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부터 입체파까지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한, 성공한 카피캣
휴가를 맞아 한국을 가게되면서 두 곳의 전시회를 미리 예약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라울뒤피 전시였다.
라울 뒤피라는 작가 이름이 생소하기도 했고 잘 몰랐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로 전시회 소개영상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데, 단순히 원화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나 미디어 아트까지 컨텐츠 구성과 기획이 상당히 알차 보였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모네와 최근에 매력에 빠지게 된 마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는데, 이를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표현했다니 좀처럼 보기 드문 전시라는 생각이 들어 냉큼 예약하였다.
평일 목요일 오전 11시 반쯤 입장하였는데도 생각보다 사람이 좀 있었고, 운 좋게 도슨트도 중간부터 들을 수 있었다.(예술의 전당 도슨트는 총 3번 진행하는데 이 날 11시, 14시 도슨트 두 번 들었다!. 아쉽게도 유튜브 채널로 자주 뵙는 김찬용 도슨트님이 이 날은 담당이 아니셨지만, 다른 도슨트분도 설명을 너무 재밌게 잘해주셨다.)
늘상 보아오던 일본의 전시회는 다르게 원화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닌 미디어 아트라던가 50분짜리 다큐멘터리도 기획되어 있었고, 직접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색달랐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라울뒤피의 대표작들로 생각되어지는 원화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던 공간은 사진촬영이 불가했다는 것. 어느 전시회나 마찬가지겠지만 감명깊게 감상한 작품들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는 것은 참 아쉽다.
(굿즈로 대리 만족했지만...)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이나, 패션작품들, 미디어 아트 전시공간 구역은 사진 촬영이 허가 되었지만 그 외 인물/정물/바다 테마의 주요 수채화 작품들은 사진 촬영이 불가하였다.
첫번째 테마는 인물 구역이였다. 이 곳에서 라울뒤피의 자화상과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첫번째 부인인 에밀리에 뒤피의 초상화는 이번 전시 메인 그림으로 소개 되었을만큼 인상적이었다. 선명한 파란색의 배경과 화려한 패턴의 옷 디자인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초기에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라울뒤피는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야수파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시점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두번째 테마는 정물 구역으로 뒤피만의 패턴이 드러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상파부터 야수파 입체주의까지 폭 넓은 영향을 받은 뒤피는 특정한 미술사조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초기엔 어디서 본 듯한 클리셰적인 요소가 뒤피의 작품에서 자주 관찰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비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이 향후 뒤피를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 대중적인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끈 라울뒤피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이러한 성공으로 훗날에는 꽤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라울뒤피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밝고 행복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선명한 채도와 산뜻한 터치감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가 겪었던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과는 정 반대되는 풍경들을 뒤피의 작품에서 만나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림만이 그에게 있어 유일한 탈출구이지 않았을까. 뒤피가 남긴 명언 중에 "삶은 내게 항상 웃음짓지 않았지만, 나는 삶을 향해 항상 웃음지었다." 라는 말은 뒤피의 작품 세계관을 명확히 보여주는 문구라고 생각된다.
뒤피의 고향은 프랑스의 르아브르라는 어촌 지역이다. 바다와 함께 나고 자란 뒤피의 그림에서는 바다가 자주등장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마지막 구역이 바다를 테마로 한 전시였다. 푸른색 바다를 사랑했던 뒤피. 바다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뒤피의 특징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세모모양의 파도라던가, 세모와 직사각형으로 단순화 시킨 집 모양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티스의 그림과 같이 색을 먼저 칠하고 그 위에 선을 덧 대어 형태를 구분지었던 것 처럼 뒤피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기법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는데, "선은 형태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라며 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뒤피. 실제 수채화 작품을 그리기 전 다양한 드로잉으로 습작형태의 작품들도 전시되어있었다. 마치 유치원생이 그린 것 처럼 쉽고 단순해 보이는 선도, 사실은 숱하게 많은 연습의 산물이겠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뒤피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테마 중 하나는 음악이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접했던 뒤피는 바이올린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작품을 남긴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 배경에 검정색 윤곽선으로 바이올린과 테이블을 구분한 단순한 그림이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약 6천여점의 수채화 작품에 50여개의 시집, 소설 등에 일러스트를 남긴 라울 뒤피. 특히 시인 기욤아폴리네르가 자신의 동물시집에 실을 판화를 라울뒤피가 작업하면서, 그의 인생은 또 한번 변화를 맞이한다. (사실 처음에 기욤은 판화를 피카소에게 의뢰하였지만 피카소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동물 시집이 인기를 끌면서 정교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뒤피의 판화 작품도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 때 패션과 아트를 결합한 선구자인 폴 푸아레가 패션 작업을 함께할 것을 뒤피한테 제안한다. 이로서 뒤피의 커리어에 패션을 포함한 패턴 직물, 장식 예술의 역사가 시작된다. 전시된 패션 작품을 보면서 느꼈지만, 굉장히 아름답고 모던했다. 지금 입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디자인도 패턴도 현대적이었다.
1936년 뒤피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된, 파리 국제 박람회의 벽화 의뢰가 찾아온다. 10미터 높이의 상당한 규모의 작품 의뢰였는데 "전기"의 중요성과 안정성을 소개하고 알리는 것이 테마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기와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 (109명!) 을 그림으로 그린, 전기의 요정이란 작품이 탄생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석판화 오리지널 연작 10점이 출품 되었는데, 미디어 아트로 실제 그 벽화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공간도 전시되어 있어 더 인상깊었다.
어쩌다보니 천천히 모든 컨텐츠들을 음미하고 50분짜리 다큐멘터리도 끝까지 감상하다보니 무려 전시장을 나오는데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화가였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수채화의 거장을 알게 된 것 같아 새삼 뜻깊었다. 유명하고 훌륭한 작가들이 너무 많다. 이런 보물같은 작품들을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