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와 구조화된 시간의 권력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정해진 구조 안에서, 허락된 시간만을 기억하는 것일까.
미셸 푸코는 “기억”조차도 권력의 틀 안에서 작동한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구조”를 꿰뚫는다. 이번엔 시간의 흐름조차 통제된 기억의 장치임을 말한다.
— 시간은 어떻게 ‘기억의 형식’으로 관리되는가
우리는 늘 ‘시간은 흐른다’고 믿는다. 어디로든 멈추지 않고, 균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하지만 푸코는 이 흐름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시간은 흐르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잘라놓은 조각을 따르는 것일까. 시간은 단지 자연의 리듬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서 시간은 언제나 조직되고, 분배되고, 규율화된다. 학교에서는 종소리로 나뉘고, 병원에서는 차트로 계산되며, 감옥과 공장에서는 행동의 리듬을 결정짓는 통제의 단위로 쓰인다.
푸코는 이를 “규율 사회의 시간성”이라 불렀다. 이런 구조 안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기 좋은 형태로 구획되고 관리된다. 언제 무엇을 기억할지, 무엇을 잊을지, 어떻게 분류할지.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시간과 함께 기억의 방식까지 배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내 기억”이라 부르는 그것은 정말 나의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서식일 뿐일까?
—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도록 길들여졌는가
기억은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푸코는 기억조차 사회가 구성한 틀 안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기억은 어느 날 불쑥 떠오른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주입되고 지워지며 만들어진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라고 권유받은 것만을 기억한다. 국가가 만들어낸 역사 교육, 미디어가 반복 재생하는 장면들, 기념비와 박물관, 연례 추모 행사…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기억할지, 어떻게 기억할지를 '설계'하는 장치다. 더 나아가, 기억은 감정의 언어로 작동하지만, 그 구조는 언제나 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한된다. 고통은 '치료 가능한 트라우마'여야만 의미 있고, 기억은 '유용하거나 교훈이 되는 것'이어야만 사회적으로 승인된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푸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셈이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것은, 정말 당신이 선택한 것인가?”
— 감정은 구조를 따를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푸코는 기억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왜 그것만 기억하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기억을 다시 쌓는 대신, 기억이 만들어진 조건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에게 진실은 기록이 아니라, 배제된 것들 안에 있다. 그 기억은 어쩌면 말할 수 없었고, 들려지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승인받지 못했으며, 기억될 가치가 없다고 취급되었던 것들이다.
그래서 푸코 이후의 윤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이건 단순한 철학적 고민이 아니라, 예술과 글쓰기, 감정의 표현 방식까지 바꾸는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의 시간만을 기억하고, 누구의 시간은 잊어버리도록 훈련받았는가. 예술이 감정의 기록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말해질 수 있는 구조 안에 있을 때만 인정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루는 감정은 ‘나의 감정’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게 길들여진 감정’일 수도 있다.
푸코는 말한다.
기억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지워진 시간을 다시 말하게 하는 "책임"의 방식이다.
말해지지 못한 누군가의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만드는 것—그것이 "기억의 윤리"다.
— 푸코가 남긴 것은 구조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 남아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잊히지 않는 걸까, 아니면 잊지 말아야 한다고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일까. 푸코는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왜 이것만 기억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조직된다.
기억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다. 기억은 말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감정의 조각들이다.
그래서 푸코의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도록 요구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