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함
식량을 나르기에 세 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순팔이 돌아가서 장정 너댓명을 더 데려온 뒤 이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먹을 것을 가져오는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도 만세를 불렀다. 담양 댁은 어린 순칠을 등에 업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아낙들과 함께 불을 때고, 바닷물을 길어다 빈 솥에 부었다.
“바닷물 자체가 짠물이라 물이 즉으면 못 묵어. 서너 통을 부어야 들 짜고, 여럿 사램이 먹을 수 있다.”
식사 부(部)는 담양 댁이 진두지휘했다. 아낙들도 나이가 많은 담양 댁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날이 저물 무렵,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배를 곯던 사람들은 군침을 흘리며 밥이 익기를 기다렸다. 한쪽에선 건어물을 찢어 볶았고, 다른 한쪽에선 막걸리병이 돌았다.
“이게 꿈이여, 생시여. 죽지 않고 산께 이런 날도 오느구만.”
순팔은 흥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엄 노인을 비롯한 장년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듯 밥그릇을 날랐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동영의 눈에도 기쁨의 눈물이 담뿍 고였다.
“되었네, 되었어. 이제 다 살았어.”
사람들은 일제히 쾌재를 불렀다. 모처럼 배불리 먹을 생각에 저마다 얼굴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때, 담양 댁이 주걱을 높이 추켜들고 식사 준비를 하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잠깐 멈추래이.”
담양 댁의 단호한 목소리에 일행들은 들던 숟가락을 멈췄다.
“암만 굶어 디질 판이래도 더 먼저 디진 사람들한티 묵념은 하고 먹어야지 않겄어?”
호통에 가까운 담양 댁 말에 주위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렇다.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은 잠시라도 필요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모두 내려놓고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오.”
동영이 일어나 대표로 추념사를 했다. 그리곤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됐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가릴 것 없이 입으로 쑤셔 넣었다. 배탈이 나든, 설사를 하든 그건 나중의 문제였다.
“어서 부어라, 좀 더 따라봐.”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이들의 잔치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과식한 아이들도, 취한 어른들도 죄다 해안가로 달려가 토악질했다. 동영도 순팔과 거나하게 취했다. 둘은 백사장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의 별까지 취한 듯 흔들렸다.
“아야,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겄지?”
“꿈이면 안 깨면 된다. 난 절대 안 깰란다.”
신난 두 청년이 말을 주고받을 때, 해안선 저 멀리에서 점 같은 불빛이 반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거리는 섬과 한참 떨어져 있어 이른 아침에야 선착장에 닿을 정도였다. 과음에 열이 오른 남자들은 웃통을 죄다 벗어젖히고 아무 데나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섬을 향해 접근하는 불빛은 조금씩 그 빛을 키우며 속도를 내고 있었다.
“다들 나와 보소. 저그 배가 들어오고 있소.”
순팔이 다급한 소리로 사람들을 깨운 건, 일출이 막 떠오를 즈음이었다. 전날 밤늦도록 먹고 마시며 정신 줄을 놓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 없다는 듯 잠에서 깨지 않았다. 잠에서 깬 어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배를 보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일본 놈들이 또 쳐들어오는 거 아녀? 아이고 인저 우린 증말 다 죽었다.”
담양 댁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다른 이들도 다가오는 군함을 멀건 눈으로 바라볼 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녀. 저건 일본군함이 아녀!”
해안선 가까이 다가갔던 엄 노인이 크게 소리치며 뛰어왔다.
“일본군함이 아니믄, 그람 어데 배라는 말이여?”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동영이 입을 뗐다.
“성조기가 달렸소. 미군함이요.”
“미군? 미국 배란 말여? 미국은 우리 펜 아닌가베.”
“그러지, 우리 우방국이지. 그람 우린 살았네.”
불안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 얼굴에 안정이 찾아들었다. 동영과 순팔과 엄 노인, 그리고 식량을 옮기러 갔던 장정 몇몇이 이번에는 선착장을 향해 나섰다. 그사이 선착장에 다다른 미 군함은 정박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인들은 미 군함의 정박을 도왔다. 밧줄을 잡아매고, 미군이 내리기 편하게 발판을 갖다 댔다. 이윽고 군함의 철문이 열리고 푸른 제복에 총을 멘 미군들이 보였다.
“헬로우.”
갈색 콧수염이 기다랗고 가지런하게 난 미군 장교가 조선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할로? 저 양반이 지금 뭐래는 거여?”
영어를 모르는 순팔이 동영과 엄 노인을 번갈아보며 눈을 굴렸다.
“영어 인사네, 반갑다는.”
동영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 조부인 이선재를 통해 영어를 접했다. 이선재는 성당에 다니면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동영도 선재를 따라 성당에 나갔다. 서너 달 그들과 어울리며 가벼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미군 장교를 포함해 배에서 내린 병사는 모두 스무 명이었다. 그들은 배에서 빵과 우유를 가져다 조선인들에게 줬고, 전황을 전했다.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패망했다.”
미군 소령 아서 파커는 짧게 말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조선인들은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곧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뒤늦게 잠에서 깬 아이들도 방방 뛰면서 만세를 외쳤다.
“그럼 인저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제?”
신난 담양 댁이 파커 소령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케이. 노 프로블롬.”
파커는 미소 띤 얼굴을 하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모두 배에 태워 조선으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할 때 그의 갈색 콧수염은 한껏 올라갔다. 파커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선인들은 파커 소령에게 큰절을 올렸고, 파커는 그것이 무슨 행동인진 몰랐지만, 고맙다는 의미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쌩큐, 쌩큐 소 머치.”
파커 소령 역시 화답했다. 조선인들은 미군들과 얼싸안고 강강술래라도 하는 양 모래밭을 빙글빙글 돌았다. 불과 몇 분 만에 그들은 하나가 된 듯했다. 잠시 후 섬에 있는 미군과 조선인들은 승선 채비를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업거나 무등을 태우고 배로 향했다. 배는 수백 명이 타도 남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섬에 잠시 정박했던 배는 다시 출항을 준비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끌려온 조선인들은 3년여 만에 귀향길에 올랐다. 배는 뿌우-소리를 내며 해안선을 출발했다. 떠나는 사람들은 동굴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회한의 눈물을 떨궜다. 눈물은 배 아래 바다로 떨어졌는데, 파도에 금세 휩쓸려 표시가 나지 않았고, 거품만 세차게 일었다. 그렇게 조선인 백여 명을 태운 미 군함을 조선을 향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동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할압씨. 난 살았소. 살아서, 인저 고향 땅이로 돌아갈라요. 동막리에 가믄, 선산에다 할압씨 산소 맹글어드릴게. 혼이라도 날아오시오. 잘 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