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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13화

밀리환초

경악

by 류재민

악몽에 시달린 동영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순팔이 어디가 아프냐며 걱정스레 물었지만, 동영은 아니라고 손을 가로저으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담양댁이 동영의 뒤를 따라나왔다.

“워째 안색이 안조응게, 뭔 일이 있다냐?”

“일은 무신요. 암일도 없응게 아짐씨는 들어가서 마저 한술 뜨소.”

담양댁은 더이상 동영에게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담양댁이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동영이 담양댁을 불러세웠다.

“혹시…꿈해몽 할 줄 아오?”

“꿈해몽? 뭔 놈의 꿈을 꿨질래 그런다냐?”

“꿈에 순자가 보였소.”

“뭐시? 순자가?”

“근디 뭔가 께름찍한게…….”

동영이 말을 잇지 못하자 담양댁이 채근했다.

“뭔디 그래 말을 못허냐? 순자가 어쨌길래? 잘 있더나?”

“그거이 아니오. 우물서 길어 올린 두레박에서 얼굴이 비칬는디, 사램 얼굴인지, 귀신 얼굴인지 영 분간이 안 가더만요. 여기저기 몸이 다 상했부러서 기겁을 하다 깨부렀소.”

“하이고, 우리 순자가 어째 그래 꿈에 나왔을꼬. 을매나 아프게 갔게 그랬을까. 불쌍한 것. 쯧쯧쯧.”

“벼랑서 떨어졌으맨 바위에 부딪치고 파도에 씰려서 떠내렸갔으면 오죽 하겄소.”

“시신은 읍써도 빈 생여라도 메고, 초상까지 치래줬는디 안직도 혼이 구천을 떠도나싶다.”

담양댁은 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동영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망자가 한이 맺히몬 꿈에도 나온다더라. 필시 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다. 억울한 뭔가가 있는 게 분명허다.”

“억울하다니? 그럼 벼랑서 떨어져 죽은게 아니란 말요?”

“우짜믄 그럴 수도 있겄어. 순자가 꿈에 그래 나왔으면.”

동영과 담양댁은 누군가 떠올랐다는 듯이 동시에 눈이 커졌다.

“혹시, 그자가?”

동영이 건넨 말에 담양댁은 대답 대신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새벽 물질을 나갔던 노역자 둘이 돌아왔다. 망태기에는 소라 몇 개와 물고기 서너마리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둘 다 입술은 파랬고, 넋이 나간 듯했다. 뭔가 공포에 질릴 듯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동영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물이 찼소? 왜들 그리 떠시오?”

둘 중 한 명이 겨우 말을 뗐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동영과 담양댁 모두 경악했다.

“시체를 봤어. 뼈만 남은. 옷가지를 보니 우리 사람들이었네.”

“우리 사람들? 그게 누구요?”

그들은 발견한 시체가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어쩔줄 몰라했다.

“괜찮소. 지금 여긴 우리 밖에 없으니 어서 말해 보랑게.”

“순, 순자여. 을매 전에 읍써졌던 김 노인이랑.”

담양댁은 순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뒤집히며 실신했다. 동영도 정신이 혼미해지며 심장이 터지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물질 끝내고 나오는디 절벽 근처 쪼매난 동굴이 있더라고. 젖은 옷 갈아입을라꼬 들어갔는디 입구에 시신이 두 구나 있는 게 아니겄어. 살은 이리저리 헤집어 읍꼬, 뼈랑 앙상해. 얼굴을 자세 보니 그 두 사람 아니겄어. 그 길로 기겁하고 도망쳐 온 것이여.”

상황을 전해 듣던 동영은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상상만 해도 숨이 멎는 듯했다.

“당신들 말고 다른 본 사람은 없소?”

“이른 새벽이라 암도 읍썼어. 근디 말여, 가만 봉게 살점이 날카롭게 베껴진 게 칼을 쓴 거 같어. 상어가 뜯어 먹은 자국이 아니여.”

