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쿨톤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아침부터 도쿄는 흐리고 비가 왔다. 분위기 전환 겸 모처럼 맞이하는 여유로운 주말이라 지난달에 미리예약해 둔 마리로랑생 전을 갔다. 사실 마리로랑생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1900년대 활동한 프랑스 여류작가로 피카소와도 인연이 있던 그녀는 당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세탁선을 드나드는 유일한 여자 화가였다고 한다.
20세기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이 대부분 남자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존재가 상당히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한편, 나 역시 마리 로랑생이라는 작가를 이번 전시를 통해 안 것처럼, (여자기때문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싶진 않지만) 작품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전시회 가기 전 마리 로랑생에 대해 좀 찾아보니,
파스텔톤의 색채와 인물과 배경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군데군데 나타나는 큐비즘의 영향들이 그녀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개인적으로 연한 핑크를 좋아하는 나 역시 이번 전시회 포스터만 보고 예약을 했으니ㅎㅎ 그녀의 작품에 대부분 사용되는 연한 분홍빛과 푸른빛의 조화로움을 실제로 감상하면서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여름 쿨톤이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작품 테마는 주로 소녀나 여인들이 중심이었는데 꽃다발이나 강아지, 새와 같은 동식물이 악센트로 함께 등장하는 작품이 많았다. 그레이, 핑크, 초록, 보라색 등의 온화한 파스텔의 색조로 창백한 피부톤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들의 묘사가 대부분의 작품에 주를 이루었는데 독창적인 기법으로 자신만의 회화체를 구축한 마리로랑생의 작품을 보고 비평가들은 “섬세한 큐비즘”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리로랑생은 회화뿐만 아니라 패션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가 활동했던 1920-30년대는 모던 여성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만큼 여성성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화려함에서 심플함으로 변하는 과도기에 있었고 이를 주도했던 자가 바로 코코 샤넬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던 여성을 한마디로 드러내는 아이템이 바로 코코샤넬의 커리어의 시작점이기도 한 “모자”였다. 그래서인지 마리로랑생의 여러 초상화에도 다양한 디자인의 모자를 쓴 여성들이 등장한다.
마리로랑생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 한 작품들로 구성하여 진행한 2011년 샤넬 패션쇼의 영상을 끝으로 전시회가 마무리되는데 파스텔톤 색채의 향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마리로랑생 회화 작품에서 느껴졌던 나풀거리고 여리여리하고 샤랄라 한 이미지들이 패션쇼의 작품에서 그 색채와 질감이 제대로 구현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예술가 집단 속 남자들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며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그녀, 동시대에 살았던 코코샤넬과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하며 오묘한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갔을 그녀의 생전 모습을 상상하며 공감도 하고 위안도 받고 스스로를 격려했던 그런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