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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14화

밀리환초

결사항전

by 류재민

“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인두껍을 쓰고 어찌 그런….”

담양 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숲에 모인 사람들 모두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마냥 무기력하고,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이들 중 누가 순자와 김 노인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법이니까.

“자, 조용들 하시고요. 우리도 개죽음 당하지 않을라믄, 냉정해져야 합니다.”

동영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술렁거리던 무리가 이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동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반격을 준비합시다. 지랭이도 밟아뿔먼 꿈틀한다는 걸 봬 줍시다.”

동영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디, 맨손으로 멀 어찌 할 수 있으까?”

순팔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동영에게 물었다. 그러자 동영은 방법이 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동영은 기가 막힌 방법을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그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순자와 김 노인에 대한 복수는 물론, 굶주림의 나날을 끝내고 싶다는 욕구가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마치 죽음을 각오했다는 듯 결연했다.

동이 막 틀 무렵이었다. 동굴 안에서 잠든 척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한곳에 모였다. 그들의 손에는 곡괭이와 삽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 더이상 비행장 활주로를 닦거나 격납고를 짓거나, 참호를 파는 도구가 아니었다. 자유를 향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되찾으려는 최후의 무기였다. 그들은 그대로 일본군 숙소로 향했다. 동영이 제안한 방법은 별다를 게 없었다. 일본군이 잠들어 있을 때, 기습해 처단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총검을 앞세운 군인들을 제압하려면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는데 모두가 순응했다.

동영과 순팔이 앞장서 무리를 이끌었다. 그들은 맨 먼저 이토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발가벗은 채 잠을 자던 이토는 입도 벙긋할 새도 없이 체포됐다. 동영과 순팔이 이토를 제압하는 사이 사람들은 그의 입을 막고, 포승줄로 몸을 감았다. 다음 체포대상은 사카이 대좌였다. 사카이의 방은 이토와 그리 멀지 않았다.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사카이 방 앞에서 체포조는 잠시 머뭇거렸다. 사카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방 입구에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깔아뒀다. 그는 잠들 무렵 전선에 고압 전류가 흐르도록 했는데, 컴컴한 동굴 안, 이른 새벽에 전선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순간, 한 남성이 전선을 잘못 건드리며 지른 비명에 정체가 탄로났다. 잠에서 깬 사카이는 본능적으로 머리맡에 놓은 권총을 들어 천장에 두 발 연속으로 탕탕 쏘았다. 총소리를 들은 일본군들이 소란을 떨며 일어났다. 군인들은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총검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사카이 대좌 방으로 몰려오는 군홧발 소리가 동영의 귀에 들려왔다.

“조센징! 꼼짝 말고 엎드려랏!”

사카이의 날카로운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렸다. 순팔이 동영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인제 어쩐댜?”

“우라질. 워째긴 뭘 워쪄. 목심 걸고 싸우야지.”

동영은 손에 쥔 곡괭이를 들고 일본군이 다가오는 쪽으로 뛰어갔다. 순팔과 나머지 남성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쪽바리 새끼덜, 다덜 죽어삐라.”

일본군들은 저마다 총을 들었지만, 쉽게 쏠 순 없었다. 동굴 안이 어두워 피아(彼我) 구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컴컴한 동굴 안에서 한바탕 육탄전이 벌어졌다. 난투극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일본군들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컴컴한 동굴에서는 총도 쏘기 어렵고, 같은 일본군끼리 치고받으면서 부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동굴 밖으로 뛰쳐나온 사카이가 호루라기를 불어 군인들을 밖으로 철수시켰다. 동영과 순팔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그대로 동굴 안에 있었다. 밖으로 나간다면 그들의 총에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벽쪽으로 숨어 있으랑게. 바깥에서 이쪽으로 총을 갈길 수 있으닝께.”

“그려, 다덜 몸 조심하더라고. 인저부터 정신 바짝 차리야돼.”

그때, 아침해가 수평선에 걸쳐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밖에서 안쪽으로 한동안 사정없이 퍼붓던 총소리가 멎었다. 사카이가 대원들에게 총알을 아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사카이는 조선인 노역자들을 유일하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총이었기 때문에 한 발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굴 안에 있던 녀석들은 오래 가지 못할 거다. 때가 되면 슬금슬금 기어 나오겠지. 그때 한 놈씩 사살하거나 잡아서 처형한다. 알겠나?”

“하이!”

사카이 대좌 명령에 제복 입은 군인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여성들과 어린아이들, 노인들은 일본군이 굴에서 빠져나올 때 같이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포승줄에 묶여 한 곳에 감금됐다. 이시이는 겁에 질려 우는 아이들을 향해 공포탄을 쐈다. 울던 아이는 금세 조용해졌고, 나머지 포로들도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맘 같아선 죄다 쏴 죽이고 싶지만, 당분간은 살려 두겠다. 괜한 짓을 할 생각은 마라. 그랬다간 즉시 총살이니까. 알겠나?”

이번에는 사카이가 포로들 앞까지 가서 큰 소리로 호통쳤다. 호통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굴 안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굴 안에는 남자들만 열댓 명 있었다. 그들은 이미 살기를 포기했고, 결사 항전 각오로 싸움을 준비했다. 날이 어둑해졌지만, 동굴 안은 밤이나 낮이나 늘 캄캄했다. 동굴 입구에 두 명이 보초를 섰고, 남은 이들은 사카이 방으로 집결했다. 바닥에 깔린 마른 짚단 위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축축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촛불 두 개와 벽에 걸린 횃불이 깜박이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노역자들은 웅크린 채 앉아 있었지만, 눈빛만은 횃불보다 더 뜨겁게 이글거렸다. 어김없이 찾아온 배고픔에 뱃고래는 잔뜩 쪼그라들었고, 여기저기서 꾸룩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영이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인저 더는 물러날 곳이 읍다는 건 다덜 알쥬? 목심걸구 끝까지 싸워보는 거요.”

