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꽃이 피기 시작한 것 같은데 평일 내내 비가 오더니 이번 주말은 반짝하고 날이 개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벚꽃은 만개의 단계를 지나 초록 잎사귀가 나오기 시작하는 끝물에 접어든 모습이었다.
늘 짧게 피었다 지는 벚꽃, 그래서 더욱 아쉽다. 벚꽃처럼 화려하지만 매우 짧은 생을 살았던 에곤실레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천재화가였던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피카소나 반 고흐처럼 더 많은 대작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아쉬움 때문인지 몰라도 에곤실레를 한번 알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다.
28살이라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200여 점의 대작들을 남긴 에곤실레. 정통 미술은 거부하며 그만의 독특한 회화 기법을 발전시키며 다양한 자화상, 누드화, 풍경화를 탄생시킨 그는 미술사의 이단아, 반항아라는 수식어가 참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자화상을 통해 본인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을 직시하고자 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그의 자화상들은 전체적으로 형태나 몸이 뒤틀려 있을지라도 시선은 늘 관객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에곤실레는 표현주의 (역사, 신화가 아닌 인간의 불안, 절망, 희열 등의 감정을 회화로 표현하는 것)의 대가인만큼 그의 자화상은 일반적인 인물의 초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점도 에곤실레가 뛰어난 화가이자,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은 솔직히 아름답거나 예쁘진 않았다. 몸과 형체가 뒤틀려있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안한 긴장감을 자아냄과 동시에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않은 색감 때문인지 오싹한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곤실레의 자화상의 시선만큼은 항상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관객을 직시하고 있다. 본인이 누구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아이덴티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 강렬한 시선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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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실레는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철도 기관사를 근무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기차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실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정은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열다섯 살 무렵 아버지는 매독으로 돌아가셨는데 남편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어머니의 무덤덤한 태도나 슬퍼하지 않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실레는 그 영향 때문인지 어머니에 대한 혐오와 불신이 그림에서도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피에타를 오마주 한 작품 속 (어머니와 두 아들)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모성애나 따뜻함이 전혀 느껴질 수 없는, 마치 해골처럼 무표정한 모습에 기괴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는데 어머니에 대한 실레의 복잡한 감정이 투영된 듯싶었다. 실제 그는 평생 어머니와 연락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실레의 스승은 그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클림트는 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봤던 것 같다. 이번 전시회는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도 일부 전시되었는데, 빈 분리파란 오스트리아 빈에서 1890년대 결성한 예술가 집단으로 그들의 캐치프레이즈는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였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인상주의와 아르누보(=프랑스어로, 직역하면 새로운 미술이란 의미)의 영향을 받은 회화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 화가들은 말 그대로 기존의 아카데미즘이나 정통 미술,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 자신들의 예술을 '분리'시키려고 했고 그 주도자가 바로 클림트였다.
이번 전시는 아르누보부터 시작하여 빈 분리파의 대표 화가들의 작품들이 초반에 전시가 되어있었고,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에곤실레의 작품들이 테마 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의 스토리라인을 생각하며 그림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다 보니, 미술사조의 전체적인 흐름을 같이 파악해야 어떤 맥락에서 이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클림트의 작품이 갖는 의미가 단순 황금 빛깔이 아름다워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분리파의 맥락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맛이 확실히 달라지지 않을까) 미술을 이해함에 있어 역사 (=미술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에곤 실레 작품의 첫 테마는 앞서 설명한 자화상이었고, 두 번째 테마는 여성에 대한 작품들이었다. 실레는 초기에 발리라는 여성과 4년 간 연애와 동거를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발리가 아닌 다른 (부잣집) 여성과 결혼하는 선택을 하긴 했지만, 발리를 정말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슬픈 여인>에 등장하는 여성이 발리의 초상화라고 하는데 실제 발리의 머리가 붉은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검은 머리의 여인으로 자칫 발리가 아닌가?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발리로 보이는 여인의 머리 뒤로 빼꼼히 에곤 실레 자신의 자화상을 붉은 머리로 그려 넣은 모습이, 간접적으로 발리의 슬픈 감정이 본인 때문이라는 것을 표현함과 동시에 인물 간의 관계나 표현 역시 정말 천재화가답게 기발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슬픈 여인>에 등장하는 에곤실레의 모습은 참으로 얄미워 보였다.
세 번째 테마는 풍경화였다. 풍경화 테마에서만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용되었다. 표현주의에 대가답게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풍경화에 녹이며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빈을 떠나 체코에서 생활했을 때 풍경화를 많이 남겼던 그는, 특히 에곤 실레 어머니가 살았던 고향 (크루마우) 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 어머니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녀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테마는 그의 작품에 가장 많은 이슈들을 남겼던 누드화와 1918년 결혼 이후 정서적으로 안정된 그의 달라진 화풍들로 표현된 작품들로 마무리된다. 발리가 아닌 중산층 여성과 결혼한 그는 아내의 초상화도 그림으로 남겼는데, 에곤실레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아름다운 초상화와 같은 느낌이 들만큼 색채표현이나 몸의 형태, 볼륨감, 굴곡 등 이전에 비해 왜곡된 표현이나 긴장감 넘치는 구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결혼 이후 정서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인지 가정을 이룬 행복 때문인지 이전과는 다른 화풍으로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찰나, 아내와 뱃속에 있던 아이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 역시 가족이 떠난 지 4일 만에 스페인 독감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만약 에곤 실레가 스페인 독감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뱃속에 있던 아들도 무사히 태어나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면? 그런 행복한 나날들이 지속되어 발리보다 자신의 와이프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뿐인데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이 180도 변화된 화풍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었던 그였기 때문에, 더 오래 살았을 때 그가 경험할 수 있는 많은 영감들이 작품으로 어떻게 나타났을까 하는 기대와 상상과 아쉬움의 반복 속에서 결국엔 에곤 실레에 대한 "미련"만 더 커져버린 그런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