“아니, 그럼 누가 그런 짓을?”

동영은 죽은 사람을 해부하고, 칼로 살을 헤집었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일단 일행은 철수했다. 대신 동굴 안 사람들, 특히 일본군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담양댁은 반나절 만에 깨어났다. 깨어나선 동영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에 다시 혼절했다가 다음 날 새벽 몸을 일으켰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담양댁은 몰래 동영을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파도 소리만 적요를 깨우는 바닷가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저 놈들 짓이다. 확실하다.”

“저 놈들이라믄 이토요, 사카이요?”

“둘 다! 필시 그 두 놈들이 꾸민 게 분명 혀. 안 그램 우리 순자한티 저래 몹쓸 짓을 할 인간들이 여그 누가 있간디?”

분노한 담양 댁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진하게 드러났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욕지거리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동영은 순자가 나온 꿈을 떠올렸다. 어쩌면 순자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고 꿈에라도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불쌍하고, 애절했으며, 섬뜩하고, 무서웠다. 인간의 탈을 쓰고, 같은 인간을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짓밟을 수가 있는가! 동영은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모를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건 바로 ‘분노’였다.

“아짐씨, 내는 도저히 못 참겄소. 저 것들 다 쓸어버려야겄소. 그래야 죽은 순자랑 김 노인 한을 달래줄라면 그 수밖에 읍겄소.”

동영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담양 댁은 재빨리 동영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오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여. 큰 소리 내지 말어. 그러다 누가 듣기라도 하믄 우린 다 끝장잉게.”

“그랴도 이건 아니잖소. 우리 조선사람이 개죽음을 당했소. 개죽음만 당한 게 아니라 고래고기라고 묵은 게 인육이었소. 다음은 아짐씨랑 내가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닝교. 은제까지 그래 당하고만 삽니까.”

동영은 담양 댁의 손을 뿌리치며 악다구니를 썼다. 담양 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동영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진정하길 바랐다. 담양 댁 눈에 담뿍 고인 눈물을 마주한 동영은 순간 감정을 억눌렀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담양 댁은 무슨 결심을 한 듯 근처 대 바위에 동영을 데려다 앉혔다.

“사람들헌티 알리자.”

“읭? 뭘 우짜려고?”

“다들 얘기를 들으몬 우리들멘키 속이 디집어불겄지. 그래도 맴을 단단히 먹어야 된다. 냉정하고, 차분히 작전을 세워야 순자랑 김 노인 원수를 갚을 수 있을기다. 내가 아짐씨들 맡을텡게 너는 아자씨들 단도리 해라.”

동영은 동굴로 돌아가자마자 순팔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저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순팔 역시 경악했다. 분을 참지 못한 채 이토와 사카리를 죽이러 간다며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순팔을 겨우 뜯어말린 동영은 담양 댁이 한 말을 전했다. 순팔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동영은 순팔과 함께 일본군에게 어떻게 복수할지 골똘히 생각했다.

“맨몸뚱이로 총칼을 든 군인들을 으떻게 때려잡을까?”

순팔은 민머리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동영도 막연했지만, 묘수를 떠올리려고 무진 애썼다.

“총은 읍써도 사램들 숫자는 우리가 더 많어. 영 승산이 읍는 싸움은 아니란 말이여.”

동영은 뭔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 순팔을 바라보는데, 표정에 기운이 느껴졌다. 순팔은 동영이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그의 얼굴에 가득 찬 자신감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뭔진 모르겄지만, 내는 자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텡게.”

“성님, 사람들을 모아주소. 우덜 둘이 핼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복수를 할라믄 다 같이 해야제. 치밀하게 준비해서 단번에 기습해야 합니다.”

동영과 순팔은 결기에 찬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팔을 재빨리 동굴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일본군 눈에 걸리지 않게 모두가 잠든 새벽 무렵, 잠든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조선인 노역자 전원이 동굴 뒤편 숲으로 모였다. 이들은 숲으로 오면서 순자와 김 노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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