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입맛대로 시간과 기억을 편집한다
시간은 흐른다고들 말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하지만 우리는 정말 그렇게 시간을 살아내는가? 한 장면에 오래 머물고, 어떤 감정은 현재를 비틀며 되살아나고, 어떤 기억은 존재의 구조에 균열을 남긴다. 이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휘어지는 감각이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기억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이자, 시간, 진실, 자아에 대한 질문을 가장 철저하게 밀어붙인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실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가?”
《메멘토》를 보다 보면, 앞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영화가 일반적인 선형 서사 구조—즉, 원인에서 결과로 나아가는 이야기 흐름—를 의도적으로 뒤틀기 때문이다. 《메멘토》는 두 개의 서사 흐름이 서로 꼬이고 교차하는 비선형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장면이 역순으로 배열된 컬러 시퀀스,
다른 하나는 정방향으로 전개되는 흑백 시퀀스다.
컬러 시퀀스는 영화의 메인 서사로, 관객은 사건의 결과를 먼저 보고, 그 원인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레너드가 단기기억상실로 인해 매 순간 앞의 일을 잊듯이, 관객도 매 장면마다 방향감각을 잃고 혼란을 겪는다. 반면, 흑백 시퀀스는 정방향으로 전개되며, 레너드의 내면 독백과 과거 회상을 통해 그가 어떻게 ‘진실’을 추적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두 시퀀스가 교차하며 관객은 점차 정상적인 시간 감각을 잃고, 레너드처럼 ‘지금 이 순간’만을 감각하는 상태로 몰입하게 된다. 영화는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진실이란 어떤 목적지에 도달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단서들을 조합해 ‘재구성’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질량이 클수록 시공간은 더 깊게 휘어진다.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감정의 ‘질량’이 클수록, 기억은 더 깊이 각인되고, 시간은 더 크게 휘어진다. 감정은 곧 기억의 중력이다. 슬픔, 사랑, 상실 같은 무거운 감정은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그 여운은 계속해서 현재를 침범한다.
《메멘토》의 서사 구조는 바로 이 ‘시간의 곡률’을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는 객관적 시간과 기억의 시간이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시계 속 시간은 일정하고 선형적으로 흐르지만, 《메멘토》의 시간은 뒤집히고 조각나며, 감정의 밀도에 따라 흔들리는 혼돈의 시간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시간의 질서는 영화 속에서 무너지고,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 해석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
레너드는 사진, 메모, 타투를 통해 기억을 대체한다. 이런 시스템은 진실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실을 편집하기 위한 도구이다. 레너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거짓임을 알면서도 메모를 남긴다. 레너드에게 있어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하는 내러티브인 것이다. 즉, 기억은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가변적 해석이자 서사이며, 일종의 자아 유지 장치인 것이다.
레너드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매일 새로운 나를 맞닥뜨린다. 정체성이 지속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도 ‘나’로 정의할 수 있을까? 레너드는 ‘이야기’를 이용한다. ‘아내를 잃은 남자’이자, ‘복수의 사명자’인 나. 이렇게 자신이 믿고자 하는 이야기 속에서 자아를 구성하고, 반복적으로 정의하며 각인시킨다.
사진, 타투, 메모는 모두 그 이야기의 단서로 활용된다. 이는 자아란 사실에 기반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반복되는 이야기적 수행임을 보여준다. 그는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재설정한다. 기억이 쌓이지 않지만, 행동의 반복이 정체성을 유지한다. 즉, 나는 ‘기억하는 나’가 아니라, ‘반복하는 나’, ‘믿으려 하는 나’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건 레너드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불편한 기억은 지우고, 상처는 미화하거나 왜곡하며,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과거를 해석한다. 인간은 객관적 진실보다 ‘감정적으로 버틸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한다. 우리 모두는 믿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이처럼 삶이란 기억된 사건의 집합이 아니라, 선택된 기억으로 짜인 하나의 거대한 픽션이다.
《메멘토》는 단기기억상실이라는 극단적 설정을 통해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뒤흔든다.
시간은 항상 앞으로 흐를까?
기억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일까?
이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느끼게 한다. 우리가 어떤 기억을 선택하고, 어떤 이야기를 반복하며, 어떤 진실을 견딜 수 있을지를. 그리고 그렇게 말한다. 삶은 선형적인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감정의 곡률 위에서 흔들리며 구성된 하나의 이야기라고. 우리는 그 이야기 위에서 오늘도 다시 ‘나’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