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이웃이 되고 싶어요
서울 외곽, 나무와 어린이가 많은 동네, 구옥 아파트, 여기에 서른의 내가 산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커피를 사고 공원을 산책하다 달력을 보니 서른이 되어 있었다. 집안에서는 기억장치를 맡고 있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떨어진 생필품이 무엇인지 체크하고 장을 본다. 빨래 담당인 룸메이트는 순한 사람이어서 양말을 뭉쳐서 벗어놓는 내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잔소리는 딱 한 번만 한다. 나도 본받으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다.
우리의 포지션은 무해한 이웃이다. ‘무해한 이웃’이란 집안의 대소사는 모르더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안부를 물을 수 있고 옆집에 살면 안심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사 첫날에는 동네 이름난 빵집에서 산 롤케이크를 들고 옆집, 윗집, 아랫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자리를 비운 경우에는 문고리에 선물을 걸어두고 “안녕하세요”로 시작해 “잘 부탁드립니다”로 끝나는 쪽지를 썼다.
노력형 이웃인 우리는 롤케이크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꾸준하고 소소한 실천을 이어오고 있다. 경비아저씨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옆집과 안부를 나누고 짐이 많은 사람의 층수를 대신 눌러주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씩, 내가 태어나 자란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잘 있는지, 최초의 이웃들의 안녕이 궁금해지곤 한다.
내 고향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그걸 발견하면 컴컴한 밤에도 안심이 되었다. 옆집에는 아빠의 친구가 살았고 그 옆집에는 할머니의 친구가 살았다. 동네슈퍼라도 갈라치면 가는 길에 과수원집 할머니, 감나무집 할아버지, 누구네 어머니와 이름 모르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귀찮아서 모른 척 지나치려고 하면 “왜 인사도 없이 가니”가 뒤통수에 따라오곤 했다. 그래서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면 불안할 수 있단 사실을.
불안의 기억은 대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축 빌라에서 2년 정도 자취를 했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피곤했던 어느 날에 가위에 눌렸다. 꿈속에서는 낯선 무리가 집 앞에 찾아와 현관문을 마구 치면서 낄낄댔다. “야 문 열어”, “빨리 열어봐” 이런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악몽이었다.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공포 속에서 한참을 끙끙대다가 발버둥 치며 일어났다. 깨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현실인지 꿈인지 가늠이 되질 않아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날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집을 알아보면서 나는 내내 사람 냄새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세 번째 룸메이트와 함께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지하철까지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고 서울 중심지까지는 1시간이 걸리지만 나무와 어린이가 많았다. 그 사실이 좋았다. 한 번은 퇴근길에 집 앞 놀이터에서 어린이가 다가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준 적이 있다. “안녕” 나도 마주 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서는데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이 글을 통해 자랑하고 싶다. 우리 동네에는 멋진 이웃이 산다고.
글을 쓰면서 돌이켜보니 이사 첫날에 쓴 쪽지에는 이런 마음을 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 옆집에는 제가 살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나의 이웃들은 악몽을 꾸는 일이 없기를, 나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귀갓길에 만나면 안심이 되기를, 불안한 것 많은 인생에서 최소한 이웃으로 인해 불안할 일은 없길. 여전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