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백년의 고독』과 시간의 순환
어떤 시간은 되풀이된다.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은 채, 표정만 바꾸어 우리 앞에 또 나타난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다. 부엔디아 가문은 7대에 걸쳐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결국 예언처럼 멸망의 행로를 걷는다. 이 소설은 말한다. “기억되지 않은 것은 반복된다”고.
‘치매 사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SNS 속 일상은 ‘유통기한’이 있는 상품처럼 소비된다. 기억은 하루면 잊히는 파편이 되었고, ‘이야기’가 되지 못한 채 흩어진다. 서사를 잃은 개인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백년의 고독』 속 인물들이 늘 같은 이름을 반복하며 앞 세대의 실수를 되풀이했듯, 우리의 사회 역시 ‘기억상실증’에 빠져있다. 세월호, 이태원, 강남역, 반복되는 참사는 하나의 흐름이 아닌, 그때그때의 해프닝처럼 휘발된다. 언론은 더 자극적인 다음 사건을 좇고, 유가족의 말은 ‘정치적’이라는 프레임 속에 가려진다. 우리는 ‘지금만 존재하는 사회’, 단기 기억만 남은 ‘치매 사회’를 살고 있다.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학습의 포기다. 공동체는 기억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 기억이 축적되지 않고 매번 새롭게 소비된다면, 사회는 결국 한 자리에 멈춘 채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된다. 이름의 비극을 거스르지 못했던 부엔디아 가문의 남자들처럼.
비극을 끝내는 건 ‘이야기’
『백년의 고독』의 가장 비극적인 문장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예언서는 해석되었을 때 이미 늦은 후였다.” 이야기의 모든 결말은 이미 쓰여 있었고, 아무도 그 흐름을 멈추지 못했다. 반복은 예고되지 않은 파국이 아니다. 되려 너무 명확해서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던 결말이다.
이 반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무지에서 시작해 무관심으로 강화되고, 결국 책임 없음으로 귀결된다. 재난은 천재지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뉴얼의 부재, 훈련의 부족, 조직의 무책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럴 줄 몰랐다”고 말한다. 마치 매번 새롭게 당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 반복을 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이나 법이 아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야기되는 기억’이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비로소 서사가 된다. 그리고 서사가 시작되어야 변화가 가능하다. 『백년의 고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멜키아데스의 예언서를 해석했을 때, 마침내 그 모든 반복은 끝났다. 이야기를 해석한다는 건, 곧 구조를 인식하는 일이다.
결말이 아닌 시작을 위하여
『백년의 고독』은 단지 아름다운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다. 세계의 흐름, 국가의 역사, 공동체의 기억, 개인의 삶이 어떻게 얽히고 반복되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은유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은유의 반복 속에 살고 있다.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늘 “그때 그 사건”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봉인하려 한다. 그러나 ‘이야기되는 기억’은 구조를 흔들고 결국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니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한다. 그 반복은 필연이었는가? 파국은 정말 예고되지 않았는가?
『백년의 고독』은 이미 그 답을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늦기 전에 읽고, 말하고, 기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