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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16화

밀리환초

대반격

by 류재민

무리와 무리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다만, 더 강력한 무기를 소지한 쪽의 힘이 객관적 우위를 가져갔다. 조선인 노역자들은 결사 항전으로 맞섰지만, 인적‧물적 자원의 한계에 봉착했다. 일본군보다 더 많은 조선인이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뒹굴었다. 동영은 후퇴를 지시했다. 남은 사람들은 산자락을 기듯이 올라갔다. 그곳은 기습을 당한 일본군들이 달아났던 장소였다. 며칠 전 일본군이 피신했던 격납고가 이제는 조선인들의 은신처로 바뀐 셈이다. 말 그대로 일진일퇴였다. 격납고 안은 동굴만큼이나 어두침침했다. 살아와 모인 조선인들 숫자는 오십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중에도 노약자를 제외하면 전투 인력은 서른 명 정도였다. 멀쩡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크게 다친 이들은 신음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했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들의 상처를 돌봤다. 그보다 더한 상처는 죽음이 눈앞에 다다랐다는 절망에 빠진 눈빛이었다.

“안직 숨은 붙어있고,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있응게 겁 먹지들 말어유. 저것들도 많이 죽고 다쳤응게 피차일반이요. 쬐매만 힘 내십시다.”

순팔의 독려에도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같았다.

“암것도 읍씨 몸만 달랑 건사혀서 도망쳤는디 인저 뭘로 싸운단 말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엄 노인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격납고 안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담양 댁이었다.

“당최 전생에 먼 죄를 지었다꼬 이런다냐. 아무리 팔자가 사납기로서니 부귀영화는 집어치고, 이역만리서 하루하루 목숨 부지하며 개우 산다니. 더 살아서 뭘 하꺼나.”

담양 댁의 신세한탄은 곡소리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눈가에도 하나둘 눈물이 고여 들었다.

“아짐씨, 곰방 디질 것마냥 청승 떨지 좀 말어유. 왜 딴 사람덜까지 기운 빠지게 그랍니까.”

순팔이 담양 댁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머라? 저게 시방 뭐라고 씨부리는겨? 어디 한번 해보자는겨?”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무슨 사달이라도 낼 듯 달려들었다.

“아이구, 같은 핀끼리 왜들 그랍니까, 고정들 하셔요.”

동영이 겨우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동영의 제지에도 순팔과 담양 댁은 한참을 씩씩거렸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혔을 즈음, 격납고 입구 쪽에서 망을 보러 나갔던 열 살 진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람들은 일본군이 치고 올라온 줄 알고 기겁했다. 동영과 순팔은 가까스로 챙겨온 총을 들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놈들이 올라왔느냐? 몇이나 되더냐?”

동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진우의 양 어깨를 잡고 물었다. 진우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동영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녀유. 놈들은 안직 안 보여유. 근디 지가 요상한 물건을 봤다니께요.”

“요상한 물건? 어디서 뭘 봤는디?”

순팔이 동영의 틈을 끼어들며 진우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어기, 뭐시냐. 똥이 매려워 활주로 옆댕이 숲 속에 들어갔는디요. 다 싸고 잎새기로 밑을 닦다 보니 머가 눈에 들어오는 거 아니겄어요. 바지춤을 올리고 가서 보니께 길다란 막대기 뭉치랑 심지가 삐져나온 게 여럿 쌓여있었슈. 또 그 옆댕이에는 주먹밥 멩키로 둥그런 게 한 무데기 있고요. 암만 봐도 폭탄같았슈.”

“폭탄? 폭탄이라고?”

“그렇다니께요. 아무래도 저놈들이 숨겨놓은 거 같어유?”

동영은 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팔과 엄 노인을 앞세워 격납고를 나갔다. 그러곤 곧장 숲속으로 향했다. 그리고 진우가 가리킨 곳에 도착했을 때, 말 그대로 장막으로 덮은 더미를 발견했다. 장막을 걷어치우자 진우가 말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건 바로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이었다.

“됐다. 이거면 우린 살수 있다.”

동영은 순팔과 엄 노인을 번갈아보며 반색했다. 순팔과 엄 노인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일행은 다시 피난처인 격납고로 들어갔고, 곧바로 대책 회의가 이어졌다. 대책 회의에서는 의도치 않게 생긴 무기로 일본군에 반격할 작전이 펼쳐졌다. 작전은 자정 무렵 끝났고, 곧장 행동개시로 이어졌다.

어둠에 잠긴 섬은 정적만 감돌았다. 보초를 서던 일본군 몇이 한데 모여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연기만 떠다녔다. 흡연을 마친 군인들이 막 원위치로 돌아가려는 찰나, 산자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금속음과 함께 작은 원통 서너 개가 동굴 쪽을 향해 굴러 내려왔다.

“저게, 뭐야?”

누군가 놀라 외치는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섬광이 폭발하며 고요했던 섬 전체를 뒤흔들었다. 뒤이어, 산 위에 있던 노역자들이 모두 와- 소리를 내며 아래로 물밀 듯 내려왔다. 저마다 손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쥐어져 있었다. 불붙은 심지가 끝까지 타들어 갈 즈음, 힘껏 동굴을 향해 던졌다. 공중을 가른 수십 개의 다이너마이트는 하나의 목표물에 집중적으로 날아갔다. 곧 땅이 뒤집히듯 폭발했고, 바닷모래와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안개처럼 덮쳤다. 혼란에 빠진 일본군들은 우왕좌왕했다. 섬은 순식간에 소음과 연기, 비명으로 가득한 전장이 됐다. 선발대인 동영과 순팔, 엄 노인은 그 틈을 타 단숨에 동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굴 입구에는 폭발에 숨진 시체로 즐비했다. 다치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조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간 듯했다. 동영은 순팔과 엄 노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동영의 눈빛에 두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작전대로 다시 동굴 입구에서 한두 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양쪽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세 남자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수류탄에서 핀을 뽑았다. 맨 먼저 동영이, 다음에는 순팔이, 마지막은 엄 노인이 동굴 안쪽을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쇳덩이는 차례로 벽에 부딪히며 짧게 튕겨 오르더니, 깊은 어둠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임무를 마친 셋은 재빨리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지진이 일어난 듯 지축이 흔들렸다. 수류탄 폭발음이 동굴을 울리며 천장을 때렸다. 둔탁한 굉음은 벽과 벽, 돌과 돌을 부딪치게 했고, 메아리는 수십 갈래로 갈라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붉은 섬광이 동굴 깊은 곳을 번쩍 밝히자, 벽면에 새겨진 바위 결까지 순식간에 드러났다.

뒤이어 돌조각과 모래 먼지가 폭풍처럼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동굴을 감싸고 있던 산자락 돌무더기가 굉음에 밀려 쏟아져 내렸다.

조선인들은 밖에서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폭발음이 생길 때마다 아낙들은 아이들을 꼭 안고 귀를 막았다. 총을 든 남자들은 동굴 입구 쪽으로 향해 총구를 세웠다. 밖으로 뛰쳐나오는 일본군을 쏠 참이었다. 잠시 후, 폭발음이 멎었다. 긴 메아리가 사라지고, 동굴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동굴 쪽에서 살아있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됐고, 맘 졸이던 사람들은 그제야 긴장의 끈이 탁, 풀렸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조선인들의 승리였다.

“우리가 이겼네. 우리가 일본군을 다 쓸어버렸네.”

“그러네유.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네유.”

동영과 순팔, 엄 노인도 손을 꼭 잡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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