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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0. 2020

성스럽고 의미심장하다

3장 : 깊은 바다의 물고기는 물이 뭔지 모른다 _ 1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누군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그 예언 같은 소리가 나를 평생 이끌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1989년도 중학교에 들어갔다. 아침에 눈뜨면 기계처럼 가야 하는 학교는 다니는 이유도 재미도 몰랐다. 아침마다 구멍이 안 난 양말을 먼저 차지하려 자매들과 싸우고, 오늘도 같은 도시락 반찬이라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매일 학교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제주도에 온 서울말 쓰는 전학생은 친구 사귀기가 힘들었고, 그렇다고 살갑게 굴거나 귀염이 있어서 친구들이 절로 생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부모님들은 단지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우리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으며, 옆자리 친구의 매일 바뀌는 점심 반찬을 부러워하며 속을 터놓을 친구도 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한 채 1년이 지났다. 성적이 좋을 리도 없을 것이, 학교에서 완장이라도 찰나 치면 봉투를 들고 학교에 와야 한다는 엄마의 부담감은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무언의 압력이었고, 그 좋은 핑계로 성적은 반에서 딱 중간만 했다. 매일 만화책과 놀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바뀌었다. 이 학교에서 가장 독특한 외모와 기행을 일삼는 미술 선생님이었다. 길게 기른 검은 참 머리.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오 대 오의 가르마. 그 가르마의 경계를 단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넘나들지 못하도록 머리엔 언제나 포마드를 잔뜩 발랐다. (어떤 친구는 머리를 감지 않아서라고도 말했다) 그 사납다는 제주도의 바람에도 가르마는 절대 흩어지지 않았다. 맨 얼굴에 눈두덩이 아래만 검고 두텁게 칠한 언더라인은 매서운 눈매를 더욱 강조했다. 그 화장법은 그녀만의 스타일이었고, 웃을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삐뚤빼뚤 덧니가 마구 엉켜있어…, 좋게 말하면 ‘데쓰 락’ 스타요. 나쁘게 말하면 흡혈귀의 마누라쯤? 되는 외모의 30대 중반의 여선생님이었다. 신학기를 맞이하여 젊고 귀여운 남자 체육 선생님이 담임이 되기를 원했던 여학생들의 꿈은 무참히 무너졌다. 더 기염을 토하는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봄맞이 대청소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창문은 어린 여학생들의 야무진 손으로 먼지 하나 안 보이게 닦여 있었고, 선생님은 가끔씩 가래를 ‘캭~ 퉤!’하며 뱉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유리가 너무 잘 닦였다. 창문이 열린 줄 알고 있었던 선생님이 그만 창 밖을 향해 가래침을 날렸다. 하지만 창문은 닫혀 있었고, 누런 가래침은 창문을 따라 주르르 흐르며 긴 길을 냈다. ‘윽! 오 마이 갓’ 우리 반 아이들은 그 경악할 만한 모습에 외마디 비명을 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스리슬쩍 창문을 닦아내는 그분의 이름은 ‘이순자’ 선생님이다. 그녀에게 걸맞지 않게 순박한 이름은 오히려 선생님을 더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존재로 만들었다. 지금 선생님을 떠올려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 그지없다. 잊힐 수 없는 모습이다.


그때는 일 년에 네다섯 번 시험을 봤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계속 쉴 틈이 반복되었다. 시험 전이면 무조건 미술 시간마다 자율학습을 시키는 이순자 선생님은 본인이 맡은 반의 성적이 바닥을 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참을 수 없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꼴찌부터 일등까지 순서대로 이름을 호명하며 성적표를 나누어 주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 자존심에 상처 내는 것 따위는 오히려 사기 진작이 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행복은! 성적순이야!”가 음악 선생님의 ‘모토’였으니 선생님들 사이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성적표를 받는 날. 의외로 내 순서가 늦다. 이번엔 성적이 좀 올랐나?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교단 앞으로 쪼르르 나간 나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예언을 들었다.

“수진아! 너 미대 가려면 공부 좀 더 해야겠다?”

“네?”

“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미대에 가기 힘들어!”

나는 한 번도 미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손재주가 좀 있어 그림 경시대회에서 곧잘 상을 받았으며, 반에서 미화부장이나 하면서 학급 게시판을 꾸미는 일 정도만 하였으니…. 이순자 선생님이 미술 수업시간에 나의 가능성을 보았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선생님의 그 말은 나에게 천둥번개 같은 신의 계시로 들렸다.

‘난 미대에 가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그것도 서울에 있는…. 지금까지 몰랐어’

정말 그랬다.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이 졸업만 하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던 학교는 이제 나에게 상아탑이 되었다. 그 한마디로 나에게는 목표가 생겼고, 내 삶이 가야 할 방향이 되었다. 내가 왜 손재주가 있었는지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갈 곳이 있으니 게으르지 말고 서두르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다. 빠르게 성적이 향상됐다. 연말에는 상위권으로 바로 올라섰다. 그리고 3학년이 된 해에는,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화실도 등록했고, 반에서는 미화 부장이 아닌 과학 부장이자 선도 부장이 되었고, 미술부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94학번으로 미대생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2020년 꼭 마흔다섯이 되는 생일 전날,

오늘 또 한 번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예언을 또 한 번 들었다.

“수진 씨, 이 정도면 책을 내도 되겠어. 글이 너무 재미있어. 계속 쓰도록 해봐요”

수필 창작 수업의 이명지 교수님의 말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먼지 털어내듯이 쓰고 싶은 마음에 찾아간 수업이었다. 사실 이명지 교수님과는 글로써 처음 만난 사재 지간이 아니라, 그림으로 연은 맺은 사이였다. 교수님은 갤러리 관장님이었고, 나는 화실의 취미 회원이었다. 언제나 유려하면서도 우아한 말투로 좌중을 사로잡는 이명지 관장님은 알고 보니 수필집을 두 권 발표하신 작가였고, 관장님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이명지 교수님으로 변신한 관장님의 수필 창작 수업에 등록한 지 3개월이 지난 후에 듣는 이야기였다.

 

계시는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그 신비스러운 것들은 우주가 나에게 무심하지 않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이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은희경 작가의 말처럼 만일 삶이 나에게 할 말이 있어 나에게 이순자 선생님과 이명지 교수님을 만나도록 주선해 준 것이라면, 삶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스럽고 의미심장한 것으로부터의 새로운 경험. 그것이 나에게 다른 길로 가라고 권유하는 것이라면, 예언을 믿는 것이 아닌 나를 믿고 자유로이 그 길을 걸어가도 나쁘지 않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차피 가야 할 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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