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
“뒤처리는 해야제.”
동굴 속은 짙은 흙냄새와 불안한 정적이 감돌았다. 조선인들은 무너진 흙더미에서 일본군의 무기를 끄집어냈다. 부서지고 조각난 뼈들은 사방에 흩어졌고, 뼈에서 튀어나온 깨지고 터진 살점은 덩어리째 군데군데서 발견됐다. 죽은 자의 참혹한 시신을 접할 때마다 산 자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가시지 않은 화약 냄새가 육신의 썩은 내와 섞여 코를 자극했다. 사람들이 바위를 고르며 시체를 수습하고 있을 때, 동굴 속 어디선가에서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신음 속에는 죽어가는 자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절규가 묻어있었다.
“이게 뭔 소리여? 저 안에 누가 살아있나베?”
순팔이 동굴 쪽을 향해 귀를 쫑긋하며 말했다.
“귀신이믄 어쩌냐?”
엄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동영의 눈치를 살폈다. 동영은 총자루를 집어 들고 동굴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곤 동굴 입구 쪽에 다다르자 발걸음을 죽인 채 천천히 안쪽을 주시했다.
“누구냐?”
총구를 안쪽으로 겨눈 동영이 소리쳤다. 동글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머지않아 무너진 바위 더미에서 손 하나가 쑥 삐져 나왔다.
“날 좀 살려다오.”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카이였다.
“사카이? 사카이 대좌냐?”
“그렇다. 제발 날 꺼내주게.”
동영은 사카이의 부탁에 등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사카이에게 다가가 돌 틈으로 보이는 정수리에 총부리를 갖다 댔다.
“넌, 절대 용서 못 한다. 넌, 우리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그러고 넌, 순자의 원수다.”
동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생전에 생글생글 웃던 모습이, 죽어 꿈에 나타났던 슬픈 순자의 모습이 눈앞에 교차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순자를 죽인 건, 이토다.”
목숨을 구걸하는 자의 마지막은 다급하고 간절했다. 하지만 동영은 사카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동영은 결심한 듯 방아쇠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조선인을 고문하고, 순자를 범한, 전쟁 범죄자는 그렇게 최후를 맞는 듯했다. 동영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와 그의 귓등에 비수처럼 꽂혔다.
“살리라. 순칠이 애비다.”
동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왔다. 담양 댁이었다. 담양 댁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동영에게 쏘지 말라고 했다.
“산 목심을 어째 죽이나. 애도 살아 있는디. 사람 구실은 못할틴게 내비두라.”
동영은 고민했다.
‘이 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다른 조선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죽인다면 순자의 아이는 누가 어떻게 키울 것인가.’
그때 담양 댁을 따라온 아낙들이 울면서 동영을 막아섰다.
“그냥, 살려주시오. 우리가 당했다고 똑같이 맹글어 뭘 하겄소. 순칠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말에 동영은 총부리를 거뒀다. 그리고 돌무더기를 치우고 다 죽어가는 사카이를 끄집어냈다. 사카이는 ‘고맙다’는 말만 남기곤 실신했다. 사람들이 그를 데려다 막사에 데려다 눕혔다. 상처를 치료하고, 미음을 떠먹였다. 사카이는 사흘 만에 몸을 회복했다. 하지만 포승줄에 묶인 채 옴짝달싹 못 했다. 이따금 볼일을 볼 때만 두 명의 조선인들이 대동한 채 바닷바람을 쐴 수 있었다. 그렇게 사카이는 일본군 중에 구사일생했다.
“그놈, 참. 목심도 길구나.”
사카이가 똥오줌을 누고 돌아올 때마다 몇몇 조선인들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침을 퉤 뱉으며 손가락질을 했다. 사카이는 깨어난 뒤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인지, 실어증에 걸렸는진 알 수 없었다.
하여튼 사카이의 말문은 무너진 동굴처럼 꽉 닫혔다. 일본군을 물리친 조선인들은 섬에서 탈출을 방도를 찾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올 구세주는 없었다. 나라를 빼앗긴 조국도, 고향 사람들도, 그들을 구출하러 올 힘도, 배도 없었다. 잔물결 일렁거리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혹여나 타국 어선이라도 지나가지 않을까,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치면 여럿이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짓는 날이 며칠이었다. 식량은 늘 부족했고, 굶주린 자들의 표정은 점점 절망적으로 변해갔다. ‘진짜 고래’라도 한 마리 떠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서서히 꺼져갔다.
동영은 일본군 지원병들이 타고 온 배를 살펴보기로 했다. 순팔과 엄 노인 외에 힘이 남아있는 청년 대여섯을 데리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 안은 적막했다. 혹시라도 누가 숨어있다 공격하지 않을까 조선인들은 잔뜩 긴장한 채 선 채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먹을거리를 찾았다. 식당칸을 훑어보고, 관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으메, 징한 거. 워찌 먹을만한 게 한 개도 읍다냐.”
순팔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긍게 말이여. 이놈들 여기 죽으러 온 것도 아닐건디 말여.”
엄 노인이 순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동영은 순간 엄 노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그거야, 그거.”
동영의 호들갑에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동영은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천천히 설명했다.
“엄 노인네 말대로, 저 놈들이 여그 죽으러 왔겄소? 우리가 지들을 다 때려부실 거라고 생각을 했겠냔 말이오. 그른디 다시 돌아갈 식량이 한 개로 음따는게 말이 된다고들 보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동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못해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순팔이 답답하다는 듯 채근했다.
“아따, 그런 건 우리덜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려서 니가 하고 싶은 말이 뭐여.”
“분명 배 안에 먹을 게 있다. 만약을 대비해 어딘가에 숨겨놓은 거여. 흔히 생각 못할 곳에다가.”
“그런 데라믄, 한 군데 있긴 허지.”
엄 노인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짧게 말했다.
“거기가 어딘디? 대체 어디란 말이오?”
순팔은 보채듯이 따져 물었다.
“흔히 생각 못하는 비밀 장소믄 뒷간뿐이 더 있간.”
일행 중 한 명이 농담조로 말을 뱉었다.
“저 양반이 지금 장난허나. 우덜이 그런 말이나 지껄일라고 여기 온 줄 아소?”
순팔이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발끈했다. 순간, 엄 노인이 크게 웃으며 순팔을 막아섰다.
“아닐세. 저 양반 말이 맞네. 뒷간에 숨겨뒀을 가능성이 커. 거기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장소 아닌가.”
그제야 동영과 순팔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변소를 찾기 시작했다. 선체 내 변소는 식당칸에서 나가 우측에 설치돼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큼한 지린내와 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부는 일곱 평 정도였고, 밑을 닦을 지푸라기나 종이 따위는 없었다.
“뭐여, 똥냄새만 잔뜩나지 먹을게 어딨냔 말이여?”
잔뜩 기대했던 순팔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때, 순팔의 뒤에 있던 동영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기 검은 천으로 가려놓은 게 뭐지? 순팔이 자네가 가서 젖혀보게.”
동영의 지시에 순팔은 조심조심 똥통을 가로질러 다가가 정체 모를 천을 천천히 걷었다. 안에는 쌀 포대와 건어물, 술병들이 새끼줄로 묶여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우와! 찾았다, 찾았어. 이제 우린 살았다!”
식량 더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서로 얼싸 안고 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