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허영이 사라진 자리에 재능이 반짝인다 _ 1화
좀바르트 (Sombart, Werner)는 ‘사치 란, 인간이 가진 허영,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으려는 원초적인 욕망에서 기원한다’고 했다. 인간으로 살면서 타인에게 일종의 ‘인정’을 받는 것이 허영이라면 한껏 사치를 부려봐도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 일지도 모른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마이너스 통장의 바닥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나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는 미래에 대해 아무 확신 없는 장대한 계획만 늘어놓고 있을 뿐. 그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거부하고 있었다.
유학을 가볼까? 그래! 난 미술학 공부를 해야겠어!
가족들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유학원을 알아봤다. 현재 나의 미대 유학 입시에 가장 큰 걸림돌은 ‘토플’이었다. 몇 개월 안으로 800점이 넘는 점수를 따야 했다. 미국에서 방학을 맞아 입국한 ‘토플의 신’이 나를 개인지도해주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이미 영, 수를 포기한 나는 기본이 바닥이었다. 한 달 내내 외워지지 않는 단어와 문장과 절대 굴러가지 않는 발음과 씨름하다가 수업만 시작하면 몸이 덜덜거리며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학 준비를 접었다.
오! 아트 전시 기획을 하겠어!
나의 절친이자 전 회사의 동료였던 P작가가 그림이 실린 본인의 에세이를 출간하게 되면서, 홍보 차원의 전시회를 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이 참에 아예 아트 프린트 사업을 하겠다며, 주변의 지인들을 마구 흔들어 깨워 천지가 들썩이게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 기간은 1주일이었지만, 전시 준비를 위해 들인 공력은 1년 치를 써버린 듯하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방전이 돼버렸다. 또 덜덜 떨리는 몸 상태가 되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난 아티스트가 될 거야! 그림을 그리겠어!
그즈음 생긴 거식증으로 비적 마른 나의 불안한 정서는 나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지만, 화가가 되기에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작정 화실을 찾아가 마구잡이로 그림을 그렸고, 작가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충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 똬리를 틀고 앉은 거대한 공허는 나를 삼켜 버리기 전에는 그 게걸스러운 허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산에 들어가서 그림 그리면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 천만에! 넌 정신분열을 할 거야! 그러니 화가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이나 해! 정경부인 상인데 왜 안 하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사주쟁이를 찾아갔다. 사주팔자의 결론은 엄마와 같다.
세상 그 어디에도 길을 알려주는 이가 없다. 길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구심만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전 회사에서 내가 전담하던 브랜드의 담당자에게서 1년 만에 걸려 온 전화다.
D 사: 이 실장님! 우리 브랜드 광고 경쟁 피티 하려는데, 실장님이 참여해 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실장님이 그 회사 관두고 나서 바뀐 담당자와 호흡도 안 맞고, 우리 브랜드 찬밥 취급하는 거 같아서 대행사 바꿔보려고 하는데, 사실 우린 수진 실장님이랑 작업하고 싶거든요.
오랜만에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타인의 부름을 받았다. 계속되는 거절에도 그들은 나를 끝내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전 회사와 함께 붙는 경쟁 피티는 내가 피하고 싶었다. 그들의 입에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솔직히 말한다. 그것이 나를 주저하게 한다고…, 한참의 실랑이 끝에 드디어 결론이 났다.
D 사: 수진 실장님! 우리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요. 우린 당신과 작업하기로 결정했어요. 경쟁 피티 모두 취소했어요. 이제 조건 맞춰졌죠? 욕을 한 바가지 먹었네…. 그러니까 이번 시즌 잘 부탁해요!
맙소사. 절대 이런 상황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가보려고 했으나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그런 와중에 나를 애타게 원하는 광고주가 있다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트디렉터로 광고판에 다시 돌아왔다.
타인에 의한 ‘인정’. 거부할 수 없는 그 달콤한 허영을 배고픈 욕망을 위해 집어삼킨다. 이제야 허기가 가신다. 코끼리를 잡아먹은 것 마냥 배가 부르다. 든든해진 배를 두드리며 그동안 등한시했던 사치를 맘껏 부려보자 다짐한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지금 그것뿐이라면 마음껏 즐기는 게 최선이 아닌가?