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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11화

밀리환초

밀실합의

by 류재민

노역자들이 순자의 장례를 치렀다는 보고를 받은 사카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몸 정을 나눈 순자가 그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걸림돌을 제거했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다만, 순자의 행적이 탄로 나면 안 될 일이었다. 그러려면 이토의 입을 단단히 막아둬야 했다. 사카이는 이토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이토는 사카이가 자신을 호출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한줄기 미소를 흘렸다. 사카이의 방으로 향하는 이토의 군홧발 소리가 어느 때보다 경쾌하게 들렸다. 사카이 방 앞에 도착한 이토는 짧고 굵은 소리로 인기척 했다.

“대좌 나리, 이토입니다.”

“들어오게.”

방문을 열고 들어선 이토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사카이는 문 뒤에 숨었다가 이토가 들어오자마자 그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이토의 허리춤에 꽂힌 권총을 빼 다른 한 손에 거머쥐었다.

“벽으로 가서 이마를 붙이고 손들어.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도록.”

사카이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이토는 지시에 따랐다. 동굴 벽으로 둘러싸인 방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꽉 찼다. 천장 한가운데 하나뿐인 전등 아래로 날카로운 두 개의 그림자가 맺혔다. 권총 방아쇠에 걸린 사카이의 손가락은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이토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고, 뒷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대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이토 소좌.”

“핫!”

“순자를 어떻게 했느냐?”

그제야 이토는 사카이가 왜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겁박하는지 직감했다.

“이토 대좌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핫!”

이토는 바닥에 이마를 가져다 대며 대꾸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성공했다. 보고서나 기록으로 남을 일은 없다. 남는 건 너와 나뿐이야.”

바닥에 이마를 대고 납작 엎드려 있던 이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서 피범벅이 된 채 숨이 끊어져 가던 순자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는 자네를 믿는다. 하지만 네 입이 열리는 순간, 넌 죽는다.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이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순, 순자라뇨? 저는 그런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순자를 모른다?”

“그렇습니다. 이 섬에는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계집은 없습니다.”

그제야 사카이는 천천히 총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렴풋이 스쳤다.

“좋아, 그게 자네에겐 현명한 선택일게야.”

총성은 울리지 않았지만, 방안은 이미 피 냄새로 진동하는 듯했다. 다시 문이 열렸고, 이토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옮기면서 동굴 밖을 향하는 이토의 마음에 파도가 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 밖 조선인들은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구역에서 노역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굴 안에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때, 수평선 끝 지점에서 대왕고래로 보이는 고래 등에서 분수같은 물줄기가 쏴-뿜어져 올랐다. 그 모습은 해변에서 노역하던 아낙들 눈에까지 들어왔는데, 그들은 총 든 일본군의 불호령에 밥 짓기와 빨래로 눈을 돌렸다.

배급이 끊긴 섬에는 노역자들의 신음과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굶주림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군도 마찬가지였다.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먹을 게 없다는 현실은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린 배를 쥐어 잡고 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노역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은 배고픔에 더해 더위와도 싸워야 했다.

“동굴에 비축해 놓은 식량이 어느 정도인가?”

“보고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열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참모 회의를 주재한 사카이 질문에 보급 담당인 이시이가 어쩔 줄 몰라하며 대답했다. 이시이 답변에 참모들은 무거운 침묵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본국에서 연락은 없나? 언제 보급품을 가져다준다는 얘기가 없느냔 말이다.”

사카이는 다시 이시이를 다그쳤다.

“그게...전세도 불리하고, 해안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말을 잇지 못하는 이시이를 바라보던 사카이는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카이가 내쉬는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다. 동굴 안 회의실은 적막했고, 공기는 싸늘했다.

“조선인 노역자들 식량 배급을 최대한 줄인다. 제군들 역시 고통 분담 차원에서 동참한다. 이 섬에 있는 자들은 오늘부터 하루 한 끼만 먹도록 한다. 죽진 않을 거다. 아니, 죽어도 어쩔 수 없다. 보급선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라. 알겠나?”

