

‘국뽕’ 영화 보다가 마라톤이 더 좋아졌다

by 류재민

“나라가 독립했으면 당연히 우리 기록도 독립이 되어야지!”


나는 언제부터 마라톤을 좋아했을까. 어릴 적부터 뜀박질이라면 질색하던 나였는데, 이제 며칠만 안 뛰면 몸이 근질거리니. 단거리 달리기도 아니고, 최소 5km 이상을 한 번도 안 쉬고 뛰고 있으니,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다.


‘제22회 대청호 마라톤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영화를 보러 갔다. <1947 보스톤>. 전설의 마라토너 손기정이 나오고, 남승룡이 나오고, 서윤복이 나온다. 실화를 바탕으로, 게다가 ‘국뽕’을 자극하는 스토리라 그런가 ‘조선인 DNA’를 자극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나온다. 덕분에 눈물샘이 고장 나기도. 옆 좌석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리라.


태극기를 달고 달릴 수 없던 그 시절 마라토너의 애환과 비애, 운동화 한 켤레 살 돈도 없던 시절 마라톤 대회 출전까지 거쳐야 했던 험난한 여정.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참 행복한 나라에서 행복하게 달리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새삼 고마웠다. ‘아임 해피, 아임 러너’라는 대사처럼.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손기정. 시상대에서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렸다는 이유로 다시는 마라톤을 뛰지 말라는 각서까지 썼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마라토너에게 달리기를 금지한 건, 두 다리를 자른 셈.

common.jpg 영화 <1947 보스톤> 스틸 컷.
KakaoTalk_20231004_114641038.jpg 나도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같은 '조선의 마라토너'다.

그로부터 10년 후, 해방된 조국에서 성조기를 달고 뛰라는 보스톤 대회 조직위 규정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대목이었다. 서윤복은 끝내 성조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대회에 참가했고, 1등 했다. 손기정의 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시상대에서는 당당히 애국가를 불렀다.


손기정과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은 마라토너로는 ‘노인’ 축에 드는 36세 나이에도 12위에 입상했다. 달리기는 나이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준 그야말로 불굴의 마라토너 아닌가.


마라톤을 하면 수명도 연장되나 보다. 손기정과 남승룡, 서윤복은 90이 넘도록 장수했다. 오래 살고 싶어 마라톤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뛰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러너스 하이’ 맛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달린다.


서윤복 어머니가 임종을 못 지킨 아들을 대신해 손기정에게 남긴 유언은 이렇다. “윤복아, 어머니께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 하시더라.” 40대 중반에도 난 두 다리가 멀쩡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마라톤을 하며 살고 있다. 이만하면 ‘해피’한 인생 아닌가. 이래서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거였군.


내 마라톤 경쟁자는 기록도, 순위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난, 나를 이겨내려고 오늘도 달린다. 구겨진 인생 펴는 건 뜀박질 최고이며, 뜀박질하면서 나는 나를 이겨내리라. 보스톤이 아니면 어쩌랴. 공기 좋은 대청 호반길도 보스톤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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