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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15화

밀리환초

일진일퇴

by 류재민

노역자들의 습격에 당황한 일본군들은 혼비백산했다. 죽기를 각오한 돌격대에 손을 쓸 새도 없이 무너졌다. 돌멩이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삽자루에 맞으며 쓰러졌다. 총을 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치기 급급했다. 일본군들은 산등성이를 뛰어 올라갔다. 활주로 공사 중인 산으로 올라가 격납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습격에 성공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이 두고 갔거나 빼앗은 총을 거둬들였다. 무기고도 탈취했다. 감금됐던 포로들도 풀려나 합류했다. 전세가 바뀌었다. 이제부터 쫓기는 쪽은 일본군이었다.

“야호, 우리가 이겼다아. 일본군이 물러갔다아.”

“조선이 왜놈들을 물리쳤다아.”

아이들은 신나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영과 순팔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수고했구먼.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나부렀어야.”

엄 노인이 동영과 순팔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한데 모인 사람들도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 육시를 헐 놈들, 이 참에 올라가 다 죽여삡시다.”

순팔이 격앙된 얼굴로 엄 노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동영이 순팔을 제지했다.

“아녀. 대책도 읍시 올라갔단 우덜만 죽어불어요. 찬찬히 작전을 짜야제.”

일본군이 도망은 쳤어도, 그들에게는 아직도 총과 무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훈련받은 ‘군인들’이었다. 감정을 누그러뜨린 순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저들도 당장 내려오진 못할 거요. 우리도 눈을 좀 붙였다가 다음 작전을 세우더라고요.”

동영의 제안에 사람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빛줄기가 가느다랗게 동굴을 비췄다. 장정 넷이서 불침번을 섰다. 자리에 누운 동영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힘든데 잠이 오진 않았다. 습격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모든 과정이 눈에 선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든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다른 조선인 노역자들도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살아있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순자가 생각났다.

‘에그 불쌍한 것. 불쌍한 순자.’

동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는데, 정확히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굴 곳곳에선 곯아떨어진 이들의 잠꼬대와 코 고는 소리가 장단을 맞추듯 흘러 다녔다. 생사의 길목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이따금 실실 웃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버럭 화를 내거나, 쿨럭거리거나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잤다. 운명을 걸었던, 길었던 하루가 단잠에 덮였다.

아침이 밝았을 때도 산 위로 도망친 일본군들은 어떠한 낌새도 없었다. 격납고로 숨어 들어간 그들은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반격을 위한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역자들은 번갈아 가며 산 쪽 망을 돌았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전투태세로 전환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활주로 공사가 거의 마무리된, 산 위는 음산할 만큼 적막했다.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공허한 숲에서 일본군은 숨죽이며 산 아래 노역자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 대치는 이틀이나 계속됐고, 때때로 굶주림에 지친 일본군 몇몇은 밤늦게 산 반대편으로 몰래 내려와 바닷물을 떠 가거나 물고기를 잡았다. 노역자들은 그걸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발버둥을 애써 못 본 척했다. 거기엔 동영의 지시도 있었다.

“그들 역시 심장을 가진 인간이고, 살아있는 생명 아니오. 또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형제가 아니겄소.”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일본군이 반격할 힘을 얻은 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다. 일장기를 달고 먼바다를 지나던 일본 군함에게 무전이 울렸다. 어두운 환초 격납고에서 밤낮없이 시도했던 무전이 통한 것이다. 무전을 접한 함대는 선체를 동족이 포위된 섬으로 돌렸다. 군함은 만 하루 만에 환초에 다다랐다. 일장기를 단 군함을 발견한 조선인 노역자들은 동굴로 피신했다. 온갖 무기를 챙겨놓고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수 미터에 달하는 포선을 단 군함의 위풍당당함에 금세 기가 꺾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하는 심정으로 선착장에 닿는 군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동영의 눈빛은 심하게 떨렸다.

“아따, 참말로 요란하게 생겼구먼. 별것도 아닌 것들이 폼 재고 내려오는 거 보소.”

순팔은 애써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긴장한 빛이 역력한 사람들은 순팔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고사는 경계에서 또한번의 전투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쾅, 쾅, 쾅’

포선에서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왔다. 포탄은 노역자들이 모여있는 동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동굴 외벽 곳곳이 탄에 맞아 부서지고 무너졌다. 동굴 안 천장도 탄을 맞을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듯 마구 흔들리고 뒤틀렸다. 어린아이들은 아낙들 품에 안겼고, 아낙들은 아이들을 꼬옥 품은 채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포성이 멈췄다. 군함 안에서 누런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일본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곤 선착장에 계단을 내리고 해변 모래밭으로 내려왔다. 모래밭에 도열한 군인들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엄호용 나무 판자를 겹겹이 세워놓고 앉아총 자세를 취했다. 산 위에서는 격납고에서 나온 일본군들이 동굴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사카이가 히죽거리며 목줄에 매달린 호루라기를 힘차게 불었다. 동시에 산 위와 아래에서 총탄이 빗발쳤다. 동굴 속 사람들은 날아드는 총알을 피하기 바빴다. 훈련된 군인들의 능수능란한 협공에 속수무책이었다. 동굴 안 사람들은 점점 더 안쪽으로 피신했다. 노역자들이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가면서 산 위 군인들은 아래로 내려와 지원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동굴 앞까지 접근했다. 그들은 마치 너구리 사냥을 하듯 동굴 앞에 불을 피웠다. 매캐한 연기가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연기에 질식한 몇 사람은 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총을 맞고 쓰러졌다. 연기는 동굴 벽을 타고 점점 깊숙이 퍼져 들었다. 사람들 비명 소리에 굴 안은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동영과 순팔은 옷을 찢어 비상용 물동이에 적신 뒤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젖은 옷을 입으로 가린 사람들은 최대한 연기를 피해 웅크리며 숨을 참았다.

“시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까나. 숨멕혀 죽을 바에 나가서 총이라도 쏴보고 죽읍시다.”

순팔이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발끈했다. 동영은 고민했다. 어떤 선택이라도 최선은 없었다. 죽는 건 기정사실이고, 어떻게 죽을지만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려. 이왕 이래 된거 이판사판 싸우다 죽읍시다.”

동영은 사람들에게 장비를 챙기도록 했다. 동굴 안 사람들은 비장한 각오로 앞으로 나아갔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죽음의 문턱으로 진격했다. 총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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