사카이의 명령은 단호했다. 참모들은 일제히 네, 라고 답하며 결의를 다졌지만, 저마다 눈빛은 흐려져 있었다. 이토는 회의가 끝난 뒤 조선인 반장들을 모아 놓고 회의 결과를 알렸다. 끼니 담당 반장인 담양 댁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낙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동영은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곳곳에선 볼멘소리와 함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놈들, 일만 부려먹고 먹을 것도 안 주겠다니! 이럴거면 그냥 다 같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지, 안 그러요?”

장순팔은 악다구니를 쓰며 버럭거렸다. 동영은 화가 잔뜩 난 순팔을 뜯어말렸다. 말은 안 했지만, 동굴 안에 있는 조선인들 모두 순팔과 같은 심정이었다. 노약자들이 가장 걱정이었다. 일본군은 그날 저녁부터 배급량을 반으로 줄였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식량 가운데 일부를 노인과 아이들에게 덜어줬다. 노인들은 입 하나라도 줄여야 할 건디, 신세 한탄하며 밥을 넘겼다. 흐느끼며 흘린 눈물이 밥그릇으로 뚝뚝 떨어졌다. 일본군은 수렵 활동 인력을 늘렸지만, 양은 넉넉지 않았다. 밤마다 허기에 지친 자들의 신음소리가 컴컴한 동굴 안을 맴돌았다. 동영은 이리저리 뒤척이며 얼마 전 맛본 고래고기를 떠올렸다. 먼바다에서 고래 떼가 지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검은 바다에는 잔물결만 가만히 일렁였다.


그들의 터전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건 배고픔이 극에 달하고, 전쟁의 끝이 다가왔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이토는 사카이에게 해안가에 고래 한 마리가 떠밀려 왔다는 보고를 올렸다. 죽은 고래는 해안 경비를 돌던 병사가 발견했고, 그는 동료 병사와 함께 마대자루에 담아 군영으로 가져왔다고 전했다. 죽은 고래가 잡혔다는 소식은 삽시간 조선인들에게 퍼졌다.

“죽으란벱은 읍나봅다, 하느님이 도우셨어.”

담양 댁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머지 노역자들도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술렁였다.

“한참 만에 고래고기를 먹겄구먼.”

장순팔은 신이 난 표정으로 동영을 바라봤다. 동영 역시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순팔의 어깨를 툭 쳤다.

“그나저나 고기는 언제나 줄라나?”

“긍게 말이여. 뱃가죽이 쪼그라붙어 등짝이랑 착 달라 붙겄구만.”

조선인 노역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일본군 장교 이시이가 동굴 앞에 나타났다. 그러곤 담양 댁과 동영을 향해 손짓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를 두 사람은 주섬주섬 일어나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몇 분이 지난 뒤 밖에 나갔던 두 사람이 돌아왔다. 담양 댁은 이시이가 전한 말을 조선인들에게 전달했다.

“요번에 잽힌 고래는 말이시, 두 마리라고 허네.”

“뭐? 두 마리씩이나?”

“그럼 우리 줄 것도 많겄네 그려?”

“설마, 우리꺼정 올 게 많을까?”

눈이 휘둥그레진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렸다.

동영은 술렁이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두 번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담양 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잽힌 건 두 마린디, 몸집이 작다네. 그려서 고기양이 그리 많지 않을거외다. 그러긴 해도 우덜 몫도 섭섭지 않게 준다고 쪼매 기다려보랍디다.”

담양 댁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제 살았다 싶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구워 먹었으면 좋겠다는 둥, 삶아서 수육을 먹어야 맛있다는 둥, 회로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둥, 죽은 고기는 회로 먹는 게 아니라는 둥, 저마다 내놓는 말과 말이 뒤섞여 동굴 안 공기를 감쌌다. 다만, 순팔은 한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지난번 떠내려온 고래는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해체 작업도 조선인들이 진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고래고기를 본 사람도 일본군이고, 해체 작업 역시 그들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순팔은 일본군이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을까 여기면서도 모처럼 고래고기를 맛본다는 생각이 컸는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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