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하는 게 있으면 잘 하는 것도 분명 있다.
나는 발표불안이 있다. 그래서 발표할 일이 있을 때 미리 병원에서 인데놀을 처방받는다. 병원에서 미리 약을 처방 받지 못할 때는 약국에서 우황청심환을 사서 마신다. 약을 먹어도 긴장되지만, 팔다리 후들거림이 덜하고 식은땀이 나지 않는다. 심장이 너무 뛰어 속 울렁거림이 없고 입마름과 목소리 갈라짐도 덜하다. 시야가 뿌옇게 보이거나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도 없어진다. 발표 준비에 꼭 필요한 약을 나는 까먹었다.
약을 처방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먹게 한 발표는 내 연구주제 발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어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대학원에 입학하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원 진학을 하게 된 이유는 공부하다 보면 길이 생길것 같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다 보니 나에 대한 회의가 거듭되었다. 회의가 거듭되니 불안은 커져가고 그래서 내 연구 주제는 ‘불안’이다.
발표 불안이 크기 때문에 내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부터 앞에 나가서 인사를 하고 연구 주제에 대해 발표하는 모든 순간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연습했다. 또 마음 한구석에는 내 연구 주제가 발표할만큼 가치있지 않아 자리에 참석하신 선생님들께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내 상태가 어찌되었든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고 내 차례가 되었다.
인사를 하고 앞을 쳐다보니 수십 개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 몸은 내 생각과 의지와 다르게 다양하게 반응했다.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 터져나갈 것 같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이 뿌옇게 보여 글자가 잘 안 보였다. 결국 나는 “여기까지 발표해도 될까요?”라고 사회자에게 묻고 발표가 끝났다. 사회자 선생님은 조금 당황하셨지만 재빨리 다음 순서인 질의응답시간으로 넘어갔다. 발표 대본을 쓰고도 제대로 읽지 못해 발표가 급마무리 되었는데, 질의응답이라니. 내 연구 주제에 대해 예리하고 미쳐 고민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 너무 긴장되고 질문이 멋져서 “좋은 생각이네요..!” 같은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피드백을 해주시는데 첫 말씀이 “불안 감소에 대한 연구인데 연구자가 제일 불안해보여요.” 잘했던 못했던 세미나는 끝났다. 세미나가 끝나고 다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통나무집이라는 오리고기 가게였다. 이 가게는 지도 교수님께서 옛날부터 애정하는 단골 가게라고 하셨다. 또, 등산객들 사이에는 유명 맛집으로 통하는 집이었다. 간판은 통나무집인데 안에 내부 인테리어는 통나무와 조금도 연관이 없다. 또 바닥은 가정집 장판이고 좌식 식당이 아닌데 사장님께서는 신발을 신고 오라고 하셨다. 입구부터 휘뚜루마뚜루인 통나무집.
자리에 앉자마자 사장님께서 불판에 오리를 올려주셨다. 내가 앉은 자리는 연기가 흐르는 쪽이라 눈이 너무 매웠다. 발표 못해서 우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눈물이 나지 않도록 애썼다. 정말 매운하루였다. 오리고기 한 판을 다 먹고 사이드 메뉴로 생선 구이가 나왔다. 생선 살을 한 점 먹었는데 겉바삭 속 촉촉. 생선 구이가 너무 맛있어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었다. 모두들 오리 고기를 먹을 때는 “맛있어요” 감탄사가 없었는데 생선 구이가 나왔을 때는 “우와, 여기 생선 너무 맛있어요.”라는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내 머리와 옷에는 오리 고기 냄새와 생선 냄새로 가득했다. 내 옆에 앉은 분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오늘 통나무집에 대해 생각했다. 어째서 오리 고기집인데 오리 고기는 맛이 없고 생선이 더 맛있는건지. 여기 오는 손님들은 생선 구이를 먹고 싶어 오리 고기를 주문하는 것 같다.
“생선 구이를 주문 했더니 오리 고기가 나왔어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이 위안이 됐다.
불안감소 연구를 하지만 연구자인 내가 제일 불안하다. 발표는 잘 못했지만 연구 주제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연구자임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발표를 못한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질 때마다 통나무집 사장님을 생각하자. 메인인 오리 고기는 별로여도 사이드인 생선구이는 맛깔나게 하신다. 사실 사장님께서 메인 요리로 무엇을 내놓던 상관 없다. 생선 구이가 맛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통나무집의 가치는 변하지않으니까. 나 역시 발표를 못했다고 내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발표는 별로여도 불안 연구는 맛깔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