동영의 말에 순팔을 비롯한 남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우덜한티 싸울만한 무기는 읍지만, 저놈들도 쉽게 쳐들어오진 못할 거이네.”

동영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을 건넸다.

“돌을 모으자고요. 놈들이 방심하는 순간에 그걸 던지믄서 기습하면 어떨까 싶소만?”

동영의 제안에 다들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그때, 엄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위험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엄 노인의 반대 의견에 순팔은 눈썹을 치켜떴지만, 이내 동영이 제지했다.

“노인장,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거유?”

사람들 시선이 모두 엄 노인에게 쏠렸다. 엄 노인은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일찍 장가를 들어 마흔에 손자를 봤다. 그래서 다들 그를 ‘노인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군이 수세에 몰려 동굴을 빠져나갈 때, 동굴의 지형을 찬찬히 살폈다. 좁은 통로, 경사로와 낭떠러지,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까지. 엄 노인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면서 천천히 설명했다.

“동굴 뒤편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네. 절반은 여기서 저들과 싸움을 준비하고, 나머지 절반은 밖으로 나가 뒤를 치는 것이오.”

“협공을 하자는 말씀이오?”

순팔의 물음에 엄 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묘수 중의 묘수요. 좋소. 그렇게 해 봅시다.”

동영의 맞장구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 표정이 밝아졌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받아 둔 바가지가 가득찼다. 그들은 도원결의라도 하듯 한모금씩 돌려 마셨다. 일곱은 동굴에 남았고, 여덟은 굴 뒤편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아 나섰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노역자들에는 몽둥이와 곡괭이, 삽 따위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목숨을 건 복수전을 준비했다.


이시이는 뭔가 불안함을 느꼈다. 동굴 안에 있는 조선인들이 뭔가 일을 꾸밀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카이에게 말했다.

“대좌, 아무래도 저놈들이 무슨 일을 낼 것 같습니다.”

“일?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이 무슨 일을 낸단 말이냐?

사카이는 이시이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도 모르니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게 어떨지….”

“빠가야롯! 넌 지금 대일본제국의 군인들을 무시하는 거냐? 우리는 어떤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훈련이 잘 된 제군들과 총과 칼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굶주려 지친 놈들이 맨몸뚱이로 덤벼야 명만 재촉할 뿐이다.”

사카이는 이시이의 걱정과 염려에 되레 역정을 냈다. 이시이는 상관의 불호령에 고개를 떨궜지만, 불안함을 떨치진 못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굶주린 야수들이 죽기로 달려들면 그보다 더한 공포는 없다’

밤에는 약간의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일본군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식량으로 밥을 지었다. 조선인 아낙 몇 명이 보리쌀을 씻어 안쳤고, 총을 멘 일본군 서넛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포로들을 감시했다. 밥 짓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동굴 쪽으로 들어갔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조선인들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쓸모없는 조센징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 기껏해야 사흘이다. 살려달라고 뛰쳐나오거나, 그 안에서 굶어 죽던가.”

사카이는 밥 한 덩어리를 입으로 욱여넣으며 동굴 쪽에 대고 떠들었다. 먼발치서 그 광경을 보던 조선인 아낙들은 허공에 주먹 감자를 날렸다. 일본군들은 그날부로 조선인 포로들의 식량 배급을 전면 중단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과 아이들은 밤새 신음했고, 젊은이들도 갈비뼈가 드러난 뱃가죽을 부여잡고 몸부림쳤다. 언제쯤 주린 배를 채울지, 모래 섞인 잡곡이라도 좋으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올지, 암담한 상상을 하면서. 아침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시간은 더디게 갔다.


‘퍽,퍽 으악!’

둔탁한 소리가 환초의 새벽을 깨웠다. 보초병 두 명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순팔과 엄 노인이 전광석화처럼 내리친 삽자루에 일격을 당한 것이다. 나머지 무리도 재빨리 움직여 일본군 숙소 주변을 에워쌌다. 일본군들은 동굴에서 빠져나온 일본군들은 동굴에서 칠팔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숙영 중이었다. 순팔과 엄 노인을 포함한 습격조 8명은 다시 두 조로 나눠 좌우로 갈라졌다. 순팔은 호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동굴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동굴 앞에서 망을 보던 동영은 습격조의 부싯돌 신호를 발견하고 역시 부싯돌로 답신을 보냈다. 그리곤 이내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작전 준비를 알렸다. 사람들은 동영의 손가락 수신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얼굴만 한 돌멩이, 죽창처럼 날카로운 막대기,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몽둥이, 노역 장구들이 손에 들려 있었다. 모든 준비가 마쳤음을 확인한 동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작전 개시를 알렸다.

“자, 가자! 가서 저 쪽바리 놈을 다 쓸어버리자!”

“원통하게 죽은 순자 복수를 하자!”

“조선인의 매운 맛을 보여주자!”

동굴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일본군 숙소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마치 불타는 전차가 돌진하는 것처럼. 적요했던 환초의 새벽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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